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사람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시작한 인터뷰. 감사하게도 앞선 두 번의 인터뷰가 많은 독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동시에 인터뷰를 진행한 두 분에게서 공통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고맙다고.
그래서 결심했다. 그 좋은 것을 나도 해봐야겠다고. 마침 정리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내 인터뷰를 해달라고 인터뷰어를 찾는 일이 영 이상하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겐 클로드가 있다. 내 프로필과 경력,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들려줄 테니 나를 인터뷰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그 결과를 기존 인터뷰 형식 그대로 전할까 했다. 그런데 셀프 인터뷰를 콘텐츠로 만들려니 자꾸 작위적으로 편집되어갔다. 그래서 오늘은 인터뷰가 아닌 독백 에세이로 전한다.
3년이라는 공백
대개의 인터뷰가 그렇듯, 나 역시 내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받았다. 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터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분량을 다 잡아먹을 것 같아 요약해본다.
32살까진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아내와 동시에 번아웃이 왔다. 뭉뚱그리기엔 그 안에 담긴 사정이 많지만, 어쨌든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리곤 1년 동안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세계여행을 떠났다.
마침 글쓰기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터라, 퇴사 전 DT 전략 업무를 했던 것을 무기 삼아 테크 트렌드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테크잇슈도 그 연장선에 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서점을 열었다.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한쪽에 내가 작업할 공간을 만드는 김에 공유 작업실도 함께 두었다.
낮에는 서점, 저녁에는 독서모임을 하며 낭만을 가득 채워가던 공간은 아쉽게도 오래 가지 못했다. 감사하게도 천사 같은 아이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점은 수익을 기대하고 만든 곳이 아니었고 프리랜서 수입은 일정치 않았던 터라, 아이에게 더 안정적인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다시 취업을 결심했다.
그 무렵 거짓말처럼 헤드헌터들의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건이 맞는 곳은 없었지만, 시장에 나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것만은 확인했다. 그래서 테크잇슈를 통해 역으로 셀프 구직을 시도했다.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 달라고. 그리곤 뜻이 정확히 맞는 한 곳과 연결이 되었다. 지금은 Technical Content Manager로 테크 블로그에 올라가는 콘텐츠를 만들고 확산하는 일을 맡고 있다.
퇴사한 지 3년 만의 입사라면 으레 걱정하는 것이 조직 적응 문제일 터. 하지만 그 걱정은 크지 않았다. 사실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이 사람들 간의 관계, 그리고 조직 적응력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온 자리가 문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난 3년은 AI가 전례 없이 빠르게 발전한 시기다. 회사를 떠나 프리랜서로 일은 해왔지만, AI를 적극적으로 쓸 이유는 딱히 없었다. 글을 쓰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이다. AI보다 잘 쓸 자신이 있었기에 굳이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보다 테크잇슈가 팔던 건 소식이 아니라 인사이트였고, 인사이트는 내 생각에 온전히 집중해야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달랐다.
하던 것만 잘하면 될 줄 알았다
그동안 해오던 일이 글쓰기였고 회사에서 맡은 일도 글쓰기였으니, 하던 것만 잘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우선 회사의 기술이 딥테크 중에서도 딥테크라는 사실. 그동안에도 테크잇슈를 운영하며 테크의 트렌드를 따라 잡고 있었지만, 그 깊이가 달랐다. 본래 글이란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했을 때 더 좋은 품질이 나오기 마련인데, 비전공자로서 그 기술을 따라잡는 것부터가 큰 일이었다.
또 하나는 생산성. 콘텐츠란 피로감을 주지 않는 선에서 기본적으로 다다익선이다. 브랜딩을 구축하는 데도 유리하고, 트래픽을 끌어오는 데도 유리하다. 로또 당첨 확률을 두 배 높이는 방법이 로또를 두 장 사는 것이듯, 콘텐츠도 많이 발행할수록 알고리즘을 탈 기회, 검색에 노출될 기회가 많아진다. 테크 블로그를 전담하는 사람으로서 생산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이 두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동안 잘 쓰지 않았던 AI였다.
딸깍 한 번이면 될 줄 알았다
답이 AI에 있다는 결론이 나자 바로 움직였다. 여기저기 사람을 쫓아다니고 여러 세션을 찾아 들었다. 그중 블로그 자동화를 다루는 세션을 보고 실제로 따라 해봤더니 꽤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왔다.
