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제품은 모두를 위한 거에요.

스타트업 IR 자리에서, 신규 프로젝트 회의에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속으로 긴장합니다. 정말 '모두'를 위한 제품일까요? 아니면 사실 '아무도'를 위한 제품은 아닐까요?
실패하는 프로덕트의 공통점
지난 5년간 수십 개의 스타트업과 신규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발견한 패턴이 있습니다. 실패하는 프로덕트는 대부분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 "바쁜 직장인들을 위한..."
- "Z세대를 타겟으로..."
얼핏 보면 고객을 정의한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은 20대 헬스장 트레이너일 수도 있고, 60대 당뇨 환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둘에게 필요한 제품은 완전히 다릅니다.
막연한 고객 정의는 세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만듭니다.
첫째, 제품 개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기능은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칼로리 계산? 운동 기록? 건강검진 알림? 약 복용 체크? 팀은 무엇부터 만들어야 할지 혼란에 빠집니다.
둘째, 마케팅 예산을 낭비하게 됩니다.
페이스북 광고를 집행하려고 하는데 "20~60대, 대한민국 전체, 건강 관심사"로 타겟팅 하면 어떻게 될까요? 클릭당 단가는 치솟고, 전환율은 바닥을 칩니다.
셋째, 고객 피드백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베타 테스터 A는 "앱이 너무 복잡해요"라고 하고, 테스터 B는 "기능이 부족해요"라고 합니다. 둘 다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고객군일 수 있습니다.
고객 구체화란 무엇인가?

고객 구체화는 단순히 나이와 직업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한 사람을 직접 만나 1시간 동안 인터뷰한 것처럼 생생하게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고객 정의는 이런 수준이어야 합니다.
34세 IT 스타트업 개발자 김지수 씨는 강남구 신논현역 도보 10분 거리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주 3회 정도 밤 10시 이후 퇴근하며, 최근 6개월간 만성 두통으로 한 달에 2~3회 진통제를 복용합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두통 자연 치료법'을 검색해봤고, 삼성헬스와 캐시워크, 만보기 앱 3개를 깔아놨지만 일주일에 1번도 열어보지 않습니다. 월급 420만원 중 건강검진과 영양제에 월 15만원을 쓰고 있으며, 약에 의존하지 않고 두통을 관리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고객이 진짜 '보입니다'. 어떤 지하철역 근처에 광고를 붙여야 할지, 어떤 블로그 키워드에 광고를 걸어야 할지, 앱 화면의 첫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할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왜 이렇게까지 구체적이어야 하나요?
"이렇게 좁게 정의하면 시장이 너무 작아지는 거 아닌가요?"
가장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객을 좁게 정의할수록 더 빠르게 성장합니다.

원리1 : 명확한 타겟은 더 강력한 제품을 만든다.
에어비앤비의 초기 타겟은 '여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석하는데 호텔이 다 찼고 저렴한 숙소를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좁은 타겟 덕분에 그들은 정확히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고객 정의는 제품의 모든 의사결정을 명확하게 만듭니다.
- 어떤 기능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가?
- UI/UX는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
- 어떤 용어와 문장을 사용해야 하는가?
원리2 : 특정 가능한 가설만이 검증 가능하다.
"디지털에 익숙한 사람"과 "매일 삼성헬스를 사용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명확할까요?
후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타 테스터를 모집할 때도, 광고 타겟팅을 할 때도, 심지어 길거리에서 설문조사를 할 때도 "삼성헬스 사용하세요?"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모호한 정의는 검증할 수 없습니다. 검증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습니다.
원리3 : 집중이 확산을 만든다.
인스타그램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진 공유 앱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폰 사용자 중 사진 필터에 관심 있는 얼리어답터'를 타겟으로 했습니다. 이 좁은 집단이 열광하자, 자연스럽게 다른 그룹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고객 구체화의 핵심 요소들
그렇다면 고객을 구체화할 때 어떤 것들을 정의해야 할까요? 크게 세 가지 축이 있습니다.

