지난 글에 이어서 블랭크 이야기를 좀더 해보겠습니다. 이 회사가 남긴 최대 레슨런이 남았거든요.
→지난 글 먼저 읽고 오기
블랭크는 마약베개 이렇게 쪼개서 100만개를 팔았습니다.
- 허리 아픈 사람
- 잠 못 드는 사람
- 원룸에 침대를 못 놓는 자취생
- 부모님 선물 찾는 사람
- 목 각도를 검색해본 사람
콘텐츠 1개가 마켓 1개라고 말씀드렸죠. 마약베개를 팔기 위해 다섯 개의 시장을 만든 겁니다. 이렇게 쪼갠 광고가 상세페이지로 랜딩시키죠. 근데 요즘 상세페이지가 왜 무한히 길어지는 줄 아시나요? 사람들의 니즈가 초세분화되었는데 그걸 한 판에 다 우겨 넣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유명 연예인이면 다 퉁쳐졌는데 요즘은 자신의 페인포인트를 해결해줘야 구매합니다. 왜? 내가 젤 중요하니까요.
블랭크는 잘 쪼갰습니다만 타겟 단위의 광고 세트였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될 콘텐츠로 쪼갰어야 하는데 말이죠. 왜 콘텐츠로 안 쪼갰느냐. 못 쪼갰기 때문입니다.
베개에서 나올 이야기가 몇 개일까요? 푹신하다, 목이 안 아프다, 세탁이 간편하다. 여기서 끝입니다.
반면 매트리스 팔던 회사는 수면으로 가도 억지스럽지 않으며 무한소재를 뽑아낼수 있습니다. 가령 아주 간단하게는 이런 이야기를 팔수 있죠. “판교 개발자 애착 매트리스”. 새벽 3시까지 개발하다 잠들어서 6시에 깼는데 개운하다면 그건 매트리스가 아니라 수면입니다. 개발자들 인터뷰로 1년 뽑고, 직군 별로 다 돌면 2-3년 치는 거뜬합니다. “삼분의일”이 판교 개발자 타겟으로 매트리스 팔다가 지금은 수면을 팔고 있죠.
마약베개가 소재를 더 뽑으려면 베개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멀어지는 순간 그건 수면 이야기가 되고 수면 이야기는 베개 결제창으로 잘 안 돌아옵니다.
원물이 산출하는 이야기의 총량이 처음부터 적었던 겁니다.
같은 소재인 폼을 쓴 토퍼를 출시한다면 가능할수도 있죠. 근데 블랭크는 디지털 방문 판매 회사지, 수면 문제를 해결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신제품을 병렬로 파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죠.
마약베개의 소재가 소진되면 → 악어발팩 → 다운펌 → 샤워기
이렇게 제품을 매년 갈아치웠어요. 갈아치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제품이 콘텐츠 자산을 한 톨도 안 남겼으니 다음 제품도 처음부터 광고비로 밀어야 했으니까요. 신제품 히트가 매년 나와야만 굴러가는 회사는 도박을 매년 하는 회사입니다. 임대료가 쌀 때는 도박이 능력으로 여겨졌죠.
블랭크는 콘텐츠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다만 그 콘텐츠는 제품의 일부가 아니라 제품을 알리는 소모품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캐스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진단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같은 병에 걸린 회사가 콘텐츠를 제대로 시도했다가 어떻게 됐는지를 보면 됩니다. 마침 해외에 있습니다.
캐스퍼는 2014년에 매트리스를 진공 압축해 상자에 담아 문 앞까지 보내준 미국 회사였습니다. 100일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해줬습니다. 미국에서 매트리스를 구매하려면, 정장 입은 매장 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5분 누워보고 수백만 원짜리를 결정하던 기존 구매 방식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발명입니다. 상자에서 매트리스가 부풀어 오르는 개봉 영상이 한동안 유튜브를 휘몰아쳤고요. 물건 하나는 제대로 만든 회사입니다.
그리고 이 회사는 광고비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 반 윙클스라는 온라인 매거진을 창간했어요. 수면을 다루는 독립 매체로 만들 셈이었습니다. 편집장을 앉히고 기자를 뽑고 꿈과 불면과 시차 적응에 대한 긴 기사를 실었습니다. 매트리스 이야기는 일부러 안 썼어요. 광고처럼 보이면 아무도 안 읽으니까요.
그리고, 창간 2년쯤 뒤에 접었습니다.
기사는 많은 사람들한테 읽혔습니다. 그런데 수면에 대한 좋은 기사를 읽은 사람이 매트리스 결제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잠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지금 매트리스를 살 사람은 겹치는 구간이 아주 좁거든요. 매트리스는 10년에 한 번 사는 물건이라, 오늘 이 기사를 읽은 만 명 중에 올해 매트리스를 살 사람은 몇십 명입니다.
나가는 길은 냈는데 돌아오는 길이 없었던 겁니다.
2019년에 CNBC가 세어보니 미국에서 상자 매트리스를 파는 회사가 175개였습니다. 취재해 보니 이 회사들의 폼 배합은 서로 비슷했고 같은 공장에서 나온 것들도 있었어요. 그 공장 임원이 털어놓은 영업 방식이 백미인데, 브랜드가 찾아와 자기네 마케팅 스토리에 이런 특징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거기 맞춰 매트리스를 설계해준답니다. 물건은 공장이 만들고 차이는 이야기가 만들던 시장이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그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지면값은 175개 회사가 경매로 올려놨습니다. 2019년 캐스퍼의 장부에는 매출 4억 4천만 달러에 순손실 9,300만 달러가 찍혔고, 상장 첫날 몸값은 1년 전 사모 시장에서 받던 값의 절반이었습니다.
