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브랜드 '가히(KAHI)'의 상표권자인 회사가 식이보충제에 등록된 타인의 상표 'KAHI'를 무효로 해 달라고 낸 사건에서, 특허법원이 2026년 4월 23일 화장품 회사의 청구를 받아들였다(특허법원 2026. 4. 23. 선고 2025허10516 판결). 앞서 특허심판원은 화장품과 식이보충제가 유사한 상품이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이 청구를 기각했는데, 특허법원이 그 심결(특허심판원의 결정)을 취소한 것이다. 특허법원은 이 판결을 2026년 10월 2일 주요판결로 공개했다.
화장품에서 출발한 브랜드가 먹는 제품이나 미용 기기로 영역을 넓히는 일은 이제 흔하다. 이 판결은 넓히려는 상품에 같은 이름의 상표가 먼저 등록되어 있을 때 상표등록 무효심판에서 어떤 조항을 주장할 수 있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화장품에 등록한 상표로는 식이보충제 출원을 막지 못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화장품 회사는 한글 '가히'를 2019년 10월에, 영문 'KAHI'를 2021년 1월에 각각 제3류 화장품을 지정해 출원했고 두 상표 모두 등록받았다(등록 제1656598호, 제1739232호). 제품은 2020년 4월경부터 스틱밤, 선크림, 클렌징폼, 마스크 등으로 판매됐다.
2021년 5월 18일, 한 개인이 'KAHI'를 제5류에 출원했다. 등록된 지정상품은 식이보충제와 건강기능식품 등 15개이고 '미용효과가 있는 식이보충제'도 들어 있다. 이 출원은 출원공고 뒤 제기된 이의신청을 거쳐 2023년 12월 15일 등록결정을 받았고 2024년 1월 4일 등록됐다(등록 제2135127호).

여기서 자주 생기는 오해가 있다. 브랜드 이름을 상표로 등록해 두었으니 같은 이름은 누구도 등록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상표법이 먼저 출원된 타인의 등록상표를 이유로 뒤의 출원을 막는 것은 표장이 같거나 비슷하고 지정상품도 같거나 비슷한 경우다(상표법 제34조 제1항 제7호). 이 사건에서 특허심판원은 두 표장이 유사하다고 보면서도 지정상품이 유사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조항의 적용을 부정했다. 특허법원도 화장품과 식이보충제가 "용도나 형상 등의 차이로 인해 동일 또는 유사하다고 보기 어렵기는 하다"고 적었다.
법원은 인지도와 표장, 두 상품의 거리를 함께 보았다
특허법원이 적용한 것은 수요자를 기만할 염려가 있는 상표의 등록을 막는 조항이다(상표법 제34조 제1항 제12호 후단). 대법원은 같은 내용의 조항에 관해, 먼저 쓰인 상표가 저명한 정도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수요자가 특정인의 상표로 인식할 만큼 알려져 있고, 유사한 상품에 쓰인 경우에 못지않게 그 사람이 쓰는 것으로 오인될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상품이 유사하지 않아도 이 조항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왔다(대법원 1999. 2. 26. 선고 97후3975, 3982 판결). 특허심판원은 화장품과 식이보충제 사이의 경제적 견련관계(두 상품이 거래에서 서로 이어져 있는 정도)가 밀접하지 않다고 보아 이 조항도 적용하지 않았고, 특허법원은 이 부분을 달리 판단했다.
법원은 먼저 '가히'가 화장품 회사의 상표로 얼마나 알려져 있었는지를 확인했다. 판결문에는 제품이 출시 1년 6개월여 만에 1,000만 개 이상 판매된 사실, 그 매출이 회사의 2021년 매출 2,500억 원 가운데 80% 정도를 차지한 사실, 2021년 한 해 광고선전비로 약 496억 원을 쓴 사실, 25편의 드라마에 간접광고로 노출된 사실, 화장품 브랜드 평판 분석에서 1위와 2위에 오른 사실이 적혀 있다.
이어서 법원은 식이보충제에 등록된 'KAHI'가 화장품 회사의 영문 상표와 글자체만 다를 뿐 실질적으로 같은 표장이라는 점을 들었다. 화장품과 식이보충제가 수요자의 눈에 얼마나 가까운 상품인지도 따졌다. 법원은 두 상품이 "건강의 유지 또는 증진이나 미용 목적으로 인체에 직접 적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보았다. 화장품 회사들이 식이보충제를 함께 생산하고 판매하는 경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 두 상품이 인터넷 쇼핑몰과 드럭스토어에서 함께 팔리기도 한다는 점, 비타민, 미네랄, 콜라겐 같은 성분이 양쪽에 함께 쓰일 수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이 사정들을 종합하면 식이보충제에 붙은 'KAHI'를 본 수요자가 화장품 회사의 제품으로 오인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 법원의 결론이다.
화장품 회사는 상대가 부정한 목적으로 출원했다는 주장도 함께 했고(같은 항 제13호), 출원인은 이 표장이 자신이 활동하며 써 온 이름을 표시한 것이라고 다투었다. 법원은 수요자가 출처를 혼동할 염려를 묻는 제12호 후단만으로 결론을 내고, 부정한 목적이 있었는지를 비롯한 나머지 주장은 판단하지 않았다.
인지도를 재는 기준일은 상대 상표의 등록결정일이었다
상표법은 등록을 막는 사유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할지를 정해 두었고, 이 사건에서는 그 시점이 인지도를 뒷받침할 자료의 범위를 정했다. 원칙은 등록 여부를 결정하는 때이고, 저명상표 조항(제11호)과 부정한 목적 조항(제13호)을 비롯한 몇몇 사유만 출원한 때를 기준으로 한다(상표법 제34조 제2항). 수요자 기만을 다루는 제12호는 원칙에 따라 등록결정 시가 기준이다. 대법원도 먼저 쓰인 상표가 얼마나 알려졌는지는 뒤에 출원된 상표의 등록결정 시를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대법원 2020. 9. 3. 선고 2019후11688 판결).
이 사건에서 상대의 출원일은 2021년 5월 18일이고 등록결정일은 2023년 12월 15일이다. 화장품 회사가 함께 주장한 제11호와 제13호는 출원일 당시의 사정으로 판단받는 조항이고, 특허심판원은 '가히'가 출원 당시 저명상표였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제12호 후단에서는 출원 뒤 약 2년 7개월 동안 쌓인 판매와 광고 실적까지 판단 자료에 들어갔다. 법원은 화장품 회사의 상표가 "늦어도" 등록결정일 무렵에는 수요자에게 그 회사의 상표로 인식됐다고 보았다.

