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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스케일 : 사람이 설계하는 시대에서, 사람이 승인하는 시대로

AI가 코드를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보고서까지 대신 작성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수조 원짜리 공장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들은 여전히 수백 장의 문서를 하나씩 열어보고 필요한 값을 찾아 엑셀에 옮겨 적습니다.

스냅스케일을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플랜트 산업에는 이미 AutoCAD나 Aspen HYSYS처럼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전문 소프트웨어가 있는데, 왜 아직도 사람의 손이 이렇게 많이 필요할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출처: Piping and instrumentation diagram - Wikipedia)

이유는 플랜트 설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도면 중 하나인 P&ID(Piping & Instrumentation Diagram·배관계장도)에는 펌프와 탱크, 배관, 밸브, 계측기와 안전장치 등 공장이 작동하기 위한 수많은 관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배관 하나가 바뀌면 압력이 달라지고, 펌프나 밸브가 바뀌면서 다른 부서의 설계까지 연쇄적으로 수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공정, 배관, 기계, 전기, 안전 등 각 부서는 서로 다른 문서와 프로그램을 사용합니다. 한쪽에서 설계가 변경되면 다른 문서에도 제대로 반영됐는지 사람이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실제 현장에서는 이런 변경과 검토를 위해 수많은 메일이 오가고, 설계 오류가 뒤늦게 발견되면 재작업과 일정 지연으로 이어집니다.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엔지니어들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지만, 그중 적지 않은 시간이 새로운 설계보다 정보를 찾고 옮기고 서로 맞는지 확인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엔지니어를 위한 Cursor

스냅스케일은 이 과정을 AI로 자동화하려는 팀입니다. 김상윤 대표가 제품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엔지니어를 위한 Cursor'입니다. Cursor에 원하는 내용을 자연어로 입력하면 AI가 코드를 수정하듯, 스냅스케일의 AutoFlow는 엔지니어의 요청을 이해하고 관련 도면과 문서를 찾아 수정하거나 검증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부서에서 "이 밸브를 바꿔달라"는 수정 요청이 오면 지금은 엔지니어가 관련 도면과 스펙을 찾아 하나씩 변경합니다. AutoFlow에서는 수정 내용을 입력하면 AI가 영향을 받는 정보를 찾아 설계를 수정하고, 왜 그렇게 수정했는지 근거까지 보여줍니다.

(실제 제품 화면)

파이프 명세서인 Line List 작성도 자동화 대상입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천 개가 넘는 배관 정보를 여러 문서에서 찾아 엑셀에 입력해야 하는데, 하나하나 어려운 판단이라기보다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실수도 발생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요즘 많이 나오는 버티컬 AI 회사 중 하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더 흥미롭게 본 건 'AI를 얼마나 똑똑하게 만들 것인가'보다 'AI가 틀렸을 때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플랜트에서는 열 번 중 아홉 번 맞는 AI를 쓰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장비와 배관 중 하나가 잘못 연결되어도 공사비나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고, AI의 결과를 엔지니어가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면 굳이 사용할 이유도 줄어듭니다.

(스냅스케일 온톨로지)

그래서 스냅스케일은 장비와 배관, 이들 사이의 관계를 '온톨로지'로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장비들이 연결될 수 있는지, 산업 표준상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기계가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AI가 도면을 잘못 읽으면 이 규칙을 이용해 오류를 찾고 다시 인식합니다. 코딩 에이전트가 코드를 작성한 뒤 컴파일러가 오류를 잡아 다시 수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P&ID도 모르던 컴퓨터공학과 학생

그런데 처음부터 김상윤 대표가 이 산업을 잘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포스텍 컴퓨터공학과 학생이었던 김 대표는 플랜트 업계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었고,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P&ID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관련 산업 전문가를 한두 명 만나 시장을 공부하고 제품부터 만들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대표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김상윤 대표의 인터뷰 과정)

김 대표는 지난 1년 반 동안 대기업 EPC부터 중견·중소 엔지니어링사, 발주처, 장비 업체까지 80명이 넘는 현업 엔지니어를 찾아갔습니다. 소개받을 사람이 없으면 직접 콜드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고,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카카오톡 커뮤니티를 만들고 계속 질문했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이 왜 이 업무를 힘들어하는지 직접 경험해보겠다며 파이프 1,000개가 넘는 Line List를 손으로 작성했습니다. 여러 PDF를 열어 필요한 값을 찾고 다시 엑셀에 입력하는 일을 실제로 해본 것입니다.