문제는 그 세션들 대부분이 B2C 사례였다는 것. 딥테크 B2B 기업의 블로그는 그것과 달라야 했다. 간극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B2B 기업의 블로그에 맞춰 글쓰기 자동화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역할을 나눈 에이전트까지 붙이며 실험을 이어갔다. 글의 완성도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발행까지 가는 데는 한계가 명확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럴싸한 콘텐츠가 아니라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담긴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딸깍으로 만들어진 콘텐츠에는 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세상의 트렌드와 회사의 장점을 엮고, 내부에서 벌어진 이슈까지 소화해야 하는 방대한 컨텍스트의 기획을 AI가 곧잘 만들어낼 리 없었다. 기획부터 구멍이 있으니, 그 뒤에 나온 글이 아무리 매끄러워도 내보낼 수 없었다.
혹시 팀원들에게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그동안의 실험 내용을 공유해보았다. AI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기획까지 맡길 수는 없었고, 완전 자동화는 어불성설이었다고. 그러자 돌아온 건 머리가 띵해지는 한마디였다.
"아이고 당연하죠. 그게 됐으면 재훈님을 왜 뽑았겠어요🙂"
그랬다. 딸깍 한 번으로 기업이 원하는 콘텐츠가 나왔다면, 내가 이 직무로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걸 깨닫기까지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그럼에도 아깝지 않았다. AI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확실히 알게 됐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회사 목소리의 페르소나와 스타일, 톤앤매너를 정립했다. 자동화는 무너졌지만 그 잔해 위에서 다음 것들이 가능해졌다.
모든 작업의 시작은 AI다
기획을 넘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의욕적으로 세웠던 생산 속도 목표를 낮췄다. 대신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글 쓰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늘 시각 자료를 만드는 것이 고민이었다. 기존에는 피그마 혹은 생성형 AI로 만들었다. 그러나 피그마 숙련도는 낮았고, 생성형 AI는 일관성이 부족했다. 미적 감각까지 부족했던 나는 어떤 결과물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것저것 시도해보느라 시간이 많이 들었다. 그 와중에 자기검열은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각 자료를 용납하지 못하며 지난한 시간만 쌓여갔다.
그러나 이 고민에 대한 답은 의외의 순간에 나왔다. 여느 때처럼 콘텐츠에 들어갈 표를 만드느라 한바탕 싸우고 나서 사내 디자이너에게 도움을 구한 적이 있다. 그러자 클로드로 피그마를 다룰 수 있게 가이드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활용하자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일정한 퀄리티로 일관된 시각 자료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욕심이 났다. 가이드는 그대로 두되 클로드에게 표가 아닌 그래프를 만들어달라고 해보았다. 그랬더니 브랜드 컬러를 적재적소에 쓰며 찰떡같이 만들어줬다. 다음엔 플로우 차트를 부탁했더니 화살표까지 정확한 위치에 놓으며 뚝딱 만들어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디자이너분이 만들어준 가이드를 바탕으로 스킬까지 만들어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유레카를 외쳤다. 아, AI를 OS처럼 쓰라는 게 이런 말이구나.
나는 피그마를 잘 다룰 줄 모르지만 AI는 사용법을 완벽히 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배워서 만드는 대신 AI에게 시킨다. 일관된 결과물을 위한 가이드도 AI와 대화하며 함께 완성해나간다. 이 공식은 비단 피그마에 그치지 않는다. AI는 이제 내가 다루는 웬만한 툴은 알아서 사용할 줄 안다. 모든 작업의 시작은 AI고, AI는 내가 원하는 대로 툴을 부려 결과물을 만든다. 이것이 나의 AX가 시작된 지점이었다.
직관이 없으면, 데이터라도
콘텐츠의 양 대신 질을 높이기로 했다면, 그 질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필요한 건 데이터였다.
직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기업의 테크 블로그를 운영해보는 건 처음이었고,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직관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데이터다.
