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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린 연금술, ‘텍스타일리’가 주목받는 이유

 

11월, H-온드림 현장에서 만난 의외의 혁신기업

 

지난 11월, ‘H-온드림 스타트업 그라운드 13기’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쟁쟁한 테크 기업들 사이에서 유독 제 시선을 끈 곳이 있었습니다. 합성섬유를 재활용하는 스타트업, ‘텍스타일리(TextileRe)’입니다.

사실 재활용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키워드입니다. 환경 보호가 시대적 과제가 된 지금, 누구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영역이죠. 하지만 이 기업은 달랐습니다. 평소 눈여겨보지 않던 폐섬유 시장에서 보여준 성장 속도가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성과는 숫자로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법인 설립 5개월 만에 누적 24억원을 확보했고, 3곳의 투자사로부터 6억원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더군요.

이런 성장의 모습에도 처음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합성섬유 재활용 시장은 이미 대기업들이 장악한 레드오션 아닌가?”

하지만 시장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거대 기업들이 보지 못하는 틈새, 오직 스타트업만이 파고들 수 있는 ‘전략적 회색지대’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 ‘Textiel to Textile(T2T)’인가?

 

스타트업만이 파고들 수 있는 ‘전략적 회색지대’는 바로 “Textile to Textile(T2T)”, 버려지는 옷을 다시 옷으로 만드는 진짜 순환 경제입니다.

시장의 변화는 이미 2018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디다스와 나이키 같은 글로벌 리더들이 재활용 소재 사용을 공식화하며 판을 깔았죠.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그때와 또 다릅니다. 단순히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원료 확보 전쟁에 가깝습니다.

글로벌 재활용 합성섬유 시장은 2024년 약 25조원에서 2035년 약 55조원 규모로 폭발적인 성장이 예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성장이 예견되는 시장에 왜 아직도 ‘쓰레기’가 넘쳐나는 걸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옷을 만들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흰 티셔츠 한 벌을 만들기 위해 수천 리터의 물을 쏟아붓고, 강한 화학약품으로 원단을 깎아내야만 ‘깨끗한 새 옷’을 얻을 수 있었죠. 지금까지는 이 '환경 파괴 비용'을 누구도 지불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구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EU를 필두로 한 글로벌 규제는 ‘네가 판 옷은 네가 끝까지 책임져라(생산자 책임 재활용)’며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 역시 달라졌습니다. 페트병을 녹여 만든 옷보다 '버려진 옷을 다시 옷으로 만든(T2T)' 진짜 순환에 더 높은 가치를 매기기 시작했죠.

결국, 버려지는 옷을 다시 고부가가치 원료로 되돌리는 기술은 단순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아닙니다. 천연 자원 고갈과 환경 규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생존권'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제가 현장에서 본 텍스타일리의 빠른 성장은, 바로 이 절박한 시장의 요구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텍스타일리 혁신, 기술을 넘어 비즈니스 디자인을 완성하다

 

그렇다면 텍스타일리는 어떻게 대기업도 못 푼 문제를 풀어냈을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후발 스타트업이 어떻게 5개월 만에 24억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공개된 특허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들이 단순한 환경 기업을 넘어선 ‘공정 혁신 기업’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텍스타일리는 유색 섬유 재활용의 최대 병목이었던 ‘탈염(De-dyeing)’ 과정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했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강점은 확실한 ‘진입 장벽의 구축’입니다. 기존 방식은 마치 '압력솥에 표백제를 넣는' 식이었습니다. 고온·고압의 특수 장비에 독성 물질을 필수로 써야 했죠. 하지만 텍스타일리는 비타민C 기반의 용액으로 일반 냄비에서 끓이듯(70~120℃ 상압) 색을 빼냅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대부분의 재활용 원료는 회색빛이 돌아 '검은색 티셔츠'나 '어두운 가방'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타일리는 고순백(L60~90) 원료를 뽑아냅니다. 즉, 흰 셔츠, 밝은 색 운동복처럼 팔리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주목할 지점은 이 모델이 가진 ‘확장 가능한 비즈니스’의 잠재력입니다. 이 기술의 진짜 무기는 '가볍다'는 점입니다.

