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업을 한 이후로, 과거 급여를 받는 경영자일 때와 비교하여 큰 차이점이 있다면 독서량이 급증했다는 점입니다.
이전 스타트업에서 한국 지사의 대표이사로 있을 때는 미국 본사의 전략적 방향이나 의사결정이 우선시 되다 보니 전략적 선택의 폭이 제한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반면 본사가 든든히 백업을 해주는 상황이었던지라 전략 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자원을 조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했습니다.
창업을 하고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제가 리포트를 할 대상이 없는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하나하나 선택의 무게가 매우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배 창업가들의 경험을 담은 책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가슴에 확 와 닿았습니다. 노션에 하나씩 정리를 하면서 읽다 보니 올해 초부터 약 30권 가량 책을 읽었더라고요.
책 리스트 중에는 창업자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인 피터 틸의 제로투원, 벤 호로위츠의 하드씽, 리드 호프먼의 블릿츠 스케일링, 레이 달리오의 원칙, 앤드류 그로브의 하이아웃풋 매니지먼트 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을 한 권만 고르라면 알베르토 사보이아의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창업 이후 현재까지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책으로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을 꼽은 이유에 대하여 사례 기반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될 놈'을 찾는 여정
사실 저는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이라는 책의 제목이 책의 정수를 잘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일반 독자를 고려하여 제목을 정한 점도 이해하지만,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죠. “The Right It”이라는 원제의 뉘앙스를 고려하면 본문 속에서 언급한 “될 놈 찾기”가 창업가 입장에서는 좀 더 와 닿는 제목인 것 같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될 만한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의 경우 이미 수년간 검증을 통해 잘 작동하는 사업 모델을 보유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임직원 입장에서는 사업 모델과 관련된 업무를 “탁월하게 실행하는 것”이 사업 성과를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아직 추구하고자 하는 사업 모델이 “될 놈”인지, “안 될 놈”인지 알기 어려운 채로 사업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탁월하게 실행했다고 하더라도 해당 아이디어가 “안 될 놈”이었다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제품은 아무리 유능하게 실행해도 시장에서 실패한다.
투자자나 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사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하고 이중에 몇몇 만 성공을 하더라도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산업의 혁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창업자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낮은 확률을 뚫고 성공하는 사업 모델을 찾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스타트업이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해서 성공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애초에 “될 놈”이었는지 아닌지를 빠르게 검증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리토타이핑을 통한 ‘될 놈’ 찾기
저자는 이를 빠르게 검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프리토타이핑(Pretotyping)” 기법을 제안합니다.
제품을 런칭하기 전 시제품(프로토타입, Prototype)을 제작하고 이에 대한 초기 시장 반응을 보고 제품 런칭을 결정하는 단계는 기존에도 존재해 왔습니다. 프리토타이핑은 프로토타이핑보다도 전 단계로서 시장에서 우리 제품에 대한 반응이 어떨지에 대한 핵심 가설을 최소한의 자원을 들여(심지어 시제품도 만들지 않고) 검증하는 기법입니다.
프리토타이핑의 “Pre”는 “Pretend(~인체 하다)”에서 따온 용어인 만큼 제품을 만들지 않고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핵심이죠. 책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예시는 무려 30년 전에 IBM에서 음성인식기술에 대한 개발 여부를 테스트한 프리토타이핑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키보드 타이핑에 대한 숙련도가 높지 않아서 음성으로 텍스트 입력을 할 수 있다면 업무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겠냐는 가설을 검증하려 했죠. 물론 당시에는 음성인식 기술을 구현하는 것이 매우 난이도가 높은 상황이었기에 시제품을 만들어서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음성인식 기술인 척(Pretend)하고 사용자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방의 한쪽 편에서 사용자가 마이크로 이야기를 하면 반대 쪽 방에 숨어 있는 타이핑 하는 사람이 내용을 입력하고 사용자가 보는 화면에 출력을 해주는 방식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간단한 세팅만으로 사용자 입장에서는 음성 인식기술을 체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음성 기반 텍스트 입력을 하다 보니 사용자 입장에서 피로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같이 일하는 직원 간 정보가 다 공유돼서 사생활 보호 및 정보 보안 측면에서 취약점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결론적으로 해당 아이디어에 대한 개발을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죠. IBM 입장에서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아이디어를 시제품 단계까지 만들지 않고도 시장에서의 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큰 기회비용을 아끼게 된 것이죠.
이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더욱 큰 임팩트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족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여 겨우겨우 시제품을 출시했는데 시장에서의 반응이 부정적이라면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요.
특히, 요즘 같이 모바일 비즈니스가 대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프리토타이핑을 통한 테스트가 더욱 쉬워진 상황입니다. 최근 인디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은 게임을 만들기 전 게임 플레이 화면을 영상으로 먼저 구현해 소셜미디어에서 광고를 돌린 후 예약 구매 추이를 판단한 후에 게임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XYZ 가설 적용하기
프리토타입을 통해 검증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비용-효과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해당 가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정의 됐는지 여부가 매우 중요합니다.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을 ‘시장 호응 가설’이라고 부르며, 시장이 우리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핵심 신념이나 가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프리토타입을 적절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XYZ 가설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XYZ 가설이란, 시장 호응 가설을 ‘적어도 X%의 Y는 Z할 것이다’라는 형태로 표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호한 가설을 구체적인 수치로서 표현하는 것이 프리토타입을 구성하고 검증하고자 하는 아이디어가 ‘될 놈’인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예시로 “심하게 오염된 도시에 살고 있는 일부는 대기오염을 모니터링해서 피할 수 있게 도와줄 합리적인 가격의 장치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는 시장 호응 가설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를 XYZ 가설 형태로 구체화 해보면 “대기 질 지수가 100 이상인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적어도 10%는 120달러짜리 휴대용 오염 탐지기를 구매할 것이다.”와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기존 시장 호응 가설 대비 훨씬 수치로서 더 명확하게 표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물론 이 수치가 적절한 수치인지 아닌지 처음부터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설 검증 과정을 통해 점차 다듬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XYZ(대문자) 가설은 범위가 지나치게 넓을 경우 세분화 된 xyz(소문자) 가설들로 좁혀 테스트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앞선 예시를 좀 더 세분화된 xyz 가설로 쪼개본다면 “XX시 XX구에 거주하는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120달러 짜리 휴대용 오염 탐지기 사전 예약 문자를 보낼 경우 100명의 시민이 예약을 진행할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가설을 세분화할 수 있습니다.
