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검증 #피봇 #사업전략
하버드 조경 석사는 왜 나무를 스캔하다 멈췄을까

지난 편(우리가 풀고 있는 그 문제, 진짜 문제일까?)에서 문제에는 세 개의 층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고객이 입으로 말한 문제(1층), 말 뒤에 숨은 진짜 문제(2층), 그리고 고객도 시장도 모르는 근본 문제(3층). 표층에서 멈추지 않고 아래로 파고들수록, 남들이 못 본 기회가 열린다고요.

그런데 이런 반응이 있을 수 있어요. "말은 알겠는데, 진짜 그렇게 되나요?" 그래서 이번엔 실제 사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려고 해요. 표층에서 시작해 근원까지 내려간, 그 과정이 유난히 선명한 회사거든요.

나무를 유통하는 스타트업, 루트릭스예요.


 

시작은 멋진 기술이었어요

 

 

루트릭스의 안정록 대표는 고려대에서 환경생태공학을, 하버드 건축대학원에서 조경설계를 공부했어요. 그러니까 나무와 자연을 오래 파고든 사람이에요.

창업의 씨앗은 우연한 대화에서 나왔어요. 조경 현장을 담당하는 친구에게 "현장에서 뭐가 제일 불편하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대요. 소나무 하나를 심는데 크레인으로 하루 종일 나무를 돌려가며 예쁜 각도를 찾고, 그게 며칠씩 걸린다고요.

설계를 하던 안 대표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나무를 미리 스캔해서, 설계 단계에서부터 실제 나무 그대로 반영하면 되잖아?" 실제로 조경 설계를 하는 사람들은 진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3D 모델로만 설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설계대로 시공이 안 되는 건 당연했어요.

여기서 안 대표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어요. "이 산업의 문제는 나무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맞는 진단이에요. 실제로 국내엔 어디에 누가 어떤 나무를 얼마에 키우는지에 대한 기본 데이터 자체가 없어요. 조경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조차 명확하지 않고요. 그러다 보니 그 빈자리를 중개인이 메우고 있었어요.

수요자는 나무 품질을 파악하기 어렵고 믿을 공급자를 찾기 힘드니 중개인에게 의존하고, 공급자도 어디에 팔지 몰라 중개인을 거쳐요. 그런데 정작 그 중개인이 정보를 쥐고 있으니, 정보 비대칭은 오히려 더 심해지는 구조였죠. 그래서 루트릭스는 라이다 스캐닝으로 전국 농장의 나무를 초정밀 스캔해서, 그 데이터로 이 비대칭을 걷어내고 나무를 팔면 거대한 유통 플랫폼이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멋진 출발이죠. 하버드에서 배운 첨단 설계 기술로, 낙후된 산업을 디지털로 바꾼다. 그런데 여기가 딱 1층이에요. 고객이 말한 불편("나무 정보가 없어 불편하다")에서 출발해, 그럴듯한 기술 솔루션을 만든 지점. 지난 편에서 말한, 대부분의 팀이 멈추는 바로 그 자리요.


 

그런데 고객을 만나보니

 

루트릭스는 실제로 그 기술을 개발했어요. 라이다로 나무를 스캔하는 것까지 다 해냈죠. 그리고 이제 이 정밀한 데이터를 팔러 고객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고객들이 원한 게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고객이 정말로 필요로 한 건 나무 한 그루의 어마어마하게 디테일한 3D 데이터가 아니었어요. 그저 가격, 규격, 수량이 명확하고, 사진 정도만 있으면 충분했어요. 그 정도면 산다는 거예요.

대신 다른 게 훨씬 중요했어요. 조경 공사 한 건에는 나무 품목이 50가지, 100가지가 넘게 들어가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소나무는 소나무 전문 중개인에게, 느티나무는 느티나무 전문에게, 잔디는 잔디 전문에게 — 이렇게 여러 사람을 일일이 거쳐야 했어요. 고객이 진짜 지긋지긋해한 건 이거였어요. 여러 사람 안 거치고, 한 번에, 한 곳에서 다 해결하고 싶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나요. 고객이 원한 건 '한 나무의 깊은 데이터'가 아니라 '많은 농장을 넓게 아는 것'이었어요. 정밀함이 아니라 커버리지였던 거죠. 안 대표가 공들여 만든 스캔 기술이 향한 방향과, 고객이 진짜 원한 방향이 어긋나 있었어요.

 

 

이게 2층이에요. 고객이 "나무 정보가 없다"고 말했을 때(1층),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 '완벽한 정보'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면 계속 헛다리를 짚었을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고객을 만나 거래를 해보니, 진짜 문제는 '정보의 깊이'가 아니라 '한 번에 해결되는 편리함', 즉 믿고 맡길 수 있는 원스톱이었어요.

