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에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놓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갈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어떤 회사에서는 그 체계가 계속 진화하고, 어떤 회사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한동안 저는 그 차이가 대표의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챙기는 대표의 회사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무너진다고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 대표 중 가장 열심이었던 분의 회사가 1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체계를 만드는 내내 직접 챙겼고, 중간에 먼저 진행 상황을 확인하던 분이었습니다. 반대로 담당했던 대표의 회사는, 1년 뒤에 처음 만든 것보다 나아져 있었습니다. SOP는 세 번 개정되어 있었고,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그 문서를 업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두 회사는 규모도 비슷했고, 만든 것도 겹쳤습니다. 업무를 흐름 단위로 묶고, 핵심 업무에 SOP를 만들고, R&R을 정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1년 뒤가 갈렸습니다. 앞으로 이 두 회사를 A사와 B사로 부르겠습니다. 나아진 쪽이 A사, 사라진 쪽이 B사입니다.
체계가 살아남는지 여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지로 유지되는 체계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체계가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흔히 이렇게 진단합니다. 대표가 끝까지 챙기지 않아서, 팀장들이 의지가 없어서, 조직 문화가 안 받쳐줘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누군가 계속 챙기면 체계는 유지됩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챙기는 사람이 바쁜 달이 오면 느슨해지고, 그 사람이 회사를 떠나면 함께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계속 챙기는 것 자체가 리더의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앞선 편에서 다룬 리더의 실무 매몰이, 체계 유지라는 다른 이름으로 반복되는 겁니다.
오래가는 체계란, 아무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굴러가는 체계입니다.
누군가의 의지가 필요하다면 그 체계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는 겁니다. 의지가 필요 없어야 자리를 잡은 겁니다.
A사와 B사를 가른 것도 이것이었습니다. B사의 체계는 대표의 관심 위에 올려져 있었고, A사의 체계는 조직 구조 안에 박혀 있었습니다. 아래는 B사에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B사에서 1년 동안 벌어진 일

처음 ─ 결정이 계속 위로 올라갔다
체계를 막 갖춘 직후, B사에서는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결정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새 방식에 익숙하지 않으니 물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그 패턴이 바뀌지 않았다는 겁니다. 애매한 상황이 생기면 팀원은 팀장에게 묻고, 팀장은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대표가 답을 정해줬습니다. 조직 안에서 “이 정도는 우리가 정하면 된다”고 판단하는 주체나 기준이 자리 잡지 못한 겁니다.
A사는 달랐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몇 번 애매한 경우가 있었는데, 팀장들끼리 이야기해서 정했어요.”
같은 상황에서 A사는 안에서 결론을 냈고, B사는 계속 위를 쳐다봤습니다. 이 차이가 이후 1년을 갈랐습니다. 조직 안에 판단의 주체가 서느냐, 서지 못하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3개월 ─ 담당자가 나가면서 함께 사라졌다
B사에서 SOP 정리를 주도하던 과장이 이직했습니다. 그 사람은 체계를 만드는 내내 가장 적극적이었고, 문서 대부분을 직접 정리했습니다. 어떤 항목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도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수인계는 했습니다. 파일 위치를 알려주고, 문서 목록을 정리해서 넘겼습니다. 그런데 넘어간 건 파일이었지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후임자는 “이 문서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습니다.
A사에서는 같은 시기에 담당자가 바뀌었는데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SOP 관리 책임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팀장 직책에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팀장이 바뀌면 새 팀장이 그 책임을 이어받는 구조였고, 직무 인수인계 항목에도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6개월 ─ 새로 온 사람이 배울 곳이 없다
B사에 신입 두 명이 입사했습니다. 기존 직원들이 옆에서 알려주는 방식으로 업무를 익혔습니다. SOP 문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려주는 사람마다 방식이 조금씩 달랐고, 신입들은 각자 다른 방식을 배웠습니다. 이 시점부터 문서와 실제 업무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서는 예전 방식을 담고 있는데 사람들은 다르게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A사의 온보딩 절차에는 SOP 확인 단계가 들어 있었습니다. 새로 온 사람이 담당 업무의 SOP를 읽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표시해서 팀장과 이야기하는 순서였습니다.
여기서 예상치 못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신입이 표시한 부분이 실제로 문서가 불친절한 곳이었던 겁니다. 오래 일한 사람은 당연해서 안 보이는 빈틈이 새로 온 사람 눈에는 보입니다. A사의 SOP가 세 번 개정된 것도 상당 부분 이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9개월 ─ 안 맞는 상황이 생겼는데 고칠 방법이 없었다
B사가 새로운 유형의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기존 SOP로는 처리되지 않는 건이었습니다. 담당자는 일단 자기 판단으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건도 비슷하게 처리했습니다.
SOP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대표에게 말하기엔 사소해 보였고, 팀장에게 말하니 “그럼 그렇게 하세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문서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SOP는 현실과 다른 문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실과 다른 문서는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A사에는 분기마다 30분짜리 점검 자리가 있었습니다. 팀장들이 모여서 지난 분기에 SOP와 안 맞았던 상황을 공유하고, 고칠 것을 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거창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안건이 없으면 10분만에 끝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건 자리가 정기적으로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무언가 안 맞을 때 “다음 점검 때 이야기하면 되겠다”고 생각할 곳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1년 ─ 아무도 열지 않는 문서가 되었다
이 시점의 B사는 처음 상태와 같았습니다. 문서는 서버 어딘가에 있었지만 실제 업무는 사람들의 기억과 습관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체계를 만들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안 열리는 문서 파일이 하나 더 늘어난 상태였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B사 대표는 이 과정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여러 번 있었지만 대표에게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담당자 퇴사도, 신입 온보딩도, 새 거래 유형도 각각은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체계는 어느 날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무너집니다.
하나가 빠지면 다음이 따라 빠집니다

