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검증 #사업전략 #마인드셋
AI로 MVP는 빨리 만들었는데, 고객은 빨리 오지 않았다.

디지털 콘텐츠 판매 플랫폼

‘제로피’를 운영하며 알게 된

개발 속도와 사업 속도의 차이

 

제로피의 초기 버전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AI와 노코드를 활용해 상품 등록, 카드결제, 콘텐츠 자동 전달, 주문 관리 같은 핵심 기능을 구현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기능도 훨씬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개발 속도가 곧 사업의 속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품을 빨리 출시하면 고객 반응도 빨리 확인할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을 빠르게 개선하면 서비스도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출시 이후 알게 됐습니다.

AI는 제품을 만드는 시간은 줄여줬지만, 고객이 움직이는 시간까지 줄여주지는 않았습니다.

 

제로피는 전자책, 노션 템플릿, 온라인 강의 같은 디지털 콘텐츠를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판매자는 상품을 등록하고 카드결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제가 완료되면 구매자에게 파일이나 링크가 자동으로 전달되고, 판매자는 주문과 고객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능만 놓고 보면 판매에 필요한 기본적인 환경은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능이 준비됐다고 해서 크리에이터들이 바로 제로피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다른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는 판매자에게는 상품과 후기, 판매 이력이 쌓여 있었습니다. SNS와 블로그 곳곳에는 기존 판매 링크가 공유돼 있었습니다.

플랫폼을 옮기려면 상품을 다시 등록하고, 파일과 링크를 이전하고, 기존에 공유한 판매 주소도 바꿔야 했습니다.

판매 수수료가 낮다는 장점은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 기존의 익숙한 방식을 바꿀 이유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AI는 상품 등록 기능을 빠르게 만들어줬지만, 판매자가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길 이유까지 만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첫 거래였다

 

처음에는 기능을 추가하면 사용자가 더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매 페이지를 개선하고, 관리 기능을 보완하고, 새로운 상품 유형을 지원했습니다. 개발 속도가 빨라진 만큼 필요한 기능을 빠르게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입자와 상품 수가 늘어나도 실제 결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사업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제로피에서 중요한 것은 회원가입이 아니었습니다.

판매자가 상품을 등록한 뒤 실제 고객에게 링크를 공유하고, 구매자가 카드로 결제하고, 콘텐츠를 전달받는 것까지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기능의 개수보다 고객의 행동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상품을 등록한 판매자가 첫 거래를 만드는지, 한 번 판매한 사람이 다시 거래하는지, 새로운 상품을 추가로 등록하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AI는 기능을 만드는 시간을 줄여줬지만, 고객이 행동할 이유를 만드는 시간은 줄여주지 못했습니다.

상품 등록 화면을 하루 만에 개선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판매자가 자신의 고객에게 새로운 링크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결제 서비스에서 신뢰는

개발 속도로 만들 수 없었다

 

제로피는 단순히 콘텐츠를 보여주는 서비스가 아닙니다.

판매자의 매출과 구매자의 결제를 다룹니다. 결제 후에는 전자책이나 템플릿, 강의와 같은 상품이 정확하게 전달돼야 합니다.

이런 서비스에서는 기능이 많다는 사실보다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믿음이 중요했습니다.

구매자는 결제 후 콘텐츠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판매자는 정산이 문제없이 이뤄지는지, 주문 정보가 누락되지 않는지 확인합니다.

 

AI를 활용하면 오류를 수정하고 기능을 개선하는 속도는 빨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비스에 대한 신뢰는 한 번의 개발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결제가 반복해서 정상 처리되고, 콘텐츠가 누락 없이 전달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응하는 경험이 쌓여야 했습니다.

AI로 기능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고객이 자신의 돈과 고객 정보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신뢰는 출시일에 완성되는 기능이 아니라 운영하면서 쌓이는 기록에 가까웠습니다.

 

제로피를 운영하며 AI의 가장 큰 장점은 개발 속도 자체보다 실험 비용이 낮아졌다는 점이라고 느꼈습니다.

상품 등록 과정을 바꾸거나, 판매 페이지의 문구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요금제를 적용하는 일을 이전보다 빠르게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고객 문의를 바탕으로 작은 기능을 추가하고 실제 사용 변화를 확인하는 것도 쉬워졌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도 있었습니다.

기능을 쉽게 만들 수 있으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기능부터 추가하려는 유혹이 생겼습니다.

사용자가 상품을 등록하지 않으면 등록 기능을 더 세분화하고, 거래가 발생하지 않으면 마케팅 기능을 추가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기능이 부족해서 고객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고객이 문제를 크게 느끼지 않거나, 기존 방식을 바꿀 만큼 필요하지 않거나, 서비스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개발이 쉬워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개발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능을 만들기 전에 더 자주 질문해야 했습니다.

이 기능이 고객의 어떤 행동을 바꾸는가?

대답하기 어렵다면 개발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사업 검증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발의 병목이 사라지자

다른 병목이 보였다

 

과거에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제품을 만드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AI와 노코드를 활용해 훨씬 적은 인원으로 MVP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작은 팀이나 1인 창업가도 결제와 데이터베이스가 포함된 서비스를 빠르게 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의 장벽이 낮아졌다고 사업의 장벽까지 낮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개발 문제에 가려져 있던 질문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누구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그 문제가 돈을 지불할 만큼 큰지, 고객에게 어떻게 도달할 것인지, 기존 행동을 바꿀 이유가 충분한지 같은 질문입니다.

AI는 이 질문에 답해주지 않습니다.

잘못 선택한 문제도 빠르게 제품으로 만들어줍니다.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는 기능도 낮은 비용으로 구현해줍니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제품을 만드는 능력보다,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개발이 쉬워졌다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틀린 제품도 더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됐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거래액 300만 원보다

더 중요했던 것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제로피의 7월 거래액은 300만 원을 넘어섰습니다.

 

플랫폼 사업의 규모로 보면 여전히 작은 숫자입니다. 이 정도 거래액으로 사업이 검증됐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초기와 비교해 의미 있는 변화는 있습니다.

전자책과 템플릿을 등록한 판매자에게 실제 결제가 발생했고, 한 번 판매한 사람이 다시 상품을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매자는 카드로 결제하고 콘텐츠를 전달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래액 300만 원이라는 숫자 자체보다, 같은 행동이 반복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품을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 이 반복을 발견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AI는 제로피의 출시를 앞당겨줬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객에게 집중해야 하는지, 무엇이 반복 사용을 만드는지, 판매자가 계속 머무를 이유가 무엇인지는 직접 운영하며 찾아야 했습니다.

 

AI 덕분에 제품을 만드는 일은 계속 쉬워질 것입니다.

비슷한 기능을 가진 서비스도 더 빠르게 등장할 것입니다. 개발 속도만으로 차별화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남는 경쟁력은 고객에 대해 얼마나 빠르게 배우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능을 얼마나 빨리 추가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기능이 필요하지 않은지 얼마나 빨리 알아냈는지.

제품을 얼마나 빨리 출시했는지가 아니라, 고객이 실제로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얼마나 빨리 발견했는지.

제로피 역시 아직 답을 찾는 과정에 있습니다.

AI로 개발비와 시간을 줄였지만, 그만큼 더 많은 기능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보다 고객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AI가 개발을 대신해줄수록 창업자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결정하고, 고객이 실제로 움직이는지 끝까지 확인하는 것.

결국 AI 시대의 MVP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빠르게 만드는 팀이 아니라, 가장 빠르게 배우는 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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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피 제로피 ·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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