문제는 그동안 쓰고 싶은 글만 쓰던 사람이 데이터 분석을 깊게 해봤을 리 만무하다는 것. 그러나 AI와 함께라면 가능했다. 클로드와 함께 지금 내게 필요한 데이터가 무엇인지 판단했고, GA와 GSC 데이터를 보강했으며, 취합된 데이터를 분석해 대시보드를 만들었다. 그리곤 다음 콘텐츠 기획의 방향을 정했다.
입사 후 작성한 콘텐츠의 절대량이 적어, 이 분석이 기획에 완벽하게 반영됐다고 보긴 어렵다. 계속 보완해나갈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기존에 발행된 글들을 SEO 최적화해 리프레시하는 것.
제로에서 시작해 SEO를 고려하며 콘텐츠를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이 들지만, 기존 콘텐츠를 최적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효과가 크다. 더구나 기존에 작성된 콘텐츠들은 이미 사내에서 '기획'되어 나온 글이다. AI가 하지 못하는 단계를 이미 거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는 뜻. 그 뒤의 작업은 AI가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정답이 있는 곳에서, AI는 강하다
콘텐츠를 만들고 확산하는 일에도 도움을 받는다. 기존에 작성된 내용을 바탕으로 SNS에 올릴 글을 만들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올릴지 조언을 받는다.
조직에 적응하는 데도 AI의 도움이 컸다. 사내 규칙이나 복지에 대한 내용을 금방 찾을 수 있었고, 특정 프로젝트가 궁금할 때는 컨플루언스나 슬랙을 연동해 배경과 결과를 빠르게 정리해 받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 걱정했던 딥테크 문제도 그렇게 넘었다. 기술에 대한 내용들을 팟캐스트로 바꿔 출퇴근길에 들었다.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무엇을 모르는지는 알게 됐다.
도움을 받았던 것들을 돌아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포맷이나 보편적인 정답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AI이기에 모든 것을 다 해줄 거라 기대했던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책방 주인이었기 때문에
아직 내가 AI를 잘 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빠르게 적응했다고는 생각한다.
책방 주인이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었을까. 되짚어 보면 딱 하나다. 한계를 두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한계를 두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책방 주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지난 3년간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AI와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분명 많은 실패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의 기억은 꽤나 오래 간다. 그러다 보니 관성적으로 "아 이건 AI가 못하는 거야"라며 한계를 긋는 경우가 생긴다. 지금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애초에 안 될 거라 생각하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겐 그런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 책방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AI에 대한 환상이 아직 남아 있고, 일부는 깨졌지만 여전히 AI가 많은 것을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모두 AI를 활용해보려는 마음가짐이 생겼고, 이 마음가짐이 AI 최전선에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기획을 잘 못한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 법은 없다고 믿는다. 언젠가 인간 수준으로 올라올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잘못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권하고 싶은 게 있다. 나만의 AI 오답 노트를 만드는 것.
AI는 모델도 발전하지만 사용법도 함께 발전한다. 실패했던 것들을 적어두고 주기적으로 다시 대입해 시도해보는 게 좋다. 그래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활용 능력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도 언젠가 틀린 말이 되기를
처음엔 스스로를 정리해 보려고 셀프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러다 독자분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고자 AI 적응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리고 결국 오답 노트를 권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답 노트를 만들라고 권해놓고 보니, 이 글이 내 첫 페이지가 된 것 같다.
여기 적힌 것들도 언젠가 틀린 말이 될 것이다. 기획은 넘길 수 없다거나, 딥테크 B2B 기업 블로그의 완전 자동화는 어불성설이라거나 하는 것들. 아니, 틀린 말이 되기를 바란다. 6개월 뒤에 이 글을 다시 꺼내 읽고, "어 이건 이제 되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잘 쓰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다음 레터에서는 다시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테크잇슈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어도, 이 글을 본 독자분들에게 다음 주인공은 스스로가 되어보라고도 전하고 싶다.
스스로 인터뷰하며 정리하는 것. 꽤나 괜찮은 일이다.
이재훈 | IT 커뮤니케이터
한창의 나이에 퇴사해 1년간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돌아와 서점을 열었고, 『샘 올트먼, 더 비전 2030』을 썼다. 지금은 다시 AI 기업에서 Technical Content Manager로 일한다. AI 시대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믿으며 매주 테크잇슈를 만든다.
이 인터뷰는 테크잇슈에서 발행되었습니다.
테크잇슈는 AI 시대, 저마다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부딪히며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