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가에게 건네는 조언은 대개 짧습니다.
- 고객과 이야기할 것
- 하나에 집중할 것
- 계속 성장할 것
그러나 회사가 가장 다급한 순간, 그 문장대로 움직이는 일은 조금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12년 전 미미박스는 매출 40억 원을 올렸지만 회사에 남은 돈은 3,000만 원뿐이었습니다. 하형석 대표는 “실리콘밸리를 가보고 죽자”며 미국행을 택했습니다. 한국 최초로 와이콤비네이터(YC)에 합격했고, 6개월 뒤 120억 원을 투자받았습니다. 성공담은 간단해보이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번 이오서재에는 서로 다른 시기에 YC를 경험한 한국인 창업가 세 명이 모였습니다. YC는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한 뒤 3개월 동안 제품과 성장에 집중하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참석자는 미미박스의 하형석 대표, 쿼리파이로 2020년 YC를 거친 아웃썸의 피터 신 대표, 여섯 번 떨어진 뒤 일곱 번째 지원에서 합격한 어사이드의 이상훈 CTO입니다.
[아티클 내비게이션]
- "아마존과 어떻게 경쟁할 겁니까?"
- 여섯 번 떨어지고, 일곱 번째에 붙었다
- "고객이랑 마지막으로 얘기한 게 언제야?"
- 샘 올트먼의 ‘체크’, 실리콘밸리의 서늘함
- “만들기 전에 팔아라”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 그래서, 오늘 일은 재밌었나요
- 고장 난 라디오와 각자의 휴가
- 그래서 지금도 미국으로 가야 할까
“아마존과 어떻게 경쟁할 겁니까?”
하형석 대표의 미미박스는 현재 약 200명 규모로 K뷰티 제품을 30개국에 수출하고, 매출의 60~70%를 미국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하형석 대표가 YC에 지원한 것은 회사가 가장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Q. YC는 어떤 곳이었고, 어떻게 합격하셨나요?
하형석 와이콤비네이터는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고요. 그 당시엔 액셀러레이터라는 개념조차 없었어요. 스타트업도 ‘벤처’ 뭐 이런 거였으니까. 저희는 회사가 제일 어려웠을 때 미국 진출을 했습니다.
제가 800만 원으로 시작해 2년 차 매출 40억 원까지는 외부 투자 없이 부트스트랩(자기 돈과 매출만으로 회사를 키우는 방식)을 했어요. 근데 매출은 40억인데 남은 돈이 3,000만 원밖에 안 되니까, 미국을 가보자. 실리콘밸리를 가보고 죽자. 모두의 로망이니까요.
저희도 투자를 받고 싶었지만 문전박대였어요. 뷰티 스타트업?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죠, 한국 VC분들 사이에서. 그래서 YC를 지원했는데, 케빈 헤일이라는 파트너를 알고 있었고 그 파트너가 저희를 적극 추천해주면서 정말 우연한 계기로 됐어요. 1월에 들어가고 6개월쯤 뒤 시리즈 A(본격 성장 단계의 첫 대규모 투자)로 120억 원을 받으면서, 3,000만 원밖에 없던 회사에 다시 성장할 자금이 생겼죠.
Q. YC 면접장에서 첫 질문이 뭐였나요?
하형석 면접장에 들어갔는데 폴 그레이엄 앉아 있고, 샘 올트먼 앉아 있고, 지메일 만든 폴 부크하이트(Paul Buchheit) 앉아 있고, MIT 교수님 앉아 있고. 열 분 정도 쫙 앉아 계셨어요. 저희 프로덕트가 이커머스였는데 첫 질문이 “아마존과 어떻게 경쟁할 거냐”였습니다. 꽤나 한국인 창업자 스타일로 예상 질문을 뽑아 갔는데도 그 질문은 없었던 터라 횡설수설했는데, 뭐, 잘돼서 들어갔죠.