같은 재판부가 약 두 달 뒤 선고한 '우루액' 사건은 출원 시를 기준으로 하는 제11호가 적용된 경우다(특허법원 2026. 6. 18. 선고 2026허10010 판결). 저명한 타인의 상품이나 영업과 혼동을 일으키거나 그 식별력 또는 명성을 손상할 염려가 있는 상표는 상품이 달라도 등록받지 못한다. 1961년부터 간기능 개선제에 쓰여 온 '우루사'와 요부(상표에서 출처를 구별해 주는 중심 부분)가 같은 '우루액'이 제32류 음료에 등록되어 있었다. 법원은 '우루사'가 '우루액'의 출원일 무렵 이미 저명했다고 보아 혼동의 염려와 식별력 손상의 염려를 모두 인정했다.

두 사건은 상품이 유사하지 않을 때 주장할 수 있는 조항이 둘이고 요건과 기준일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상대의 출원일에 이미 저명했던 상표는 제11호를 주장할 수 있다.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한 상표는 제12호 후단에 따라, 상대의 등록결정일까지 특정인의 상표로 인식될 만큼 알려졌다는 점과 두 상품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함께 증명해야 한다.
확장할 상품은 인지도가 쌓이기 전에 지정해 둔다
화장품 회사가 무효심판을 청구한 것은 2024년 11월 13일이다. 특허심판원의 기각 심결이 2025년 7월 30일에 나왔고, 청구부터 특허법원 판결까지 약 1년 5개월이 걸렸다. 판결이 확정되면 사건은 특허심판원으로 돌아가 다시 심리된다. 법원이 제12호 후단을 적용한 근거에는 1,000만 개 이상의 판매 실적과 한 해 약 496억 원의 광고선전비가 들어 있다.
이제 막 성장하는 브랜드는 제12호 후단에 기대기 어렵다. 인지도를 증명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출원을 막을 수 있는 범위는 등록상표의 지정상품과 그에 유사한 상품까지다. 브랜드 확장 계획이 있다면 그 상품을 처음 출원할 때 함께 지정하거나 계획이 구체화되는 시점에 추가로 출원해 두어야 한다. 화장품 브랜드라면 식이보충제와 건강기능식품, 미용 기기, 화장 도구가 먼저 검토할 범위다.
자사 브랜드와 같은 이름이 다른 상품에 출원되는지를 정기적으로 살펴보면 등록 뒤의 무효심판보다 이른 단계에서 정보제공(심사관에게 거절 이유를 알리는 절차)이나 이의신청으로 다툴 수 있다. 어느 단계에서 다투든 인지도를 보여 줄 자료가 필요하다. 이 판결에서 법원이 인지도의 근거로 든 판매량, 매출 비중, 광고선전비, 매체 노출 자료를 연도별로 정리해 두면 그대로 증거가 된다.
당신의 브랜드가 다음에 내놓을 제품은 지금 가진 등록상표의 지정상품 안에 들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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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태균 파트너변리사는 BLT 전략본부장으로 스타트업들의 IP전략, BM전략, 시장진출(GTM) 전략 수립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2011년 48기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현재 여러 분야의 스타트업의 IP(특허, 상표, 디자인)업무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에 참여하여 성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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