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잃은 한국, 패션은 어디로 가나?
3월 한달을 생각해보면 두개의 계절이 공존했던 것 같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에 얇은 재킷을 입고 다니다가 낮에는 재킷을 벗어던지고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때아닌 눈보라가 치면서 영하로 떨어지니 부랴부랴 넣어두었던 패딩을 꺼내기도 했죠. 그야말로 오락가락한 날씨로 옷장 정리를 언제 해야 하나 쉬 마음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3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이제서야 옷장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 싶어 시간을 내어 겨울옷, 봄 여름 옷을 한데 펼쳐 바닥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더라고요.
(출처: 캔바)
확실한 계절의 경계라 없다보니 이 옷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저 옷은 잠시 추워질 때 입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이건 봄 옷, 이건 겨울옷 구분 자체가 모호해지더라고요.
실제 패션 시장도 그렇습니다. 기존에는 패션쇼를 보면 봄여름을 의미하는 SS 패션, 가을 겨울을 의미하는 FW 패션을 나누어 진행이 되었죠. 그래서 한 계절 앞서 선보이는 패션쇼를 보면서 ‘아 이번 겨울엔 이게 유행할건가 보다’ 짐작했는데, 이제는 시즌리스에 대한 패션 업계의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시즌리스, 그야말로 계절 구분이 없다는 말인데요.
한국 기상청에 따르면 1991년-2020년, 최근 30년 사이에 여름의 길이가 과거보다 20일 이상 길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월 평균 기온도 10도 이상의 ‘아열대 기간’이 8개월 이상 이어지고 있다보니 이제 우리 나라가 사계절 뚜렷한 나라로 봐도 좋을지 애매한 시점이 온 겁니다.
계절이 무너진 시점에서 패션 브랜드들은 ‘봄 옷을 제안할게’ 에서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옷은?’이라는 접근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겁니다.
사실 전통적인 패션 브랜드들은 계절 단위로 의류를 기획, 생산, 판매 행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점점 비효율적이 되어가고 있고, 유행 역시 2010년대에만 해도 3개월은 갔지만 지금은 1개월이라 할 정도로 유행이 지나치게 빠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출처: 캔바)
그리고 기존 패션 업체에서 세워두었던 기획 생산 방식은 계절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예상보다 길어지거나 짧아질 경우 해당 시즌 의류가 다 소진되지 못하기 때문에 재고떨이를 하거나 할인 판매로 이어지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브랜드들은 “계절지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시즌리스 전략을 통해 계절 단위로 기획, 생산, 판매하는데에서 벗어나 계절을 전제로 하지 않고 한 제품으로 여러 계절을 넘나들면서 팔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옷으로 따지면 레이어드 룩 같은 느낌이네요. 더우면 하나씩 벗고, 추우면 하나 더 껴 입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반팔을 겨울에도 입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브랜드 입장에서 이러한 시즌리스 전략은 제품의 수명을 연장하기 때문에 재고떨이, 할인 판매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고요. 소비자 입장에서도 실용적이면서 가치 소비가 가능해 집니다. 물론 거시적으로 ESG 측면에서도 긍정적이죠.
시즌리스를 실천하는 브랜드
최근 여러 기사를 통해 시즌리스로 접근하는 브랜드 사례들이 나오긴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시즌리스 사례는 크록스였습니다.
(출처: 이코노미스트)
제 선입견 속에 크록스는 항상 ‘여름 신발’ ‘해변에서 신는 신발’ 또는 ‘슬리퍼’ 이러한 느낌이 강했거든요. 하지만 지난 겨울에는 탈부착이 가능한 털 안감을 추가해 겨울용 크록스를 출시해서 크록스를 겨울에도 신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리고 기존의 투박한 디자인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컬러를 사용했던 크록스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커스텀 소품, 지비치를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이 지비치를 구입해 크록스에 달면서 자신만의 신발을 연출하게 했죠.
무신사의 경우 작년에 2025 S/S 프리뷰를 통해서 입점한 브랜드들이 올해 생산할 신제품을 선공개 해 보이고 고객 피드백을 참고해 생산 여부를 결정하는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와디즈나 텀블벅처럼 신제품 출시 예고를 통해 사전 모객을 체크하고 생산하는 프로세스인데요. 이러한 구조는 고객 반응에 따라 재고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브랜드와 소비자 모두가 윈윈할 수 있습니다.