그때만 해도 면접을 보고 나면 저녁에 폴 그레이엄이 직접 전화를 줘요.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모르는 번호가 딱 떠서 받으면, “나 폴 그레이엄인데. 나 이거 얼마 투자할 거고, 몇 퍼센트야.”
합격한 뒤에는 미국용 제품과 법인 전환을 동시에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웹사이트조차 없었습니다.
하형석 당시 CTO분이 웹사이트 타임라인을 2주로 잡고 있었어요. 근데 담당 파트너와의 정기 면담인 오피스아워 때 폴 부크하이트가 “야, CTO 어딨어?” 그러더니 “3일 만에 만들어” 이러더라고요. 보통 CTO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다 안 된다고 하시는데, 폴 부크하이트가 얘기하니까 3일 만에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3개월 중 첫 2개월은 엄청나게 노력했는데도 회사가 성장을 안 했어요. 마지막 달에 전월 대비 66% 성장하면서 그 기수에서 성장률이 제일 빨랐던 것 같아요. 데모데이(투자자 앞에서 성과를 발표하는 졸업 무대) 때 50개 이상의 VC가 연락을 줬죠.
여섯 번 떨어지고, 일곱 번째에 붙다
하형석 대표는 첫 지원에 합격했습니다. 반면 이상훈 CTO에게 같은 소식이 온 것은 일곱 번째 지원에서였습니다.
Q. 어사이드로 합격하기까지, 일곱 번이나 지원하셨습니다. 집념인가요, 광기인가요?
이상훈 창업할 때부터 이제는 우리 손으로 0에서 1을 만들면서 미국 시장에 도전해보자는 기조가 깔려 있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지원에서 떨어질 때는 ‘그래, 한 번에 붙을 수 없지. 아직 제품도 유저도 없으니까 쟤네가 떨어뜨릴 명분이 충분하다’ 하고 그러려니 했어요. 근데 떨어지는 게 반복되니까 내적으로 화가 나는 거예요(!) 진짜 우리가 부족한 건가부터 시작해서, 점점 광기와 집착으로 바뀐 것 같아요.
YC가 좋았던 건, 면접까지 가서 떨어지면 그래도 이유를 알려줄 때가 있거든요. 여섯 번째는 AI 회의록 도구 ‘캐럿’으로 지원했는데, “너네 제품 다 좋다. 근데 95%가 한국 유저네. 미국 와서 뭘 어떻게 할 거야? 네트워크는 있어?” 이런 식으로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일곱 번째에 어사이드로 지원할 땐 미국 퍼스트로, 한국 느낌을 전혀 내지 않고 돈이 되는 걸로 진짜 한번 해보자 했죠.
Q. 세 팀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보세요?
피터 신 저희 세 팀 다 한국에서는 좀 외면받았다가 오히려 YC에서 인정받은 케이스인 것 같아요. 쿼리파이도 한국에서 투자 라운드를 제대로 클로징하지 못한 상태에서 YC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 한 번에 됐거든요. 대표가 카카오 출신 개발자고 저는 사업 개발을 글로벌하게 해왔으니, 지표보다 팀의 다이내믹을 많이 봐준 것 같아요. 아이템 자체가 니치했던 것, 그러니까 틈새를 노렸던 것도 차별점이었고요.
“고객이랑 마지막으로 얘기한 게 언제야?”
기수는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YC에서 매주 성장률을 확인받던 시간을 기억했습니다. 지난주보다 몇 퍼센트 성장했는가.
Q. 이렇게까지 갈아 넣어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상훈 갈아 넣어야 한다는 데는 어느 정도 동의해요.
YC에서는 팀별로 지난주 대비 몇 퍼센트 성장했는지를 보고, 달성한 팀은 초록색으로, 달성하지 못한 팀은 빨간색으로 색칠을 해줘요. 약간 채찍질을 하거든요. 근데 쟤네도 열심히 갈아 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가 지금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기조가 깔리는 거죠.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말이고 뭐고 상관없이 집에 갇혀서 열심히 만들고 유저 인터뷰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하형석 YC 첫날에 54개 회사를 놓고 인기투표를 해요. 이 회사가 잘될 것 같다, 안 될 것 같다. 저희가 꼴찌에서 여덟 번째였거든요. 아직 제품도 안 나온 회사보다 순위가 낮은 거예요. 그래서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열심히 하자. 악바리 근성. 주 7일 근무를 도입하고 다 같이 자고 지내고, 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만 쉬었어요.
