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벤처투자 글로벌본부장 이진수 상무
前 SK홀딩스 디지털, 바이오 투자센터
前 SK SUPEX위원회
前 한화자산운용 VC, 한화투자증권 Multi-strategy운용, IPO
한때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렸던 일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부와 대기업, 스타트업, 글로벌 투자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AI와 로보틱스, 제조업이 결합하는 Physical AI 분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지고 있다.
IPO, 자산운용, 대기업 투자조직, 글로벌 벤처투자를 거치며 자본시장의 다양한 현장을 경험한 이진수 상무는 최근 몇 년간 일본 스타트업과 투자 생태계를 깊이 연구해왔다.
이번 대화는 일본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가진 강점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AI 시대의 새로운 기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들어보았다.
공백지대에서 찾은 기회
Q. 일반적으로 혁신을 이야기하면 미국이나 중국을 떠올리곤 합니다. 일본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미국과 중국의 AI를 비롯한 기술 혁신의 속도, 투자가 이루어지는 자본의 스케일은 솔직히 비교 자체가 어렵습니다. 전 세계 벤처투자 자금의 70%가 미국에 몰리고 있습니다. 투자의 양극화는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술의 혁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과 중국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본 특유의 제조업과 모노즈쿠리(장인정신)의 저력, 과거 디지털 전환에서 놓친 기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 기업들이 쌓아온 막대한 유보금과 주식시장의 활황. 이 모든 것이 맞물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장에서 직접 느낀 분위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한국의 5~6년 전 스타트업 컨퍼런스를 기억하시나요? 그때 느껴지던 열정과 열기, 반짝이는 눈빛의 창업자들과 같이 지금 도쿄의 컨퍼런스에서 정확히 그 온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숫자나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 에너지였고, 저는 그 에너지가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제조업과 기초과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아날로그 자산을 가진 국가입니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라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하드웨어 자산과 AI·로봇 기술이 결합하는 Physical AI의 거대한 실험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미국이나 중국은 많은 자본과 시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아직 제대로 해석되지 않은 공백지대였고, 저는 바로 그 공백에서 기회를 봤습니다.
느린 일본이라는 오래된 오해
Q. 일본 벤처·투자 생태계를 직접 경험하고 연구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시각은 무엇이었나요?
스타트업 시장을 접근하는 방법론은 다양합니다. 초기 창업자들과 교류하며 바텀업(Bottom-up)으로 이해하는 방법도 있고, 거시적으로 탑다운(Top-down)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일본 IPO 시장부터 시작했습니다. 매년 신규 상장되는 60~90여 개 기업들을 공부하고, 그 기업에 투자한 주요 VC들을 직접 만나고, 성공한 모델에서 프레임을 잡아나갔습니다. 동시에 매주 새로운 초기 창업자 서너 팀씩을 꾸준히 만났습니다. 그렇게 쌓인 메모와 지식들이 이 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축적의 시간이 발산으로 표현된 책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깨진 고정관념은 '일본은 느리고 보수적이다'라는 인식이었습니다. 깊숙이 들여다본 일본은 달랐습니다. 조용하지만 가장 단단하게 기초 체력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디지털 전환을 넘어 물리적 공간의 자동화를 이끄는 딥테크 영역에서 실질적인 매출과 상용화 가능성을 빠르게 증명해내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가장 놀라웠던 건 생태계의 개방성이었습니다. 창업자와 스타트업 생태계의 인력·자본 측면에서 글로벌 개방성은 이미 한국을 앞서고 있다고 봅니다.
저희가 투자 검토 중인 회사만 해도 엔지니어의 70%가 유럽, 인도 등에서 온 외국인입니다. 취업비자 같은 제도가 뒷받침한 것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일본의 Top 10 벤처캐피탈 중 외국인이 창업했거나 대표 파트너로 있는 하우스들도 있습니다. 이는 한국 VC업계에서는 오히려 찾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일본인과 외국인이 공동 창업팀을 이루어 성공적으로 일본에서 펀드레이징하는 스타트업 사례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장인정신이 디지털을 만났을 때
Q. 자본·인재·속도 면에서 미국, 중국에 비해 불리한 환경임에도 경쟁력을 만들어낸 일본 기업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노즈쿠리의 디지털화'와 '철저한 문제 해결 중심의 접근'입니다.
경쟁력 있는 일본 스타트업들은 화려한 플랫폼 비즈니스로 시장을 독점하려 하기보다, 기존 전통 산업이 가진 고질적인 비효율이나 숙련공 부족 문제를 정밀하게 해결하는 데 집중합니다. 세 가지 패턴이 반복적으로 보였습니다.