프리토타이핑 적용 사례 : 스타트업 양호실
저희 가지랩에서도 모든 멤버들과 함께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을 읽고 난 후 프리토타이핑을 적극적으로 도입해보고 있습니다. 저희가 경험한 프리토타이핑 사례 중 하나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저희 가지랩은 “개인의 다양한 맥락이나 상황을 고려해 최적의 웰니스 제품이나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중 하나가 “비용 지불 주체”였습니다. 웰니스 제품이나 콘텐츠를 개인 맞춤형으로 추천해주더라도 소비자 입장에서 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높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였죠.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장호응가설로서 “스타트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건강 문제를 상담해주거나 비대면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양호실’ 서비스를 제공하면 임직원 복지 차원에서 스타트업이 이를 도입할 것이다”라는 시장 호응 가설을 세웠습니다.
다음 단계로 시장 호응 가설을 “적어도 10%의 스타트업은 임직원 1인당 월 구독료 X원의 스타트업 양호실 유료서비스를 도입할 것이다” 형태의 XYZ 가설로 구체화 해봤습니다. 첫 번째 가설 검증을 위해 범위를 xyz 가설 형태로 축소하여 “강남구에 위치한 스타트업 10곳의 적어도 1곳은 임직원 1인당 월 구독료 X원의 스타트업 양호실 유료 서비스를 도입할 것이다”로 구성했습니다.
가설 검증을 위해 스타트업이 많이 쓰는 ‘슬랙'의 'Connect’ 기능을 활용하여 별도의 추가 비용이나 제품 개발 없이 고객사와 채널을 개설하고 해당 채널에서 건강 상담 또는 비대면 진료를 제공하는 프리토타입을 구성했습니다.
자체 비대면 진료 솔루션 등을 개발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의사 면허를 보유한 제가 유선상으로 비대면 진료를 제공해 기술 구현에 필요한 자원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건강 상담 쪽도 자동화 된 설문이나 챗봇 기술을 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채널이나 DM을 통해 들어오는 질문에 대하여 사내 의학, 영양, 운동 전문가가 답변을 텍스트로 제공하는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2주 이내로 제품 개발 없이 빠른 시간 내에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프리토타입 세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달 가량 베타 테스트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운영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 스타트업 양호실 채널 개시 초기에 대부분의 질문들이 몰리고 2주 후 활성도가 눈에 띄게 떨어짐
2) 웰니스 문제를 보유하거나 관심이 높은 일부 임직원으로 활성 사용이 집중 됨
3) 가장 높은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 된 비대면 진료 기능의 활용 사례가 0건으로 집계
4) 일반 임직원 대비 C-level의 서비스 활용도가 높았고, 상당수 대면 진료로 연계됨
5) 스타트업 투자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스타트업 입장에서 비용 지불 의사가 매우 떨어짐
결론적으로 ‘스타트업 양호실’ 서비스가 저희가 기대했던 것만큼 ‘비용 지불 의사'라는 측면에서 효용을 입증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한 기술 개발이나 시제품 출시 없이도 “안 될 놈”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회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었죠.
단, 해당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높아 건강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스타트업 C-level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인사이트를 얻게 됐습니다. 따라서 이 다음 xyz 가설로서 “스타트업의 경영진 개인을 대상으로 특화된 스타트업 양호실 서비스를 런칭하여 100명에게 홍보 경우 10명에게 X원의 유료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를 설정하고 실험해 볼 예정입니다.

스타트업 혹한기에 적합한 도구
요즘과 같이 스타트업 투자가 어려운 혹한기에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에서 제안하는 프리토타이핑 기법은 매우 유용한 전략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희와 같은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될 놈’ 아이디어를 발굴해내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더욱 제한되는 시기이기에 프리토타이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비용 효과적인 아이디어 검증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중후기 스타트업이라고 하더라도 현금 흐름 창출을 위한 신사업 개발 또는 신규 기능 런칭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초기 스타트업 대비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월 번(burn)이 더 크기에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가설을 검증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시로 제시한, 개발 공수 없는 기법 뿐 아니라 기존에 트래픽이 발생하고 있는 플랫폼 내에 최소한의 개발로 구현할 수 있는 프리토타입 제작을 통한 가설 검증 방식 또한 매우 유용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그로스 마케팅(퍼포먼스 마케팅)이나 애자일 제품 개발에 익숙했던 상황이라서 창업 이후 가설 검증에 대하여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기존 회사에서 는 1에서 10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의 가설 검증이 익숙했던 상황었다 보니 창업 이후 0에서 1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가설 검증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특히, 급격히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서 창업 초 계획했던 자금 흐름이나 인재 채용 속도가 달라진 만큼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을 통해 가설 검증에 대한 방법을 재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시기가 어려운 만큼 더 절실하게 치열하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께서도 프리토타이핑을 통해 가성비 있는 성장을 잘 이끌어내시길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아이디에이션을 반복하면서, 시장에서 통할지?에대한 고민을 많이하고있는 제게
너무 도움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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