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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창업가들은 어떻게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했을까요? 창업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Day 0로 돌아가, “처음”에 어떤 시행착오를 거쳐 고객에게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를 배웁니다.
미국 여행에서 아울렛 쇼핑을 할 때 폴로, 코치 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패션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토리버치’인데요. ‘TT’ 모양의 시그니처 로고로 유명한 토리버치는 세련된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브랜드 중 하나죠. 이 브랜드는 창업자인 토리 버치(Tory Burch)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토리는 패션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은 후 자신만의 브랜드 철학을 실천하고자 창업을 결심했지만, 창업 당시 그녀는 이미 패션계의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토리의 창업을 소위 사교계 인사들의 허영심에 가득 찬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신념과 전략으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해냈고, 토리버치는 오늘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조 자산의 패션 부호이자 포브스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린 토리 버치. 오늘은 그녀의 Day 0, 1990년대 후반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틈새 시장의 발견과 ‘력셔리’의 재정의
2. 가장 큰 브랜드가 아닌 가장 특별한 브랜드
3. 선입견과 가십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힘
1. 틈새 시장의 발견과 ‘력셔리’의 재정의
토리 버치는 필라델피아 외곽 근처의 거대한 농가에서 자랐습니다. 종이컵 회사를 상속받은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사립학교를 졸업한 후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토리는, 졸업이 다가오자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수많은 이력서를 제출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중 어머니가 입는 옷의 디자이너였던 조란(Zoran)에게 메일을 보내고 일자리를 구하게 됩니다.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을 해야 한다는 말에 토리는 졸업하자마자 뉴욕에 방을 구해 이사를 갔죠. 커피 심부름부터 미팅 준비와 물건 배송 등, 토리는 그곳에서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며 패션계에 입문하게 되는데요. 패션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의 밑에서 자라긴 했지만,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에게 패션에 대한 놀림을 받았던 그녀에게는 사실 생각치 못했던 커리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첫 직장을 시작으로 이후 패션 잡지인 하버스 바자를 비롯해 랄프 로렌과 베라 왕, LVMH 등 유명 패션 브랜드들에서 홍보 경력을 쌓으며 토리는 업계에서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 인사 중 한명이 되었죠.
📒 Editor’s Note: 토리는 한 인터뷰에서 트랙터에 앉아 에스파드류 신발과 분홍색 셔츠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항상 완벽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옷의 디테일 또한 놀라웠다고. 그녀는 브랜드를 설립한 후에도 패션을 사랑했던 부모님의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토리의 인생에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면서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녀가 LVMH에서 일할 당시 같은 건물의 입주사에서 근무하던 크리스 버치를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요. 그 운명같은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은 1996년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편 크리스는 이전 결혼에서 세 명의 딸이 있었고, 이후 토리는 크리스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아 총 여섯 아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게 되죠. 그렇게 여섯 아이들의 엄마가 된 토리는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 퇴사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일을 정말 사랑했던 그녀에게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되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퇴사 후 토리는 본인만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머릿속에는 항상 창업에 대한 수많은 아이디어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여섯 아이들의 엄마로서 처음에 토리의 관심 분야는 패션과 관련된 것들이 아닌, 아기 용품이나 공립 학교, 재단 설립 등 주로 아이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그녀는 정작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회사를 창업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 돈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은 점점 명확해졌죠.
다양한 사업들을 생각하던 중 토리는 결국 지금까지 커리어를 쌓아온 패션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패션 시장의 ‘틈새’였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럭셔리 브랜드의 옷을 사기 위해서는 수천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위 ‘패스트 패션’이라 불리는, 저렴한 가격의 대중적인 옷들을 구매해야 했죠. 토리는 이 사이의 틈이 비어있다고 생각했고, 럭셔리한 옷을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할 수 있는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럭셔리 제품은 꼭 가격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배운 바로는 럭셔리라는 것은 결국 감정이고, 그것이 당신에게 주는 느낌과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 Editor’s Note: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일반적인 말과는 달리, 토리는 아이디어를 주변에 이야기하면 결국 말하는 것에만 그치고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만 생각해왔다고.
2. 가장 큰 브랜드가 아닌 가장 특별한 브랜드
토리는 패션 브랜드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와 스케치들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들었습니다. 그 책은 1960-70년대 토리의 부모님 사진, 오드리 햅번의 플랫 슈즈, 그리고 토리의 어머니가 즐겨 입었던 잭스(Jax)라는 브랜드 등으로 가득했다고 하네요.
