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터에 '브랜드 헤리티지'와 관련된 글을 연재했습니다.
1. 드디어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가 공개됐어요. 칸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10년 만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화제성을 낳고 있죠. 그런데 브랜드 마케터로서 제가 주목한 건 배우도, 연출도 아니었어요. 바로 영화 속 경찰차로 등장한 현대자동차의 '스텔라'였어요.
2. 스텔라는 1983년에 출시된, 현대차 중형차 계보의 시작점이 되는 모델이에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중형차로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단종됐죠. 그런데 왜 현대차는 지금 판매할 수 없는 스텔라를 복원하고, 영화와 전시로 다시 대중 앞에 꺼내놓았을까요? 바로 '브랜드 헤리티지'의 가치 때문이에요.
3. 영화 속 스텔라는 단순한 차량 노출에 머물지 않아요. 주요 추격 장면을 이끌며 시대적 배경과 긴장감을 강화하는 핵심 오브제로 등장하죠. 영화의 무대는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마을 호포항이에요. 그 시대를 재현하려면 그 시대의 차가 필요하고, 스텔라가 그 자체로 시대를 증명하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4. 스텔라는 범석(황정민)과 성애(정호연)가 타는 경찰차로 등장해, 주요 추격 시퀀스의 중심축을 맡아요. 등장인물과 함께 위험한 상황을 돌파하며 작품의 긴장감을 끌어올리죠. 브랜드가 콘텐츠 안에서 존재감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로고를 오래 노출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역할을 맡는 거예요.
5. 현대차는 공식 유튜브를 통해 정호연 배우가 스텔라로 카 스턴트에 도전하는 촬영 과정을 공개했어요. 영화 속 스텔라와 추격 장면을 관객에게 다시 한번 각인하는 후속 브랜드 콘텐츠죠.
6. 현대차에게 스텔라는 준비된 자산이었어요. 2025년 9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서울 남산의 문화공간 '피크닉'에서 'By Your Side - 스텔라 & 쏘나타' 전시가 열렸거든요. 쏘나타 출시 40주년을 기념한 브랜드 헤리티지 캠페인이었어요.
7. 현대차는 이 캠페인으로 스텔라의 헤리티지를 세 가지 방식으로 자산화했어요. 복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스페셜 에디션 '스텔라 88'을 약 40년 만에 되살린 작업이에요. 아카이브는 복원 도면과 디자인 스케치, 당시 광고 영상과 카탈로그를 전시한 거고요. 기록은 《리트레이스 매거진: 스텔라 & 쏘나타》 발간이에요. 2023년 '포니' 편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로 인터뷰·에세이·칼럼 16편을 담았죠.
8. 복원·전시·아카이브·출판으로 축적한 헤리티지가 2026년 영화라는 더 대중적인 콘텐츠로 확장된 거예요. 현대차 관계자는 스텔라 88 복원을 "과거의 재현을 넘어, 독자 기술 개발을 위한 과거 임직원의 노력과 헌신을 되짚어보는 작업"이라고 표현했어요. 차량만 복원한 게 아니라, 그 차를 만들기 위해 도전했던 사람들의 노력까지 브랜드 자산으로 복원한 거죠.
9. 헤리티지를 가진 회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1965년 세이코는 일본 최초의 다이버 워치를 공개했어요. 팬들이 '62MAS'라 부르는 시계죠.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일본 남극 탐사대가 실제로 사용했어요. 실험실이 아니라 남극에서 검증된 셈이에요.
10. 세이코는 2017년 이 모델의 본격적인 복각을 시작한 뒤, 2020년 다이버 워치 55주년, 2024년 브랜드 탄생 100주년 기념 모델까지 꾸준히 선보이고 있어요. 원형의 디자인은 충실히 계승하되, 무브먼트와 방수 성능, 소재와 세부 사양은 현재의 기술로 바꿨죠.
11. 여기가 핵심이에요. 복각은 디자인을 옛날처럼 만든다고 성립하지 않아요. 신생 브랜드도 비슷한 모양의 시계는 만들 수 있어요. 돈을 더 쓰면 성능은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요. 하지만 '1965년에 출시돼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남극 탐사대가 사용했다'는 이력은 만들 수 없어요. 전통은 감성이 아니라, 경쟁사가 넘어올 수 없는 진입장벽이에요.
12. 그렇다면 왜 지금 브랜드 헤리티지가 중요해지고 있을까요? 첫째,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AI는 브랜드 콘텐츠의 평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표현 방식의 평준화를 불러와요. 우리 브랜드만의 차별점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어가는 거죠. 이때 '시간'이 엄청난 차별점이 될 수 있어요.
13. 독자 기술로 중형 세단을 만들려 도전했던 임직원의 노력, 그 시절 스텔라와 함께했던 고객들의 기억. 이런 시간의 축적이 이제 브랜드의 경쟁력이자 차별점이 돼요. 모두가 같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브랜드의 차별점을 만드는 건 흉내 낼 수 없는 과거예요.
14. 둘째, 긴 세월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가 돼요. 성능이 좋다, 가성비가 좋다는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에요. 하지만 세이코가 전할 수 있는 "우리는 1965년에도 있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라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신뢰의 증거가 되죠. 수많은 브랜드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시대라, 오래 버텼다는 사실이 오히려 희소해졌어요.
15. 셋째, 그 과거가 고객의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현대차의 '포니의 시간' 전시에는 일주일 만에 5,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어요. 사람들은 현대차의 역사를 공부하러 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포니는 아버지의 첫차였을 테니까요.
16. 브랜드의 과거는 브랜드 혼자 만든 게 아니에요. 그 제품과 함께한 시절을 살아온 고객의 기억도 헤리티지의 일부죠. 스텔라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스텔라는 자동차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출근길이고, 가족 여행이고, 자기 유년이에요. 그래서 스텔라를 스크린에 올리는 건 현대차의 역사를 자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관객에게 당신의 1980년대를 돌려주는 일이기도 해요.
17. 〈호프〉의 스텔라는 브랜드를 말하지 않아요. 그저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호포항의 풍경 속을 달릴 뿐이죠. 그런데 관객은 기억해요. 잘 만든 한 장면은 반복되는 광고 노출보다 오래 남기도 하거든요.
18. 역설적이에요. 모두가 미래를 향해 달려야 하는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뒤에 있어요. 미래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과거는 오직 살아남은 자만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19. 그래서 질문은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가 아니에요. 우리 브랜드가 이미 갖고 있는 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헤리티지를 얼마나 소중히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브랜드의 주요 자산으로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앞으로 브랜드의 차이는 새로운 것을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보다, 이미 가진 시간을 얼마나 잘 자산으로 바꾸느냐에서 만들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