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공부 떠먹여드립니다.에 발행 되었던 글입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공부 떠먹어드려요.
안녕하세요.
낮에는 파사드 엔지니어로, 밤에는 커피를 볶는 다록입니다.
오늘은 조금 엉뚱하지만 흥미로운 질문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과연 어떤 커피를 마셨을까?"
커피를 좋아하거나 직접 볶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예멘 모카 마타리(Yemen Mocha Mattari)**입니다.
국내 커피 시장에서는 이 원두에 항상 매력적인 수식어가 따라붙곤 합니다.
"예멘 모카 마타리는 고흐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커피다."
정말 그랬을까요? 호기심이 발동해 고흐의 삶과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를 직접 뒤적여보았습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마케팅 문구보다 훨씬 생생하고 뭉클한 진짜 고흐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27살에 붓을 든 늦깎이 화가
우리가 기억하는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이나 〈해바라기〉를 남긴 위대한 거장이지만, 그의 시작은 사뭇 달랐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깊은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그는 미술상 직원, 교사를 거쳐 가난한 탄광촌의 전도사로 일했습니다. 너무나 철저하게 가난한 광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탓에 오히려 교단에서 쫓겨났고, 극심한 방황 끝에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초기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1885)처럼 어둡고 묵직했던 그의 시선은, 1886년 파리를 거쳐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에 정착하며 우리가 아는 강렬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빛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를의 시절, 그의 일상 한가운데에 **'커피'**가 있었습니다.
편지 속에 남은 고흐와 커피의 진짜 일상
고흐가 커피를 마셨다는 것은 낭만적인 추측이 아닙니다. 동생 테오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야외 스케치 필수품 (1882년 헤이그) 모래언덕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그는 빵과 작은 커피 봉지를 챙겨 가 현장에서 뜨거운 물을 구해 마셨습니다.
- 살림 밑천과 커피 도구 (1888년 5월 아를) '노란 집'을 작업실로 꾸미던 당시, 집에서 커피와 수프를 끓여 먹을 도구를 사느라 전 재산이 단 15프랑밖에 남지 않았다고 테오에게 털어놓습니다.
- 끼니 대신 외상 커피 (1888년 10월 아를) 고갱과 함께 지내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을 때는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한 채 빵과 외상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고흐에게 커피는 카페 테라스에서 우아하게 음미하는 기호품이 아니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창작의 열기 속에서 하루를 버텨내게 해주는 가장 현실적인 연료였습니다.
"나는 그럴 때 많은 양의 나쁜 커피를 마신다"
1888년 6월, 고흐가 여동생 빌레미엔에게 보낸 편지에는 특히 인상적인 구절이 등장합니다.
우울감이 엄습할 때 어떻게 견디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그런 때 많은 양의 **나쁜 커피(bad coffee)*를 마신다."
치아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씁쓸한 한 잔이 주는 활력에 기대어 붓을 쥐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지는 원두의 산미, 섬세한 컵노트, 최고급 스페셜티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커피의 '품질'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힘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모카 마타리'였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흐가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셨다는 역사적 기록이나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시 19세기 후반 유럽에 예멘산 모카 원두가 유통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고흐의 방대한 편지 어디에도 특정 산지나 품종을 콕 집어 언급한 대목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끼니를 걱정하며 '나쁜 커피'와 외상 커피로 버티던 그가, 예멘 바니 마타르 고산지대에서 생산된 최고급 원두만을 고집해 찾아 마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아마도 '커피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고흐'라는 사실과 '유서 깊은 명품 원두 예멘 모카'의 이미지가 후대에 전해지며 자연스럽게 덧씌워진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일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들
팩트를 확인하고 났을 때 실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전설 속의 고급 원두를 우아하게 마시는 거장의 모습보다, 낡은 주전자에 싸구려 원두를 끓여 마시며 밤하늘의 색채를 고민하던 진짜 고흐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무심코 마시는 한 잔의 커피도 130여 년 전 고흐의 커피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기분 좋은 향미를 즐기기 위해, 때로는 고단한 하루를 묵묵히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잔을 채웁니다.
다음에 예멘 모카 마타리를 마시게 된다면, 정답을 찾기보다 가벼운 상상을 더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고흐도 이 짙은 초콜릿 향 같은 커피를 한 번쯤은 맛보았을까?"
그 답을 영원히 알 수 없기에, 커피 한 잔에 담긴 여운은 더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