토리는 이 스크랩북을 기반으로 그녀가 만들고 싶은 브랜드 철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품질과 럭셔리함을 유지하며, 더 많은 고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죠.
특히 당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일터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토리는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경쾌하면서도 시크한 느낌의 디자인을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컨셉을 바탕으로 토리는 이전 직장 동료들과 디자이너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토리버치만의 디자인을 완성시켜 나갔습니다.
토리는 당시 본인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남편 크리스, 그리고 랄프 로렌에서 함께 일했던 피오나 코터라는 동료와 함께 첫 사업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크리스와 함께 초기 투자 자금을 마련한 토리는 홍콩에 오피스를 구해 브랜딩과 제품 제작을 위한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죠.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한다는 토리의 철학은, 백화점과 같은 도매 납품이 아닌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소매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소량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파트너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래서 토리는 수많은 공장을 찾아다니며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파트너로서 어떻게 함께 성장해갈 수 있을지 설득했다고 합니다.
사실 소매 판매는 당시 사람들이 토리에게 조언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패션계에서 수년 간 쌓아온 경험과 인맥을 활용하면 백화점 납품 등을 통해 더 빠르고 크게 브랜드를 키울 수 있었죠. 하지만 토리는 유명하고 잘 팔리는 브랜드가 아닌, 그녀의 철학을 담은 특별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빠른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항상 인내심을 가진 브랜드가 되고 싶었습니다. 가장 큰 브랜드가 되는 것에서 영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가장 특별한 브랜드가 되고 싶었어요. 저는 이게 우리 회사 전체가 갖고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 Editor’s Note: 아이데이션을 위해 예전 패션 브랜드들을 담은 스크랩북을 만들던 토리는, 1960년대 어머니가 즐겨 입었던 브랜드인 ‘잭스’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90세였던 잭스의 설립자 샐리 핸슨(Sally Hanson)에게 연락했지만 전화를 건지 20초만에 단호하게 거절당했다고.
홍콩에서 브랜드의 기반을 다진 토리는 팀원들과 함께 토트백, 수영복, 스웨터 등 다양한 제품들을 디자인하며 세상에 토리버치를 내보일 준비를 마칩니다. 처음에는 온라인 판매를 먼저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뉴욕의 트라이베카라는 동네에서 임대료가 매우 저렴한 곳을 찾았고 2004년 뉴욕 패션 위크 기간에 맞춰 첫 매장을 오픈했죠.
토리는 자신의 첫 컬렉션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만나 제품의 디자인과 디테일에 집중하였고, 아시아에서 저렴한 제조 비용으로 생산한 덕분에 가격 대비 고품질의 상품을 만들 수 있었죠. 그렇게 토리버치는 첫 매장 오픈 후 며칠 동안 모든 제품을 매진시키며 대박을 터뜨리게 됩니다.
한편 뉴욕 타임즈에서는 성공적으로 브랜드를 런칭한 토리를 ‘야망이 있다’고 묘사했는데, 그녀는 이 ‘야망’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당시 여성이 야망을 품는 것이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던 토리는, 사업을 하는 친구로부터 “야망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되는데요.
그 말을 듣자 토리는 본인이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스스로의 야망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단어를 기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한 ‘야망을 품어라(Embrace Ambition)’ 캠페인을 진행한 최근 토리의 모습은 이때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죠.
당시 토리가 품었던 야망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섯 아이들의 육아와 막 런칭한 브랜드 사업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밤을 새워 일해도 시간이 모자랐죠. 집에서 꼼짝을 못하던 토리 때문에 열댓 명 정도의 토리버치 직원들은 그녀의 집에서 함께 재택 근무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토리와 직원들의 열정 덕분이었을까요. 얼마 후 뉴욕의 유서깊은 백화점인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으로부터 토리버치 제품을 판매하고 싶다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토리의 집에 방문하여 두 개의 선반과 액세서리를 보고 갔죠. 이렇게 시작된 첫 백화점 납품은 이후 18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런칭 다음 해인 2005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게 된 토리는 더욱 유명세를 얻게 되었고, 2년 만에 800만 명의 브랜드 웹사이트 방문자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어갑니다.