근데 그때가 회사 성장률이 가장 높은 때이긴 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고성장할 때도, 저성장할 때도, 역성장할 때도 있었는데 회사가 커질수록 시스템보다는 집중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를 더 잘하는 회사가 더 빨리 크는 것 같습니다.
그 숫자를 확인하는 자리가 오피스아워였습니다.
Q. 오피스아워에서는 무슨 얘기를 하나요?
하형석 담당 파트너들과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우리의 지난주 성장률을 얘기합니다. 만나서 인사, 이런 거 필요 없고 그냥 3%, 5%, 7%. 지난주 대비 몇 퍼센트 성장했냐.
그 드라이함이 엄청난 집중력을 줬던 것 같아요. 화요일엔 같은 기수끼리 저녁을 먹는 자리가 있었고 수요일엔 성공한 CEO가 와서 설명해주는 저녁이 있었는데, 저희는 한 번도 안 갔어요. 에어비앤비의 브라이언 체스키가 와서 성공담 푸는 거, 우리랑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딱 오피스아워만 갔습니다.
피터 신 저희도 에릭 미기코브스키랑 오피스아워에 딱 들어갔는데, 질문할 것들을 엄청 준비해 갔거든요. 그랬더니 이런 거 질문하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해요.
“고객이랑 마지막으로 얘기한 게 언제야?”
그러고는 바로 오피스아워를 끝냈어요.
이상훈 저희 기수엔 그룹 오피스아워가 있었어요. 비슷한 걸 만드는 팀들끼리 원형으로 모여서, 회사 하나씩 돌아가면서 얼마나 성장했고 매출이 얼마 나왔는지 다 얘기해야 돼요. “우리 이번엔 딱히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변화를 만들어야 했고, 거기에서 압박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하형석 (이런 경험 때문인지) 저는 ‘지난주보다 몇 퍼센트 성장했는가’라는 질문을 지금도 회사 리더들에게 묻는 편입니다.
Q. 그 질문은 지금 회사에서 어떻게 쓰이나요?
하형석 YC 오피스아워가 회사 성장의 본질이었던 것 같아요.
성장에 대한 프레임워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 게 투자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였거든요. YC는 네가 지난주에 뭘 했는지도, 너네 회사가 어떤지도 관심 없고 성장률만 물어보잖아요. 근데 다른 투자자들이 들어오면 어떤 분은 디자인을, 어떤 분은 프로덕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회사의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저희 미미박스가 10년 넘은 스타트업인데 최근 들어 다시 YC 때 같은 성장을 하기 시작했어요. YC에서 배운 방식을 다시 떠올려 적용했거든요. YC 파트너들이 했던 걸 제가 대신하고, 우리 리더들에게 주간 성장률을 물어보면서 그 성장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YC에서 제일 얻을 수 있는 건, 회사의 문화가 되는 질문 하나를 배우는 거예요.
샘 올트먼의 ‘체크’, 실리콘밸리의 서늘함
성장률을 묻는 일이 잔인할 수 있다는 얘기도 오갔습니다. 하형석 대표 자신도 YC에서 질문을 되돌려받은 적이 있습니다. 상대는 당시 YC 파트너였던 샘 올트먼이었습니다.
Q. 샘 올트먼을 직접 찾아가신 적이 있다고요.
하형석 회사가 엄청 잘될 때와 어려워졌을 때, 샘 올트먼한테 오피스아워를 신청한 적이 있어요. 만났는데 인사를 안 하고 앉아 있어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면 “체크.” 이해했다는 뜻이죠.
체크, 체크, 체크.
