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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학이 유행하는 이유

〈철학의 귀환〉

1. 요즘 뉴스를 보면 컴퓨터공학보다 철학과 경쟁률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돈다.

2. AI가 코딩과 문서 작성을 대신하면서, 정답을 만드는 능력보다 무엇을 물을지 정하고 그 답을 믿어도 될지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AI의 아첨 성향이나 윤리 문제도 결국 사람 몫이다. 앤스로픽에는 AI가 지킬 원칙을 문서로 정리해 훈련에 반영하는 철학 박사 출신 연구자가 있다.

3. 《사고외주》나, 조승연 작가와 장동선 박사가 나눈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AI 사용 자체가 아니라 생각을 연습할 과정까지 넘기는 것이다. 브라운대에선 AI로 에세이를 쓴 학생들에게 교수가 직접 시험을 보게 했더니 점수가 떨어졌다고 한다.

4. 인스타 짤도 마찬가지다. 요즘 신입이 이메일 작성뿐만 아니라, 사내 안건 리서치와 검토까지 AI에 맡긴 뒤, 말투도 안 고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올려서, 선임이 더블체크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든다고 한다.

5. 근데 철학의 귀환을 AI의 반작용으로만 보면 안 된다. 철학 붐은 챗GPT(2022년 11월)보다 먼저 시작됐다.

6. 철학·인생론형 베스트셀러의 계보를 보면 흐름이 보인다. 2010년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고, 2015년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었다.

7. 코로나 이후 철학은 삶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죽음과 고립이 일상이 되자 "어떻게 성공할까"보다 "뜻대로 안 되는 삶에서 어떻게 안 무너질까"가 핵심이 됐다. 2021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로 장르 전체가 반등했다.

8. 그 흐름이 2023년 11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서 터졌다. 2024년 상반기 철학서 판매는 43.1%, 서양철학은 125.8% 늘었고, 이 책 구매자의 43.6%가 40대였다.

9. 핵심은 '마흔'이다. 취업, 결혼, 육아, 승진이라는 과제를 다 통과하고도 삶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걸 분명히 마주하는 시기.

10. 요즘 '유년기의 미해결 과제를 풀지 않으면 40대에 무너진다'는 포스팅이 유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젊을 때 일중독과 완벽주의로 눌러둔 트라우마가 육아와 관계 갈등, 체력 저하와 함께 되돌아온다는 것.

11. 쇼펜하우어는 이 세대에 낙관을 강요하지 않는다. 삶에는 고통이 있고 욕망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고통을 직면해 극복하라는 건 니체 쪽이고, 쇼펜하우어는 반대로 기대부터 줄이라고 했다. 대신 고독과 거리 두기, 독서와 사색을 권한다.

12. '나 홀로 여행', '혼자여도 괜찮아', '손절' 같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인 가구에게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멘탈 관리의 언어가 됐다.

13. 흐름은 스토아 쪽으로 넘어갔다. 오늘 9월 2일 교보문고 인문 1위는 《세네카, 오늘을 빼앗기고 있는 당신에게》다.

14. (물론 이 책은 유튜버 하와이 대저택이 엮은 편역서다. 철학은 책보다 유튜브에서 먼저 돈다. 쇼펜하우어도 출간 전에 관련 영상 조회수가 이미 수십만이었다.)

15. 실리콘밸리는 한국보다 일찍 스토아를 경영 철학으로 끌어다 썼고, 작가 팀 페리스(2017~)가 이를 대중화했다. 핵심은 통제 가능한 것과 통제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라는 것.

16. 경제 위기, 전염병, 전쟁, 기후 재난은 개인이 못 바꾼다. 반면 운동, 일기, 청소, 독서처럼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은 통제 가능하다. 코로나 때 미라클 모닝과 갓생도 통제감 회복의 생활 버전이었다. 인스타만 봐도 동기부여 글귀에 '통제'라는 키워드가 반복된다.

17. 참고로 직장인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통제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요즘 2030, 4050 콘텐츠에 자주 보이는 번아웃과 무기력도 업무량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18. 일에서 느끼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좌절될 때 사람은 무너진다. 결정 권한도 없고 잘한다는 감각도 없는데, 회의와 전시성 업무만 쌓이면 "내 일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19. 철학은 여기서 나를 점검하고, 일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한다.

20. 다만 순수 철학의 부활이라기보단, '마흔에 읽는', '하루 한 문장', '인생 수업' 같은 제목처럼 자기계발서에 지친 사람들이 멘탈 관리 측면에서 철학으로 옮겨간 측면이 크다.

21. AI 때문에 질문하는 능력과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도 맞다. 다만 그보다는, 뭐가 뭔지 모르게 흘러가는 삶에서 기준을 잡아줄 지침서로서 철학이 대중화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22. 브이로그에서 《명상록》 같은 철학서를 읽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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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힘찬 채널 피보터 · 콘텐츠 크리에이터

데이터와 콘텐츠로, 죽은 채널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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