📒 Editor’s Note: 본인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토리는 처음에 ‘토리 바이 티알비(Tory by TRB)’라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런칭했다. 하지만 토리가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토리 버치’라는 이름을 더 많이 기억하게 되자, 결국 토리버치로 브랜드명을 변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선입견과 가십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힘
이처럼 승승장구하며 첫 사업에서 대박을 터뜨린 토리에게도 위기와 시련은 있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이미 패션계에서 유명 인사였던 토리가 브랜드를 런칭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죠.
그들은 토리의 사업을 ‘사교계 사람들의 브랜드’, ‘허영심 프로젝트’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에게 사무실에서 일을 하냐고 묻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하루 13시간 넘게 일하며 사업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토리에게는 이런 말들이 꽤나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들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토리는 그럴 때마다 “부정적인 말은 소음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아라. 이것은 롤러코스터가 될 것이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겼죠.
토리버치는 토리와 크리스에게도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시작한 큰 모험이었고,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원색적인 비난은 듣지도 읽지도 않고, 그저 자신을 믿고 묵묵히 계속 나아갔다고 합니다.
2006년 토리의 어머니 이름을 딴 플랫 슈즈 ‘리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토리버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지만 같은 해 토리는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남편이었던 크리스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요.
패션계 유명 인사였던 토리와 크리스의 이혼 소식은 언론의 먹잇감이 되었고, 여섯 아이들의 부모로서 자신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싶었던 토리에게는 자신의 사생활이 가십거리가 되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크리스와의 이혼 다음 해에는 토리가 늘 믿고 의지했던 아버지마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면서, 토리는 개인적으로도 사업적으로도 굉장히 큰 변화와 아픔을 겪어야 했죠.
한편 토리와의 이혼 후에도 크리스는 토리버치의 많은 지분을 소유한 채 이사회의 임원으로 남아 있었는데요. 그는 2011년 토리버치와 굉장히 유사한 디자인과 컨셉의 ‘C Wonder’라는 의류 브랜드를 런칭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독점 정보를 악용하여 토리와 이사회를 고소하려 시도하는 등 토리버치를 공격하는 행보를 보이죠.
토리 역시 이에 대응해 소송을 준비했지만, 그들은 다행히 법정까지 가지 않고 합의를 이루게 됩니다. 기나긴 설득 끝에 크리스는 자신이 보유한 토리버치의 지분을 매각했고, 결국 브랜드에 큰 타격 없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죠.
📒 Editor’s Note: 굉장히 가정적이고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토리에게는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내면의 힘과 용기를 얻어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크리스와의 이혼 후에는 오빠인 로버트와 함께 회사를 운영했는데, 토리보다 아홉살이 많았던 로버트는 그녀에게 두 번째 아버지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가족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선입견을 딛고 묵묵히 본인의 길을 걸어왔고, 이혼 후 찾아온 힘든 시기 또한 단단한 내면의 힘으로 극복해낸 토리. 이제 토리버치는 그녀가 지향해온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고품질의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죠.
약 10년 전 54개의 매장을 오픈한 토리버치는 현재 전 세계에서 370개에 달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토리는 억만장자가 된 여성 부호이자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현재 토리버치의 CEO 자리는 그녀의 새 남편이자 전 LVMH 패션 부문 CEO였던 피에르 이브 러셀이 맡고 있는데요. 토리는 2018년도부터 디자이너로서 사업에 전념하며 여전히 그녀의 100%를 쏟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토리버치만의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맞게 진화해가기 위해 제품 개발 및 디자인에 매진하고 있죠.
한때 ‘야망’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했던 여성 사업가 토리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꿈꿔왔던 재단 설립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 야망 있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009년 설립된 토리버치 재단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파트너십을 맺어 여성들에게 더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야망을 품어라 (Embrace Ambition)’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잠재력 있는 여성 사업가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초창기에는 제가 재단을 설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습니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글로벌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죠. 사업과 자선 활동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것을 보면 너무나 기쁩니다.”
💬 “저는 어떻게 하면 럭셔리 렌즈를 통해 바라보되, 더 많은 고객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비자 직판이라는 아이디어의 시작이었죠.” - 토리 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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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들 때문에 위축되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러한 말들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브랜드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반대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새롭게 변화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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