그러니 저만 계속 주저리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근데 왜 여기 있어?(Why are you here?) 그 문제 해결하면 되잖아.”
저는 제가 힘들다는 걸 공감받고, ‘이런 방법도 있어’라는 답을 듣고 싶었지만 결국 질문은 저에게 돌아왔죠. 네가 해결하면 되잖아. 네가 해결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됐지만, 그 당시에는 마음이 참 짠했어요.
샘 올트먼은 와이콤비네이터에서 마케팅과 세일즈를 많이 얘기하는 파트너였어요. “판매를 어떻게 하고 있어?” “매출을 어떻게 내고 있어?”만 물어보니까, 프로덕트와 엔지니어링을 중시하는 YC 내부에서는 조금 기피하는 파트너였고요. 근데 결국 YC에 오는 대부분이 너무 프로덕트 중심이어서 그런 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히 유익한 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Q. 두 분이 경험한 미국 투자자들은 한국 투자자들과 어떻게 달랐나요?
피터 신 구조적으로 보면 자금의 성격이 달라요. 미국은 민간 자본으로 운영되다 보니 실리콘밸리 기준 60~70%가 파운더 출신, 본인이 엑싯(회사를 매각하거나 상장시켜 성과를 낸 경험)까지 해본 사람들이 파트너를 맡습니다. 한국은 좀 더 금융권에 가깝고요.
하형석 기본적으로 미국 파트너나 창업자들은 내가, 우리 회사가 세상을 구할 거라는 믿음이 실제로 있어요. 우리는 ‘글로벌 진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미국 분들은 ‘내가 벌써 세상을 구하고 있고 내가 구할 거야’가 당연한 얘기예요.
피치덱(투자 제안서)을 봐도 한국 스타트업은 이 회사가 왜 망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많죠. 미국은 딱 하나입니다.
“이거 하나 되면 우리가 세상을 지배할 것입니다(What if this goes right).”
그렇기 때문에 미국 파트너들이 더 좋다, 한국 파트너들이 안 좋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출발점이 다르고 시선이 다릅니다.
피터 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머리의 뚜껑이 열려 있는 느낌, 상한선이 열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창업자가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이 넘는 스타트업)을 향해 달릴 때 그 과정을 받아줄 시장과 투자자가 있다는 게 위안인 거죠. 실패하더라도 시장이 나를 실패자로 평가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 연대보증 없이, 상한선 없이 달릴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거예요.
그 쿨함은 서늘함이기도 했습니다. 하형석 대표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하형석 저희가 매년 세 배씩 성장하다가 중국·미국 이슈로 한 번 성장이 꺾인 적이 있어요. 보드(이사회)에 계셨던 분이 그걸 보더니 “이건 더 이상 내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This is not worth my time)”면서, 권한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나가셨어요. 그때까지 몇백억을 투자하신 분인데요.
너 아니면 넥스트 구글을 찾아서 난 가야 돼. 미안하지만 너는 더 이상 내 시간을 쓸 수 없는 회사야.
창업자로서는 마음이 아프죠. 그렇지만 아, 이게 자본주의고 이게 실리콘밸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들기 전에 팔아라”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투자자의 믿음만으로 회사가 살아남지는 않습니다. 결국 고객이 돈을 내야 합니다. 피터 신 대표의 표현대로 “현실은 세일즈”였습니다.
Q. 연고 없는 미국에서 고객을 어떻게 설득했나요?
이상훈 세일즈가 생각보다 더 어려웠어요. POC(정식 도입 전에 제품을 시험해보는 검증 단계) 기간이 너무 길었거든요. 돈을 받고 POC를 한 경우도 있었는데, “너네가 요구사항을 주면 우리가 입맛에 맞게 커스텀해줄게” 하다 보니 제품이 그 회사의 요구에 점점 끌려가 특정 영역에 갇힐 수 있는 문제도 있었고요. 어사이드를 세일즈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형석 저희는 소비재니까요. GDP나 인구를 고려하면 미국 고객 한 명의 소비력은 한국의 수십 배인 것 같아요. 다들 돈을 잘 벌고 구매력이 높은 고객들이라 새로운 프로덕트를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훨씬 크죠.
