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회사와 AI의 수혜
요즘 반도체 장비회사들의 수주 소식이 심상치 않다. 인공지능이 촉발한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타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026년 한 해에만 70조 원에 이르는 투자를 예고했고, 그 낙수를 국내 장비회사들이 누리고 있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증설과 HBM 공급 부족, 디램과 낸드 가격 상승, 그리고 글로벌 설비투자 확대라는 네 갈래 순풍이 한꺼번에 불면서, 한국은 올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반도체 장비에 많이 투자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삼성전자는 HBM 월 생산량을 17만 개에서 20만 개로 늘리며 평택 신규 라인의 완공 시점을 앞당기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실적을 우려하던 장비회사들이 이제는 밀려드는 주문을 어떻게 다 소화할지를 고민한다. 후공정의 본딩 장비부터 전공정의 식각과 증착 장비까지, 공정을 가리지 않고 발주가 늘어나고 있다.
호황의 뿌리에는 물론 인공지능이 있다. 대형 인공지능 모델을 돌리는 가속기 한 장에 HBM이 여러 개씩 들어가고, 그 HBM을 만들려면 더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수요가 칩에서 그치지 않고 그 칩을 만드는 장비로, 다시 그 장비의 부품과 소모품으로 꼬리를 물고 번진다. 오랜 침체를 지나던 국내 소부장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게 된 배경이다. 증권가에서 반도체 소부장 종목이 슈퍼사이클의 대표적인 수혜주로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산화의 흐름도 시장을 뜨겁게 달군다. 몇 해 전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소재와 부품, 장비의 자립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뒤, 국내 제조사들은 특정 해외 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 국산 장비의 채택을 꾸준히 늘려 왔다. 인공지능발 호황은 국산화 흐름을 한층 더 빠르게 올렸다. 발주가 폭증하면서 그동안 문을 두드리던 국산 장비에도 기회가 넓게 열린 것이다. 그러나 국산 장비가 실제로 해외 기업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자, 자리를 지키려는 쪽의 특허 견제도 함께 날카로워졌다.
다만, 수주 잔고가 쌓이는 만큼, 그 시장을 차지하려는 다툼도 커지는 법인데, 반도체 장비처럼 기술 장벽이 높고 고객이 소수의 대형 제조사로 한정된 분야에서는 그 다툼이 곧 특허 분쟁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최근 몇 달 사이에 장비 업계에서 오간 특허 소송과 심판의 소식은 예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지고 있는 것 같다. 호황은 분명한 기회이지만, 그 기회의 이면에는 위기가 드리우고 있을 수 있다.

시장이 커질수록 확대되는 분쟁 국면
특허 분쟁이 늘어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후발주자에게 기회가 열리려는 상황에서 여지없이 앞서 있던 기업들의 특허를 통한 견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어렵게 쌓아 올린 시장 지위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특허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국산화 장비가 글로벌 기업의 아성에 다가설수록, 그 글로벌 기업은 진입을 늦출 카드로 특허를 꺼내 든다.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하더라도, 소송이 걸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객사의 채택을 망설이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국내 대기업 고객사가 공급망 안정을 위해 국산 장비 채택을 늘리면서, 오랫동안 특정 공정을 독점하던 해외 장비회사들이 위협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장비 시장에는 특허가 유난히 강력한 무기가 되는 구조가 있다. 반도체 장비 시장의 고객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같은 소수의 제조사로 한정된다. 이들에게 장비를 납품하려면 까다로운 품질 검증을 통과해야 하고, 한 번 검증을 통과한 장비는 좀처럼 교체되지 않는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다. 이런 시장에서 후발주자의 발목을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특허 소송이다. 고객사는 특허 분쟁에 휘말린 장비를 채택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소송 그 자체가 진입을 막는 장벽으로 작동한다. 장비 하나의 단가가 수억에서 수십억 원에 이르고 한 번 채택되면 후속 발주가 이어지는 만큼, 특허 한 건의 향방이 회사의 명운을 가르기도 한다. 그래서 호황기의 특허 분쟁은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간 누가 어느 공정을 차지할지를 미리 정하는 자리다.