1) 인구통계학적 프로필 (누구인가)
단순히 나이만 적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생활 패턴이 눈에 보일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 나이 : 범위가 아닌 구체적 연령대 (예: 32~42세)
- 직업/소득 : 생활 수준과 지불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
- 거주지 : 단순히 '서울'이 아닌 '강남/판교/상암' 수준
- 라이프스타일 : 1인 가구인가,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정보들이 왜 중요할까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광고 타겟팅을 할 때 이런 옵션들로 필터링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일수록 정확한 사람에게 광고가 노출됩니다.
2) 행동 패턴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많이 간과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건강에 관심 많음"이라고 쓰지 마세요. 대신:
- 어떤 앱을 사용하는가?
- 어떤 키워드로 검색하는가?
- 정보를 주로 어디서 얻는가? (유튜브? 블로그? 지인?)
- 얼마나 자주 관련 행동을 하는가?
이런 구체적인 행동 데이터가 있어야 고객을 실제로 찾을 수 있습니다.
3) 니즈와 맥락 (무엇을 원하고 왜 원하는가)
고객이 원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과 깊은 것 두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 표면적 니즈 : "두통약을 덜 먹고 싶다"
- 깊은 니즈 : "약에 의존하는 내가 싫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
표면적 니즈는 기능을 결정하고, 깊은 니즈는 메시지를 결정합니다. "하루 2알씩 먹던 진통제, 이제 줄여보세요"라는 메시지와 "약 없이도 건강한 삶, 시작해볼까요?"라는 메시지는 같은 제품을 설명하지만 완전히 다른 감정을 자극합니다.
실전에서 주의사항
함정1 : 너무 많은 고객군을 동시에 타겟팅하기
초기 단계에서는 한 가지 고객군에만 집중하세요. "A도 고객이고 B도 고객이고 C도..."라고 하면 결국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만약 여러 고객군이 있다면, 우선순위를 정하세요.
- 가장 큰 시장은 어디인가?
- 가장 접근하기 쉬운 그룹은?
- 가장 간절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 그룹에 집중하고, 거기서 성공한 뒤 확장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함정2 : 가상의 고객 만들어내기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실제 사람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고객을 만들어내는 것.
실제 고객 3~5명과 이야기해보지 않고 고객을 정의하지 마세요. 책상에서 머리로만 만든 고객 정의는 대부분 틀립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거야"가 아니라 "이런 사람을 실제로 만났어"가 되어야 합니다.
함정3 : 한 번 정의하고 끝내기
고객 정의는 살아있는 문서입니다. 제품을 만들고, 론칭하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계속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처음 정의한 고객과 실제 사용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학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보고 정의를 계속 다듬어나가는 것입니다.
고객 구체화, 어떻게 시작할까?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고객 구체화가 왜 중요한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하셨을 겁니다. 이제 실제로 해볼 차례입니다. 하지만 막상 빈 페이지를 앞에 두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단계: 고객 구체화' 툴킷을 준비했습니다.
이 툴킷에는,
- 고객 프로필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템플릿
- 여러 고객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의사결정 매트릭스
- 완성도를 스스로 체크할 수 있는 가이드
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툴킷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는 진짜 고객에 대한 깊은 이해 입니다. 툴킷은 그 이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팀과 공유하는 것을 도와줄 도구일 뿐입니다.
다음 단계는?
고객을 구체화했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 고객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가?"
같은 '30대 IT 직장인'이라도 어떤 사람은 시간 부족 문제를, 어떤 사람은 동기부여 문제를, 어떤 사람은 정보부족 문제를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품이 해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문제'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구체화된 고객이 겪고 있는 '문제'를 날카롭게 정의하는 방법(2단계 : 문제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핵심 요약
고객 구체화는 성공하는 프로덕트의 필수 조건입니다:
- 막연한 타겟은 제품 개발, 마케팅, 피드백 해석 모두를 어렵게 만듭니다
- 구체적인 고객 정의는 한 사람을 1시간 인터뷰한 것처럼 생생해야 합니다
- 좁게 정의할수록 더 빠르게 성장합니다 - 집중이 확산을 만듭니다
- 인구통계, 행동 패턴, 니즈와 맥락 세 가지 축으로 고객을 이해하세요
- 실제 고객과 대화하지 않고 만든 정의는 위험합니다
지금 바로 당신의 고객을 구체화해보세요. '모두'가 아닌 '단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