실질적으로 첫 유저들은 레딧(미국의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모았습니다. 바이럴을 내야 되는데, 그러면 레딧에 들어가서 우리가 직접 바이럴을 하자. 그렇게 고객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피터 신 저희는 엔터프라이즈(기업용) 소프트웨어니까 YC에서 배운 게 ‘만들기 전에 팔아라(sell before you make)’라는 멘탈리티였어요. 사실 이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잖아요. 없는데 있다고 얘기하고. 저는 그런 걸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지금 아웃썸에서 액셀러레이팅할 때도 그런 걸 강조해요.
없어도 있는 척해라. 다 만들어졌다고 얘기해라.
YC에선 AI가 이미 있었어요. 휴먼 AI가(웃음). “우리 AI 나왔는데 한번 테스트해봐” 하면 뒤에서 사람이 직접 작업하는 거죠. 이런 스토리가 너무 많아요. 실리콘밸리가 그걸 관용해주기도 하고, CEO가 발표에서 날짜를 박으면 엔지니어들이 ‘아, 우리가 그때 맞춰야 되는구나’ 하는 문화가 아직 있으니까요. 일단 주문이 들어오고 계좌에 이체가 되면, 그때 배포해도 늦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일은 재밌었나요
이번 이오서재가 추천하는 두 번째 책은 도서 『오늘 일, 재밌었어』(브리 그로프 지음, 필름출판사)입니다. 미친 듯이 몰두하며 일하는 초기 기업도 결국 지속해서 일하기 위해 ‘일의 즐거움’을 체계적으로, 구조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인사이트와 실전 노하우를 담고 있죠.
Q.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이상훈 ‘나 재밌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요. 사람이 진짜 힘들면 “나 바빠요” 이런 얘기도 안 나오잖아요. ‘매일매일 일이 재밌나’라는 건 여태 일하면서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하형석 ‘오늘 일, 재밌었어’ 하면 재밌을 것 같지 않고요. ‘올해 일 재밌었어’라고 하면 공감이 될 것 같아요. 다들 하루하루는 힘들지만 재밌었던 포인트가 있었을 테니까요. 저희가 200명 남짓한 조직인데 서비스하는 고객은 몇백만 명이거든요. 한 명이 맡는 고객 수가 만 단위예요.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게 당연하죠. 대신 줌 아웃을 해보는 거예요. 지난 3개월 중에 재밌는 하루가 있었고, 지난 6개월 중에 재밌는 며칠이 있지 않았을까.
Q. 압박만으로 성과가 나던가요? 부작용은 없었나요?
하형석 어떤 종류의 압박이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회사의 퍼포먼스가 좋으면 그만큼 구성원들이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봐요.
이상훈 YC 때 어사이드는 압박이 되게 많았어요. 그룹 오피스아워에서 어떻게든 초록색을 만들어야 되니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했는데, 그때가 오히려 팀 생산성도 떨어지고 개개인의 역량이 발휘되지 못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일할 때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쌓인 게 많고 한 곳에서 계속 얼굴을 보다 보니 감정이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이 얘기를 하면 무슨 소리를 또 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Q. YC를 마치면 모든 게 풀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어땠나요?
이상훈 사람들은 “너네 어쨌든 YC 포트폴리오니까 행복하지 않니, 알아주지 않니” 하고 묻지만, 저희 팀은 오히려 YC 끝나고 슬럼프가 엄청 빡세게 왔어요. 돈을 못 버는데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느낌에 치우쳐 있었고, 고객이 “이거 만들어주세요” 하면 돈을 준다는 분위기에 맞춰 만든 게 많았거든요. 그때가 제일 우울하고, 코드만 입력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바꿨어요. YC의 기조는 ‘유저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라’지만, 저희는 ‘우리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 거기서부터 출발하자’로 방향을 바꿨어요. 그렇게 나온 게 지금의 AI 브라우저 어사이드예요. 제품을 만들었으면 최소한 우리가 써야 되고, 내가 쓰면 내가 불편하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봤죠.