(출처: 아시아경제)
유니클로의 경우 히트테크나 에어리즘 등 기능성 소재를 기반으로 제품을 사계절 운영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소재가 여름, 겨울에만 딱 입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더라고요. 레이어드 전략을 통해 저 역시 에어리즘을 겨울에 레이어드로 입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더에러는 시즌으로 옷을 생산하기 보다 협업과 드롭 형태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운영하고 ‘이야기를 파는 브랜드’로 Z세대에게 어필, COS는 매 시즌에 대형 키워드, 유행 트렌드를 제시하기 보다 베이직하면서 시즌리스한 실루엣을 중심으로 브랜드 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타임리스 웨어’라는 컨셉으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죠.
요가계의 샤넬이라 부르는 룰루레몬의 경우 요가복을 너미어 데일리 웨어로 라인을 확장하고 있어서 계절에 상관없이 기능성, 스타일을 융합한 시즌리스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국내 젝시믹스, 안다르도 궤를 같이 하고 있어요. 젝시믹스의 경우 레깅스로 출발했지만, 골프, 등산, 테니스 등 라인을 확장해 나가다가 운동화, 가방 소품에 이어 현재는 데일리 출근룩에 어울리는 의상들도 보여주고 있거든요. 안다르는 라운지 웨어를 젝시보다 먼저 보여주기도 했고요. 젝시믹스, 안다르 모두 최근에는 운동할 때만 입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없애는 다양한 제품 결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크테릭스는 아웃도어 브랜드이지만 애슬레저 수요와 도시 라이프 스타일을 겨냥해 사계절 착용이 가능한 경량 의류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션 브랜드들의 시즌리스 전략과 시도들을 보면 이들의 변화는 단순히 날씨에 적응한다기 보다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철학에 있어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시즌이 지나면 할인, 폐기한다는 방식에서 벗어나 롱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거기에 브랜드 서사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땡처리, 할인, 창고 대개방과 같은 재고 처리를 통해 기존의 소비자들이 특정 시즌까지 제품의 구매 행위를 미루게 하거나, 아울렛을 번성하게 만들었는데요.
(출처: 캔바)
이제는 ‘이 옷은 이번 시즌 신상이에요’로 접근하지 않고 ‘이건 항상 당신에게 어울릴 수 있어요’ ‘당신의 스타일에 잘 맞아서 언제든 믹스매치할 수 있죠’ 방식으로 브랜드 언어가 바뀌는 겁니다.
브랜드들이 소비자와의 관계를 재정의하면서 브랜드의 초점은 ‘우리의 생산일정’ 이 아니라 ‘고객의 착용’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일회성 소비가 아닌 경험 중심의 소비, 가치 중심 소비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SPA 브랜드들이 나왔을 때 입고 버리고, 한계절 입을 거니까 대충 입자 방식으로 의류를 구매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취향도 견고해지고 저에게 어울리는 옷들에 대해 뚜렷하게 알다보니, 옷을 구매하는데 신중하고, 만약 구매하면 오래 입게 되더라고요. 이러한 소비는 지난 마케터의 시선에서 이야기했던 슬로우 소비와도 맞닿아 있죠.
마케터의 시선
패션 브랜드들의 시즌리스 전략은 마케터의 업무가 줄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즌으로 어프로치 하기 보다는 ‘모멘텀’으로 움직이고 날씨를 활용하기 보다는 콘텐츠의 ‘맥락’을 기준으로 고객과의 접점을 형성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죠.
(출처: 캔바)
그래서 과거에는 특정 기간 내에 제품을 기획하고 판매하고 매출을 올리는 단기 전략에서 집중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고객과의 관계관리(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관점에서 어떻게 고객과의 관계를 쌓으며, 경험과 몰입을 선사할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장기간 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을지를 설계해야 합니다.
좀더 긴 호흡에서 브랜드와 소비자 간의 관계를 정의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봄 시즌 특가’ 라는 시즌 캠페인 보다는 ‘레더가 어울리는 당신에게’와 같은 어프로치를, ‘여름 반바지 특가 할인’ 보다는 ‘야외 활동에 어울리는 추천’과 같이 시즌 캠페인에서 테마 캠페인으로, 패션 달력 기준 광고에서 라이프스타일 리듬 기반 기획으로, 가격 중심의 프로모션에서 콘텐츠 중심의 브랜디드 마케팅으로 전략들이 바뀌어야 하는 거죠.
결국 시즌리스 전략이라는 마케팅에서 지속성과 진정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인사이트를 줍니다.
이번 시즌에 팔고 끝! 이 아니라 “어떤 고객이, 어떤 순간에, 왜 우리 브랜드를 떠올리는가”를 설계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