첫째, 문제의 깊이입니다. 큰 시장보다 아무도 제대로 풀지 않은 문제를 먼저 골랐고, 덕분에 자본이 풍부한 경쟁자들이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고객과의 거리입니다. 초기 고객과의 관계를 단순한 매출 계약이 아닌 공동개발 파트너십으로 가져갑니다. 대기업과의 PoC(개념 검증)가 단순한 레퍼런스를 넘어 제품 자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됩니다.
셋째, 창업자의 전문성 밀도입니다. 일본의 딥테크 창업자 중 상당수는 10년 이상 한 분야만 파온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지표보다 실질적인 유닛 이코노믹스를 증명해내는 단단함이 불리한 환경을 극복한 핵심 비결이었습니다.
글로벌 자본은 왜 일본을 향하는가
Q. 현재 일본 투자 생태계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나요? 특히 주목하시는 트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현재 일본 생태계는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대기업 CVC 자금과 글로벌 투자자들의 자본이 맞물리며 대형화, 글로벌화되는 변곡점에 있습니다. 그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상징적인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a16z의 창업자 벤 호로위츠가 도쿄에 와서 다카이치 총리를 직접 만나고 올해 도쿄 오피스 개설을 구체화했습니다. 미국 외 지역에 설립되는 첫 해외 거점입니다. 일본의 AI와 디펜스 분야 투자를 시작한다는 선언도 했습니다.
또한 안드로이드 OS의 창시자이자 구글 로봇사업을 총괄했던 앤디 루빈도 도쿄에서 겐키 로보틱스(Genki Robotics)라는 피지컬 AI 기업을 창업했습니다. 글로벌 탑티어 플레이어들이 일본을 진지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명확한 신호들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일본에서의 트렌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이전틱 AI와 물리적 로보틱스의 결합, 즉 Physical AI의 ‘상용화’입니다.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서 자율형 로봇과 제조·물류 현장을 혁신하는 스타트업들이 단순 시연용 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ROI와 수익모델을 검증하는 시장을 주도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IPO 외 엑싯 경로의 다양화입니다. 전통 대기업의 자산을 스타트업이 인수하거나 협력하는 세컨더리 및 크로스보더 M&A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글로벌PE들이 일본 시장에 앞다투어 진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본, 피지컬 AI의 실험실
Q. 책을 통해 제조, 바이오, 소재와 같은 기존 산업이 AI를 통해 새롭게 재편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AI가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낼 산업은 어디이며, 그 변화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현재 생성형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애플리케이션 시장의 주도권 경쟁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제조 공정의 미세한 노하우, 신약 개발 데이터, 신소재 레시피 같은 영역은 실체적인 데이터 없이는 AI 학습이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Physical AI의 본질은 텍스트가 아닌 실제 물리적 '행동 데이터'에 있습니다. 이미 중국은 정부 주도로 물리적 데이터를 국가적 생산 요소로 지정하고, 전국 수십 개의 데이터 공장에서 피지컬 AI 데이터를 생산하며 로봇 생태계를 무서운 속도로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기회가 있습니다. 양국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자산 위에 AI라는 두뇌가 더해진다면, 그 시너지는 글로벌 시장을 압도할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산업 현장의 피지컬 AI는 단순한 효율화를 넘어 생산성 자체를 수십 배 끌어올리는 '진짜 혁신'을 주도합니다. 이는 글로벌 빅테크의 공세 속에서도 아시아 기업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최근 글로벌 투자사들이 일본 딥테크와 로봇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이 읽어야 할 플레이북
Q. 일본 투자 생태계를 깊이 연구한 경험이 앞으로의 투자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한국 스타트업들에게 단순한 국내 시장 안에서의 경쟁이 아닌, 일본 시장을 교두보로 한 글로벌 GTM(Go-to-market) 전략을 구체적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한국의 빠른 실행력과 일본의 깊은 기술력이 결합될 때 나올 수 있는 것들이 눈에 그려집니다.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진행된 일본의 고령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태동하는 로보틱스, 헬스케어 기업들의 미래 가치를 훨씬 더 정밀하고 선제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선구안도 조금씩 갖추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몇 가지 플레이북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 플레이북을 읽을 수 있다면, 투자 판단에서 남들보다 몇 년 앞선 시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일본 자체보다도 일본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었다.
우리는 혁신을 이야기할 때 종종 실리콘밸리와 최신 기술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나 AI가 새로운 산업 질서를 만들어가는 지금, 다시 중요해지는 것은 의외로 오랜 시간 축적된 제조 역량과 산업 현장의 경험, 그리고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지식 자산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일본에서 발견한 기회는 단순히 일본 시장의 가능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이 이미 가진 강점을 어떻게 다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까웠다.
AI 시대는 새로운 기술의 경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국가와 기업이 자신만의 축적된 자산을 다시 발견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