한미반도체 v. 한화세미텍
먼저 HBM 후공정의 핵심 장비인 TC 본더를 둘러싼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다툼이다. TC 본더는 여러 층으로 쌓은 메모리 칩을 열과 압력으로 정밀하게 붙이는 장비로, HBM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에서 수율을 좌우하는 핵심 설비다. HBM은 여러 개의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통로를 넓힌 메모리인데, 층을 높이 쌓을수록 붙이는 기술의 난도가 올라간다. 그만큼 본딩 장비의 값어치도 커졌다. HBM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 장비의 몸값이 함께 뛰었고, 오랫동안 이 시장을 사실상 홀로 이끌어 온 한미반도체에 한화세미텍이 도전장을 내밀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한미반도체는 2024년 말 한화세미텍이 자사의 TC 본더 기술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한화세미텍은 이에 맞서 한미반도체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고 역소송을 냈다. 단순한 방어를 넘어 맞소송으로 번진 것이다.
2026년 4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침해금지 소송의 첫 변론기일이 열리면서 공방이 본격화되었다. 한미반도체는 2017년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는 두 개 모듈에 네 개의 본딩 헤드를 얹은 방식이 자사의 원조 기술이라는 점과, 설령 특허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이 먼저 실시해 왔다는 선사용권을 함께 내세웠다. 한화세미텍은 30년 넘게 축적한 자체 기술로 개발했고 사전에 선행기술 조사도 거쳤기 때문에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맞선 것으로 보인다.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소송의 결과가 한화세미텍의 시장 진입 여부와 한미반도체의 독주 체제를 함께 가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HBM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한 축을 놓고 벌어지는 만큼,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분쟁으로 꼽힌다.

램리서치 v. CMTX & 플라텍
식각 장비의 강자인 미국 램리서치와 국내 소부장 기업들의 공방이다. 식각은 웨이퍼 위에 회로 모양을 깎아 내는 공정으로, 미세화가 진행될수록 정밀도가 중요해지는 핵심 영역이다. 오랫동안 이 분야의 부품과 소모품 시장을 해외 기업이 주도해 왔는데, 국내 소부장 기업들이 국산화에 나서면서 곳곳에서 특허 충돌이 벌어졌다. 이쪽은 업체마다 희비가 뚜렷하게 갈린다. 삼성전자를 고객으로 둔 부품사 CMTX는 램리서치의 이른바 C링 관련 특허를 상대로 청구한 특허심판 네 건에서 모두 이겼고, 램리서치의 무선주파수 접지복귀장치 특허에 대해서는 선행기술을 결합하면 통상의 기술자가 쉽게 발명할 수 있어 진보성이 없다는 무효 판단까지 받아냈다. 반면 SK하이닉스를 주요 고객으로 둔 플라텍은 램리서치를 상대로 낸 특허 무효심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항소로 넘어갔다. 또 다른 부품사는 세 건의 특허 가운데 두 건은 무효, 한 건은 유효라는 엇갈린 판단을 받기도 했다.
같은 상대를 두고도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패할 수 있다. 무효심판은 상대 특허가 신규성과 진보성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절차인데,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 어딘가에 존재하는 선행 문헌을 찾아내고 그것이 상대 특허의 구성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논리적으로 짜맞춰야 한다. 같은 램리서치 특허라도 어느 회사가 더 정교한 무효 논리와 더 나은 선행기술을 준비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특허 분쟁의 승패는 회사의 크기가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조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진테크 v. 코쿠사이
증착 공정의 핵심인 ALD 장비를 둘러싼 유진테크와 일본 코쿠사이의 다툼이다. ALD는 원자층을 한 겹씩 쌓아 올려 아주 얇고 균일한 막을 입히는 공정으로, 미세화가 진행될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기술이다. 코쿠사이는 삼성전자에 특정 공정용 ALD 장비를 오래 독점 공급해 왔는데, 유진테크가 이 시장에 들어오자 특허침해 소송을 걸었다. 독점을 지키려는 쪽과 진입하려는 쪽의 전형적인 충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2026년 7월 15일 특허법원이 코쿠사이의 핵심 특허 하나에 대해 특허심판원의 기존 판단을 뒤집고 무효 결론을 내렸다.
특허의 유효성을 다투는 무효심판은 먼저 특허청 산하 특허심판원에서 판단하고, 그 결과에 불복하면 특허법원이 다시 심리한다. 코쿠사이의 특허는 특허심판원 단계에서는 유효로 보았는데, 상급 심급인 특허법원이 이를 무효로 뒤집었다. 1차 판단이 그대로 확정되지 않고 상급심에서 결론이 달라진 것이어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산 장비가 기술적으로 한 발 앞서 나간 셈이다. 다만 코쿠사이가 문제 삼은 특허가 이것 하나만은 아니어서, 나머지 특허에 대한 심판이 아직 남아 있다. 유진테크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것은 분명하지만, 다툼이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이르다.