지금은, 내가 만든 기능을 몇만 명이 쓰고 제품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재밌게 일하자’고 표현하지 않아도 그냥 재밌어지는 것 같아요.
Q. 무엇이 일을 재밌게 만들었나요?
하형석 미미박스 졸업자 이메일 리스트가 천 명이 넘는데, 이분들과 얘기해보면 지나고 나서 가장 재밌었던 경험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성장을 했을 때였어요. 회사라는 조직은 여러 명이 하나의 미션으로 모이는 거잖아요. 그 미션에서 내가 10 정도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20, 30, 40이 됐을 때. 그 시너지가 재미를 줬던 것 같거든요.
피터 신 저도 이 질문을 고민해봤는데요. 성과나 재미를 너무 나중에 주지 않는 것. 점심 먹을 때 틈틈이 좋은 카페를 간다든지, 중간중간 자주 느낄 수 있게 하면 팀이 조금 더 재밌게 같이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Q. 창업가이자 사업가로서 지금의 일은 재밌으신가요?
하형석 항상 재밌진 않았고요. 그래도 지금이 창업자에게, 어쩌면 모든 스타트업에 가장 좋은 때잖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K뷰티의 붐까지 있죠. 이때 노 저어야죠. 생각보다 1의 인풋으로도 3이 나오는 때라서 굉장히 재밌는 때인 것 같습니다.
고장 난 라디오와 각자의 휴가
미미박스 하형석 대표가 조직을 운영하며 지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2가지 명확한 기준을 잡고, 그걸 중심으로 조직 문화를 만들어 갔다고요.
- 목표를 하나로 좁히는 것
- 자신의 반응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
Q. 대표로서 조직 분위기를 어떻게 만드시나요?
하형석 딱 두 가지를 하려고 하는데요. 첫째, 저희 연간 목표는 보통 하나거든요. 그 목표를 1년 내내 똑같이 얘기합니다. 거의 YC 오피스아워처럼 저도 ‘고장 난 라디오’예요. 저한테 오시면 무슨 얘기를 할지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한테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째는 ‘워킹 위드 디노’라는 파일이에요. 제 영어 이름이 디노인데, 입사하면 그 파일이 주어지고 저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이 A4 서너 장에 적혀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건 명확함과 예측 가능함. 디노가 오늘 감정이 어떨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 OKR(목표와 핵심 지표를 정해 관리하는 방식)에도 그거 하나만 들어가 있습니다. 올해 매출액 같은 결과 지표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선행 지표 하나예요. 주력 제품인 ‘누니 립오일’을 작년에 200만 개 팔았는데 올해 천만 개 판매가 목표고, 전사가 그 목표에 맞춰 움직이게 합니다. 하나로 모으니까 조직이 더 빨라졌고 예측 가능해졌어요.
Q. 책은 리더의 칭찬과 성과 인정을 강조합니다. 본인은 어떠세요?
하형석 제가 약한 부분이 칭찬이에요. 칭찬을 많이 받고 크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 성과 인정은 금융 치료가 가장 좋지 않을까요. 저희 2분기가 1분기 대비 50% 성장해서 소액의 금융 치료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제가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Q. 일과 삶은 나누는 편이세요?
이상훈 냉정하게 말하면 아닌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여자친구랑 다툼도 많았어요. “너는 왜 나를 만나면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냐” “왜 항상 무겁게 노트북을 들고 다니냐.”
저도 위험 시그널이라고 느꼈거든요. 일과 삶이 분리가 안 되니까 일을 해도 재미가 없고, 개인적인 삶에서도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준을 세웠어요. 집에서는 경계를 세우기 어렵다는 걸 인정했고, 최소한 밖에 나갔을 때는 온전히 옆에 있는 사람한테만 집중하자.