B사에서 벌어진 일을 다시 보면, 각각이 독립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결정이 위로 올라가는 상태로 시작했기 때문에, 조직 안에 판단 주체가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판단 주체가 없으니 담당자가 나갈 때 그 역할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입에게 문서를 알려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문서가 되니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해도 고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섯 가지가 각각 무너진 게 아니라, 첫 번째가 무너지면서 나머지가 따라 무너진 겁니다.
반대로 A사는 첫 단추부터 달랐습니다. 결정을 조직 안에서 내리기 시작하니 판단 주체가 생겼고, 주체가 있으니 인수인계에 포함됐고, 인수인계되니 신입에게도 전달됐고, 계속 쓰이니 안 맞는 부분이 드러나 고쳐졌습니다.
오래가는 체계는 여러 개의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서로 물려 있는 하나의 연쇄입니다.
그래서 점검 할 때도 순서가 있습니다. 뒤쪽부터 손보면 앞쪽이 무너져 있어서 소용이 없습니다. 판단이 조직 안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먼저 보고, 그 다음 관리 책임의 소재, 신규 진입 경로, 변경 경로 순으로 확인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것

이 시리즈에서 다섯 편에 걸쳐 다룬 것들이 있습니다.
흩어진 업무를 흐름 단위로 묶는 일, 매뉴얼이 살아 있게 만드는 조건, R&R 갈등의 진짜 원인, 위임이 작동하기 위한 구조, 정보가 계층별로 걸러지는 흐름. 각각 다른 문제였고 다른 처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만들어놓는다고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위업무를 정의해도 새로운 업무가 계속 생깁니다. SOP를 만들어도 상황이 바뀝니다. R&R을 정리해도 조직이 커지면 다시 애매해집니다. 위임 구조를 설계해도 사람이 바뀝니다. 정보 흐름을 만들어도 팀이 늘어납니다.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건, 그 체계가 스스로 굴러가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작업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처음 만들 때에는 열의가 있어서 잘 굴러갑니다. 어려운 건 그 열의가 식은 다음입니다. 두 번째 사이클, 세 번째 사이클은 조직이 스스로 돌릴 수 있느냐가 1년 뒤를 가릅니다.
사람 머릿속에서 회사 시스템으로

이 시리즈의 제목은 처음부터 이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이 몇몇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조직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상태로 옮겨가는 일입니다.
그 이동이 완료되었는지는 간단한 질문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핵심 인물이 한 달간 자리를 비워도 회사가 평소처럼 돌아가는가.
돌아간다면 시스템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직 사람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맞으면 스스로 고쳐갈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완벽하게 만들려고 할수록 고치기 어려워지고, 고치기 어려운 체계가 가장 먼저 죽습니다.
시리즈를 마치며
이 시리즈를 관통한 문장이 하나 있다면, 이것입니다.
회사를 살리는 건 사람을 더 갈아넣는 게 아니라, 다시 묻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
여섯 편에서 다룬 문제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내, 회사가 그 자체의 구조로 돌아가게 하는 것.
체계라는 말이 딱딱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국은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같은 질문에 매번 답하지 않아도 되고, 한 사람이 없다고 회사가 멈추지 않고, 새로 온 사람이 헤매지 않는 것. 그런 회사에서 사람이 덜 지칩니다.
완벽한 체계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고쳐갈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 그거면 충분합니다.
. . .
긴 시리즈를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