중요한 건, 이 2층을 안 대표가 책상에서 알아낸 게 아니라는 거예요. 스캔 기술을 만들고, 고객을 만나고, 실제로 팔아보는 과정에서 드러났어요. 아래층은 늘 이렇게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요.


 

더 내려가니 ‘시간과 신뢰’가 있었어요

 

방향을 튼 루트릭스는 이제 초정밀 데이터 대신, 더 많은 농장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어요. 전국을 뛰어다녔죠. 산으로, 바다로, 배를 타고 섬까지 들어가 나무를 보고 왔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층이 드러나요. 조경이라는 산업은 사이클이 유난히 길어요. 설계가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기까지 3년, 5년, 길면 7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도 있어요. 그러니 아무리 지금 영업을 해도, 당장 거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내년에 시공 들어가면 연락 줄게"라는 답이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루트릭스는 1~2년 동안은 거의 매출 없이, 계속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견적을 넣으며 버텼어요. 그러다 2년쯤 지나자 그 고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어, 너희 어느 정도 하고 있네. 그럼 한번 맡겨볼게." 3년 차에 그 신뢰가 거래로 터지면서, 2024년 매출이 전년의 20배로 뛰었어요.

여기서 보이는 게 더 깊은 층이에요. 이 산업의 문제는 단순히 '데이터가 없다'가 아니었어요. 긴 사이클을 견디며 신뢰를 쌓아야만 거래가 일어나는, '시간과 신뢰'의 문제이기도 했던 거죠. 정보만 정리한다고 시장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발로 뛴 시간이 신뢰로 쌓여야 비로소 움직였어요.


 

근원에는 ‘자연을 일상으로’가 있었어요

 

그럼 가장 아래, 3층에는 뭐가 있었을까요.

 

안 대표가 그리는 그림은 나무 유통이 아니에요. 그는 AI와 로보틱스 다음 시대는 사람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대라고 봐요. 그리고 그 자연의 가장 기본 단위인 나무, 그 데이터를 다루는 회사가 되겠다는 거예요. 나무 유통을 넘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인프라를 짓겠다는 거죠.

루트릭스의 미션은 "아름다운 자연의 감동을 더 많은 사람의 일상이 되게 하자"예요. 좋은 자연 공간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훗날 결정권자가 되었을 때 더 좋은 결정을 내릴 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고 해요.

이게 3층이에요. 아무도 나무 유통을 '기후 인프라'나 '자연을 일상으로 되돌리는 일'로 보지 않았을 때, 그 근원의 층을 본 거예요. 남들이 "나무 파는 회사"라고 볼 때, 루트릭스는 완전히 다른 층에서 자기 일을 정의하고 있었어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

 

루트릭스의 여정을 층으로 정리하면 이래요.

처음엔 "나무 데이터가 없다"는 표층 문제에서 출발했어요(1층). 하지만 고객을 만나보니 진짜 원한 건 정밀함이 아니라 '한 번에 해결되는 편리함'이었고(2층), 더 내려가니 긴 사이클을 견디는 '신뢰'의 문제였고(그 아래층), 가장 밑에는 '자연을 일상으로'라는 근원이 있었어요(3층). 표층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에서 층의 구조보다 더 중요한 걸 짚고 싶어요. 안 대표는 이 아래층들을 어떻게 알아챘을까요?

머리로 정리한 게 아니에요. 처음엔 그도 "데이터가 문제"라고 확신하며 멋진 스캔 기술을 만들었어요. 그 확신이 틀렸다는 걸 알려준 건 책상이 아니라 현장이었어요. 고객을 직접 만나고, 실제로 나무를 팔아보고, 전국을 발로 뛰는 과정에서 진짜 문제가 하나씩 드러난 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문제를 다시 정의했다면, 그게 맞는지는 반드시 실행으로 확인해야 해요. 내 재정의가 옳은지는 내 머릿속이 아니라 고객이, 현장이 답해줘요. 루트릭스가 스캔 기술에 계속 매달리지 않고 방향을 틀 수 있었던 건, 일찍 고객을 만나 실제로 부딪혔기 때문이에요.

그럼 고객을 어떻게 만나야 진짜 문제가 드러날까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봐야 할까요. 그건 또 그것대로 긴 이야기라, 언젠가 제대로 풀어볼게요.

오늘은 이 질문 하나만 남기고 싶어요. 지금 우리가 붙잡고 있는 문제는, 고객을 직접 만나 확인한 걸까요? 아니면 아직 책상 위 가설에 머물러 있는 걸까요.

루트릭스처럼, 한번 현장으로 내려가 볼 시간인지도 몰라요.


 

스타트업의 “성장”을 기획합니다. 기획하는별 (블로그 : https://sparkle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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