잘 쪼개지는 물건과 안 쪼개지는 물건 판별법
베개와 매트리스를 나란히 놓고 보면 축이 보입니다. 이 축은 앞으로 여러분 물건을 볼 때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요. 세 가지만 재보시면 됩니다.
첫째, 얼마나 자주 다시 사나요?
베개는 3년에 한 번, 매트리스는 10년에 한 번입니다. 화장품은 두 달, 음식은 매주고요. 재구매 주기가 길면 오늘 콘텐츠를 본 사람 중 오늘 살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 뚝 떨어집니다. 그래서 같은 조회수를 만들어도 전환이 안 돼요. 반 윙클스가 여기서 걸렸습니다.
둘째, 이야기 주머니가 달려 있나요?
베개에서 나올 이야기는 세 개쯤에서 바닥이 납니다. 반면 화장품은 남들 세면대만 구경해도 1년치 소재가 나옵니다. 음식은 레시피가 무한하고요. 원물이 이야기를 계속 낳아주면 콘텐츠 제작이 창작에서 채굴로 내려옵니다. 안 낳아주면 매번 새로 지어내야 하고, 지어낸 이야기는 제품에서 자꾸 멀어집니다.
셋째, 그 이야기가 제품으로 돌아오나요?
이게 제일 중요하고 가장 많이 실수합니다. 수면 잡지는 매트리스로 안 돌아왔어요. 반면 "이 배우는 세안제로 뭘 쓰나"는 세안제로 돌아옵니다. 이야기와 제품 사이의 거리가 짧아야 하는데, 너무 짧으면 광고가 돼서 아무도 안 보고 너무 길면 안 돌아옵니다.
- 너무 짧으면 눈길 없음
- 너무 길면 전환 없음 = 프로덕트 콘텐츠가 핏하지 않음
세 개 다 나쁘면 남는 선택지가 하나뿐입니다. 광고 세트로 쪼개서 임대료 내면서 장사하는 것이죠. 젠트리피케이션은 불보듯 뻔하고요. 블랭크가 하던 일입니다.
한 달에 4억 명 앞에 시장을 세웠는데 팔 물건은 없었습니다
시장 세우는 재주는 한국에서 손에 꼽혔는데 팔 물건이 없던 회사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바로 2015년의 피키캐스트입니다. 그해 이 회사의 월평균 조회수가 4억 건이었어요. 앱 하루 평균 이용 시간은 12.1분으로 페이스북 다음 2위였습니다. 인스타그램보다 위였고 카카오스토리보다 위였어요. 당시 스무 살 언저리 한국인의 하루를 페이스북 다음으로 많이 가져간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 6월 1일, 신사동 옐로모바일 본사 기자간담회에서 모기업 대표가 이 회사 매출을 공개했습니다. 월 3억 원이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나가는 영화 네이티브 광고가 수입의 전부였고, 월 인건비는 4억에서 5억 원 사이였습니다. 조회수 1을 얻기 위해 0.75원을 쓰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해 연간으로는 손실이 매출의 다섯 배였습니다.
관객을 못 모아서 이렇게 됐다고 하기엔 위에 적은 조회수 4억 건이 바로 그해 숫자입니다. 그러니 배를 갈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우선 그 4억이라는 장부터 상당 부분 돈으로 산 것이었습니다. 모기업 옐로모바일이 그해 피키캐스트와 쿠차 두 곳에 쓴 광고선전비가 540억 원인데, 같은 해 카카오가 1년 동안 쓴 광고선전비가 568억 원입니다. 스타트업 두 곳의 마케팅비가 카카오와 맞먹었다는 말.
다음으로 남의 물건을 팔았습니다. 이 회사의 제작 방식은 여기저기서 재밌는 걸 모아 편집해 올리는 큐레이션이라 초창기부터 저작권 논란이 따라다녔습니다. 내 지면에 남의 제품 이야기를 내 콘텐츠처럼 만들어 실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겁니다. 영화사가 8천만 원을 내면 우리 앱에 그 영화 이야기가 재밌는 콘텐츠 얼굴을 하고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그러면 이 업의 본질은 위탁판매입니다.
이게 왜 위험하냐면 가격 결정권이 내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물건이 있는 장사꾼은 불황이 오면 마진을 깎으면서 버팁니다. 원가와 판매가 사이의 공간이 내 것이니까요. 수수료 장사꾼에게는 그 공간이 없습니다. 광고주가 단가를 깎으면 깎이는 대로 받아야 하고, 광고 시장이 얼어붙으면 그대로 매출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이쪽 장사는 재고가 사람이라 불황에 줄일 수 있는 비용이 인건비뿐이고요.
그래서 회사는 2022년 9월에 폐업했습니다. 망한 이유를 두고 저작권 논란이나 모기업 부실이나 모바일 트렌드 변화라고 적으면 맞는 말이긴 한데 코에 걸면 코걸이인 피상적 해석입니다. 진짜 원인은 한 달에 4억 번 사람을 모을 줄 알았고 그 앞에 내놓을 자기 제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프로덕트를 먼저 만드세요. 단,
- 재 구매가 많은 상품이어야 합니다.
- 이야기의 총량이 많은 원물이어야 합니다.
- 프로덕트 콘텐츠 핏해야 합니다.
무료 진단 이벤트, 퍼스널 프콘핏 레포트를 보내드립니다.
내 경험으로 어떤 프로덕트를 팔아야 할지, 내 프로덕트가 콘텐츠와 핏한지 알고 싶다면 무료 진단 레포트 신청해주세요. 차주부터 순차적으로 레포트 발송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