  • 초기 투자가 적다 : 특수 고압 설비 불필요 = CAPEX 부담 최소화. 심지어 대기업 유휴 설비도 활용 가능합니다.
  •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 : 단회 공정으로 시간 단축 + 공정비 30% 절감. 생산 거점을 빠르게 늘릴 수 있습니다.
  • 협상력이 생긴다 : “우리 기술 쓰면 당신 설비로도 바로 돌아갑니다”라는 제안은, 대형 화학사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카드입니다. (텍스타일리의 전략은 아닙니다만 한번 고민 해 보았습니다)

텍스타일리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기술은 완벽할 필요 없다. 상대방의 자산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설계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미국의 ‘서크(Circ)’가 보여주는 미래

 

"한국 스타트업이 잘하면 얼마나 클 수 있을까?"

그 답은 이미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스타트업 '서크(Circ)'는 빌 게이츠의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 유럽 최대 패션 플랫폼 잘란도 등으로부터 1억 달러(약 1,500억 원)를 유치했습니다. 텍스타일리의 24억 원과 비교하면 약 60배 규모입니다. 이들 역시 텍스타일리와 마찬가지로 폴리-코튼 혼방 원단을 화학적으로 분리해내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서크의 고객 리스트를 보면 확신이 섭니다.

파타고니아, 자라, H&M... 이들은 EU 규제 강화, 소비자 인식 변화, ESG 평가 압박이라는 3중 압박 속에서 T2T 기술을 가진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서크는 "좋은 기술"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필요한 솔루션"을 제공한 겁니다. 텍스타일리의 포지션도 동일합니다.

텍스타일리의 전략은 단계적입니다.

  • 1단계(현재) 공정 자투리(Pre-consumer) 공략 → 품질 균일, 수거 쉬움, 빠른 매출 확보 가능
  • 2단계(향후) : 헌 옷(Post-consumer) 시장 진입 → 시장 규모는 10배 이상, 단 기술 난이도 높음

서크도 이 경로를 밟았습니다. 텍스타일리가 1단계에서 기술력과 고객을 확보한 뒤 2단계로 가면, 시장을 선점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구조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서크가 이미 1,500억을 받았는데, 텍스타일리가 이길 수 있을까?"

답은 공정 효율에 있습니다.

서크는 폴리-코튼 분리 기술에 강점이 있지만, 텍스타일리는 저온·상압 탈염으로 공정비를 30% 이상 낮춥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은 곧 생존력입니다.

규제는 이미 시작됐고, 글로벌 브랜드들은 T2T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서크가 증명했듯, 가장 효율적인 공식을 가진 팀이 시장을 가져갑니다. 텍스타일리가 그 자리에 설 확률은 충분히 높습니다.


 

거인의 발 밑에 기회가 있다

 

스타트업 멘토링을 하다 보면 "대기업이 다 하는 시장에서 제가 비빌 틈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텍스타일리는 그 답을 명확히 보여줬습니다.

  • 거대 공장을 짓지 않고, 기존 설비를 활용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 거창한 슬로건 대신, 공정비 30% 절감이라는 압도적 경제성을 증명했습니다.
  • 레드오션처럼 보이는 재활용 시장에서, 대기업이 풀지 못한 '유색 섬유 탈염'이라는 병목을 정확히 찼습니다.

이것이 제가 텍스타일리의 성장을 확신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예비창업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거인이 지배하는 시장일수록, 거인이 불편해하는 틈새가 반드시 존재한다." 텍스타일리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시장에도 '지저분해서 대기업이 안 하는 영역', '수익성은 있지만 귀찮아서 방치된 공정', '규제는 강화되는데 솔루션은 없는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틈새를 찾아내고, 가장 효율적인 공식으로 증명하는 팀. 그것이 바로 투자자와 시장이 찾는 스타트업입니다.

텍스타일리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장에서도 '작지만 정확한' 혁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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