하형석 저도 가족이 있으니 고민의 시기가 있었는데, 제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사무실에 있을 때더라고요. 죽을 때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낼걸’이 아니라 ‘회사에서 그거 더 해볼걸’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예 그걸로 최적화했습니다. 거의 주 7일 출근하고요. 그전에는 둘 다 컨트롤하려다 보니 휴가 가서 짜증이 나더라고요. 휴가 가서 싸워요. 그래서 지금은 와이프와도 휴가를 각자 따로 갑니다. 그렇게 대놓고 얘기하고 의논하니까 가족도 인정하더라고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니까 훨씬 나았습니다.
Q. 미미박스 초창기엔 엔지니어들과 한집에 사셨다고요.
하형석 저의 장점이자 단점이,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습니다. 한 분야를 깊게 알거나 잘하는 게 없는데, 궁금한 분야가 있으면 그분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걸로 풀어요.
초창기에는 데이터팀과 엔지니어링팀에 병목이 많았어요. 그래서 초기 엔지니어분들과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분들을 저희 집에서 렌트 없이 다 같이 살게 했어요. 일상을 같이 지내니까 훨씬 빨리 배웠고, 자연스럽게 저도 엔지니어링을 더 알게 됐고, 12시간 근무가 가능해졌고, 밥 먹을 때도 아침 먹을 때도 일 얘기를 하게 됐죠.
그 당시 저희 아기들이 일어나자마자 삼촌 방에 가요. 엔지니어분들은 항상 듀얼 스크린이니까, 한쪽엔 코드가 떠 있고 다른 쪽엔 유튜브로 핑크퐁을 띄워서 저희 아기들을 봐주고요. 회사와 구성원이 같은 미션을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게 저 개인적으로도 회사에도 큰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으로 가야 할까
지금 막 미국 진출을 경험한 창업자, 미국에서 엑싯을 경험했던 창업자, 미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펼치는 창업자. 이들 모두 ‘고투글로벌’에 예나 지금이나 동의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미국으로 향한 지 12년이 지난 미미박스도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미국으로, 아예 글로벌을 디폴트로 삼겠다고요.
Q. 지금 창업한다면 미국에서 시작하는 게 맞을까요?
하형석 과거에는 미국으로, 글로벌로 가야지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제가 창업한다면 한국에서든 어디서든 글로벌 스타트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플레이북』도 책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배울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로케이션과 상관없이 글로벌 스타트업을 키울 수 있어요.
어차피 미국 시장도 미국 사람의 것이 아니고 중국 시장도 중국 사람의 것이 아니잖아요. 계속 성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더 큰 시장에 더 빨리 나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게 살아남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이상훈 창업을 처음 한다면 미국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인프라가 잘 깔려 있고, 참여할 프로그램도, 교류할 기회도 많고, 무엇보다 유명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사람들과 한두 번이라도 얘기해봤을 때와 한 번도 안 해봤을 때는 얘기하는 결의 차이가 있거든요. 그리고 미국에서 대박이 나면 다른 나라에서도 쓰게 되어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미국에서 시작해서 확장하는 게 제일 좋지 않나 싶어요.
피터 신 결국엔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먼저 받은 도움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문화)가 실리콘밸리에서 제일 강력한 것 같아요.
오늘 이 대화가 이 영상을 보신 누군가한테는 한 편의 지도가 됐으면 좋겠어요. YC를 지원하는 사람, 미국으로 진출하는 사람, K뷰티를 만드는 사람,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들한테요. 먼저 간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넥스트 미미박스가 나오고 넥스트 어사이드가 더 빠른 시일 내에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세 창업가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오서재>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
📌 도서 안내
-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플레이북』(맷 모차리·알렉스 맥코·미샤 탈라베라 지음, 이오스튜디오)
- 『오늘 일, 재밌었어』(브리 그로프 지음, 필름출판사)
인터뷰 진행: 피터 신 | 글: 서용삼 | 편집: 김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