진짜 위협은 제품을 만들지 않는 자들
지금까지 살펴본 분쟁은 그래도 서로 제품을 만들어 경쟁하는 회사들 사이의 다툼이다. 이런 분쟁에서는 서로 협상할 수 있다. 상대도 제품을 팔기 때문에, 이쪽이 가진 특허로 맞소송을 걸어 압박하거나, 서로의 특허를 주고받는 크로스 라이선스로 매듭짓는 길이 열려 있다. 실제로 앞의 사례들에서도 맞소송과 무효심판이 오가며 균형점을 찾아가는 흐름이 보인다.
정작 더 조심해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 제품을 만들지 않고 특허만으로 공격하는 NPE, 이른바 특허관리전문회사다. 흔히 특허괴물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스스로 장비를 만들거나 팔지 않는다. 특허를 보유하고 그 특허를 침해했을 만한 회사를 찾아 소송이나 라이선스 협상을 걸어 수익을 낸다. 파산한 기업이나 연구소가 내놓은 특허를 조용히 사들였다가, 그 기술이 시장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 그때 라이센싱 전략을 실행하게 된다.
NPE는 시장이 뜨거울 때 움직인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의 표적은 특허를 침해했을 법하면서 동시에 배상할 능력이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수주가 폭증하고 매출이 뛰고 상장으로 현금까지 두둑해진 반도체 장비회사는, NPE의 눈에는 더없이 좋은 사냥감이 될 수 있다. 당연하게도 NPE를 상대로는 실사업자끼리 통하던 방어 논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맞소송을 걸어 압박할 대상도 없고, 크로스 라이선스로 맞바꿀 카드도 마땅치 않다. 이들은 오로지 특허 하나만 들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소송을 끝까지 끌고 갈 각오로 압박한다. 방어하는 쪽은 이기더라도 막대한 소송 비용과 시간을 치러야 하므로, 적당한 선에서 합의금을 내고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국 시장이 문제다. NPE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대가 미국이고, 그곳에서는 특허 소송의 배상 규모와 절차의 무게가 국내와 비교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에는 국제무역위원회, 이른바 ITC를 통한 수입배제라는 강력한 수단이 있다. 특허를 침해한 제품이 미국으로 수입되는 것을 아예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절차인데, 결론이 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고 파급력이 커서 장비나 부품을 미국에 공급하는 기업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국산 장비가 해외 고객으로 뻗어 나가는 순간, 이 무대의 규칙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방어에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위협이 될 만한 특허를 NPE보다 먼저 사들이거나, 여러 기업이 힘을 모아 방어용 특허를 공동으로 확보하는 방법이 해외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다만 국내 장비회사들은 그동안 이런 상대를 만날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탓에 대응 경험과 인프라가 얇다. 내수와 특정 대기업 납품 위주로 사업을 해 온 회사일수록, 특허를 공격이나 방어의 무기가 아니라 정부 과제나 상장 요건을 갖추기 위한 등록 대상 정도로 여겨 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시장이 국내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래도 큰 탈이 없었다. 그러나 국산 장비가 글로벌 공급망으로 뻗어 나가고 미국과 해외 고객으로 매출이 확대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점검해볼 것들
특허를 출원하는 단계에서부터 분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침해를 입증하기 쉬운 구성으로 청구범위를 짜고, 상대가 우회할 만한 길목을 미리 막아 두는 설계는 등록 이후에는 되돌리기 어렵다. 예컨대 장비 전체가 아니라 소모품이나 핵심 부품 단위로도 권리를 걸어 두면, 상대가 장비를 조금 바꾸더라도 부품에서 침해를 잡아낼 수 있는 식이다.
결국 기회와 위기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시장이 열려 기회가 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기회를 노리는 분쟁의 위기도 함께 온다. 밀려드는 수주에 마음을 놓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각자의 특허가 이 파도를 견딜 만큼 단단한지 한 번쯤 점검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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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유철현 대표 변리사는 서울대 재료공학부를 졸업하고 2007년 44기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직접 투자하는 ‘엑셀러레이터형’ BLT 특허법률사무소를 시작으로, IT와 BM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기술 기반 기업의 지식재산 및 사업 전략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심의위원과 한국엔젤투자협회 TIPs 사업 심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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