투자 검토 과정에서 만난 현업 엔지니어들의 평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대기업 EPC의 시니어 엔지니어는 "기술만 가진 업체는 많지만 도메인을 이해하고 녹이려는 업체는 많지 않다"고 했고, 30년 경력의 다른 엔지니어 역시 외부에서 온 팀이 이 정도까지 플랜트 설계 업무를 이해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중요했던 건 80명을 만났다는 숫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현장의 암묵지가 실제 제품의 온톨로지가 되었고, 인터뷰했던 전문가들은 다시 제품을 검증하는 네트워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실제 유상 프로젝트와 계약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김 대표는 대학 시절에도 1년을 휴학하고 혼자 게임을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었다가 거의 팔리지 않았고, 이후에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게임과 플랜트는 전혀 다른 산업이지만, 모르는 문제를 파고들고 사용자를 만나면서 다시 만드는 방식은 꽤 비슷해 보였습니다.

 

왜 하필 플랜트인가

김 대표에게 왜 하필 플랜트냐고도 여러 번 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출발점은 의외로 기후위기였습니다.

좋은 기후 기술이 계속 나오지만 실제 산업에 보급되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립니다. 기술 자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제성이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게 김 대표의 생각입니다.

새로운 에너지 기술의 가격을 낮추려면 더 많은 설비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장 한 번을 설계하고 짓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듭니다. 플랜트 엔지니어링의 생산성을 높이면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설비를 만들 수 있고, 새로운 기술의 상용화 속도 역시 빨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복잡한 엔지니어링 영역 중 하나인 화공 플랜트에서 시작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원자력이나 수소,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처럼 복잡한 엔지니어링이 필요한 다른 영역까지 가고 싶어 합니다. 김 대표는 이를 '문명의 발전을 가속하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처음 들으면 조금 거창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P&ID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80명이 넘는 엔지니어를 찾아가고, 파이프 1,000개의 명세서를 직접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제품에 넣었고, 이제는 실제 고객들이 돈을 내고 함께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김상윤 대표에게 '문명을 가속한다'는 이야기와 '엑셀에 파이프 1,000개를 직접 입력한다'는 일은 꽤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좋았습니다.

 

사람이 설계하는 시대에서, 사람이 승인하는 시대로

현재 스냅스케일은 AutoCAD나 HYSYS 같은 기존 소프트웨어 위에서 작동하는 AI 레이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프로그램과 업무 방식에는 강한 관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기존 작업 환경 안으로 들어가 사람이 반복하던 일을 하나씩 자동화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처음 투자 검토를 시작했을 때 한 가지 고민은 있었습니다. 기존 설계 소프트웨어 위에 붙는 보조 제품만으로 충분히 큰 회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김 대표와도 이 부분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스냅스케일이 장기적으로 만들고 싶은 건 기존 프로그램에 AI 채팅창 하나를 추가하는 제품이 아닙니다. AI가 설계를 주도하기 시작하면 엔지니어가 일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형태 자체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스냅스케일 김상윤 대표)

지금은 사람이 여러 설계 프로그램을 직접 조작하고 AI가 일부 작업을 돕습니다. 하지만 자동화되는 영역이 넓어진다면 AI가 먼저 설계하고 검증한 뒤, 엔지니어는 결과와 근거를 확인하고 최종 판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역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스냅스케일은 기존 소프트웨어 사이에 빠져 있는 부분부터 하나씩 연결하면서 공정과 배관, 장비, 산업 규정과 설계 변경의 히스토리를 온톨로지에 쌓고 있습니다. 이 영역이 충분히 넓어진다면 언젠가는 기존 소프트웨어를 보조하는 제품이 아니라 AI를 중심으로 설계 업무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시작 단계입니다. 실제 프로젝트에서 정확도를 증명해야 하고, 수십 년 동안 굳어진 엔지니어들의 업무 방식을 바꾸는 일도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AI가 가장 큰 변화를 만드는 곳이 꼭 인터넷 산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복잡해서 수십 년 동안 사람이 직접 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일수록 AI가 바꿀 수 있는 영역도 클 수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발자가 코드를 한 줄씩 직접 작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모습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플랜트 엔지니어가 수천 개의 값을 엑셀에 직접 입력하고 수백 장의 도면을 하나씩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스냅스케일이 그 변화를 만드는 회사가 될 수 있을지 기대하며, 베이스벤처스도 이번 여정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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