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한 성공은 영혼을 매너리즘에 가둔다. 내가 가진 기술과 자본은 가장 병들고 가난한 동포들의 고통을 향해야 한다."
1926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아시아 식품 회사 '라초이(La Choy Food Products)'의 성공으로 20대의 어린 나이에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한 청년 사업가가 자신의 동업자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회사 지분을 모두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가겠소."
미국 전역의 대형 마트에 입점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가던 회사, 부귀영화와 안락함이 보장된 미국 엘리트의 삶. 타국에서 동포들이 손가락질받을 때 밤낮없이 일구어낸 그 경이로운 부를 손에 쥔 채, 그는 미련 없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일제 치하의 비참하고 가난한 고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박사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창업가들이 "어떻게 하면 회사를 키워 엑시트(Exit)하고 개인의 부를 극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유일한은 100년 전 "어떻게 하면 내가 얻은 부와 기술로 동포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것인가?"를 질문했습니다.
"나는 정직이 비즈니스에서 가장 강력하고 이윤이 남는 전략임을 확신합니다. 거짓은 단기적 이익을 주지만, 정직은 거대한 신뢰 자본을 만듭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킨 유명인들의 인사이트를 다룹니다.
장소 1. 14세 소년의 자립과 국가관이 벼려진 곳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 한인소년병학교)

1904년, 불과 9세의 나이에 유일한(본명 유형형)은 대한제국 순무공사 유길준의 권유를 받은 아버지 유일선에 의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어린 소년이 태평양을 건너 도달한 곳은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였습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한 14세의 유일한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고, 밤과 주말에는 샌들과 군복을 입고 목총을 들며 무관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동포들이 타국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할 때, 그는 농장 노동과 군사 훈련을 통해 압도적인 자립심과 국가관을 뼈에 새겼습니다. 이후 그는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해 고학으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 세계적인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입사하여 엘리트 회사원으로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 장소에서 그가 배운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받는 인정과 개인의 안락함은 조국이 없으면 모래성에 불과하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는 타인을 구원할 수 없다."
장소 2. 억만장자의 안락을 뒤로하고 냅킨을 접은 곳 (1922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라초이 Food Products')

GE를 퇴사한 유일한은 1922년, 미시간 대학교 대학 동창인 중국인 파울 파이 조(Paul P. Chow)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 '라초이(La Choy Food Products)'를 공동 창업했습니다.
당시 미국 내 아시아 음식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간파한 그는, 쉽게 부패하는 숙주나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유리병 용기를 개발하고 통조림 공정을 혁신했습니다. 라초이는 출범 직후 미국 전역의 대형 마트에 입점하며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유일한은 20대의 어린 나이에 미국 사회에서 손꼽히는 청년 사업가이자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미국 사회의 정점에 섰지만, 그에게 부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민족의 생존에 이바지하기 위해 라초이의 모든 지분을 매각하고 거대한 자본을 현금화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그가 배운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사업의 목적은 단순히 부를 쌓는 것이 아니다. 거둔 부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답변이 없다면 성공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장소 3. 버드나무 정신의 씨앗이 심겨진 곳 (1925년 미국 필라델피아 서재필 박사와의 만남)

귀국을 앞둔 1925년, 유일한은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의 대부 서재필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의사였던 서재필 박사는 고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려는 청년 유일한에게 뼈있는 조언을 건넸습니다. "한국인은 지금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네.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네."
서재필 박사는 그에게 굵은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하며 말했습니다.
"버드나무는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뿌리를 깊이 내리고 꺾이지 않는다. 그늘을 만들어 지친 나그네를 쉬게 해주는 버드나무처럼, 민중의 그늘이 되는 기업을 만들어라."
이 장소에서 그가 배운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기업가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민중의 안식처가 되고 생명을 살리는 그늘을 만들어내는 자다."
장소 4. 민중의 약 안티푸라민이 탄생한 곳 (1926년 서울 종로 2가 유한양행 첫 사옥)

1926년 12월 10일, 서울 종로 2가 33번지. 유일한은 자신의 이름과 '천하가 다 함께 평화롭다'는 뜻을 담아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길거리에는 가짜 약과 불량 의약품이 판쳤고, 소염진통제나 기초 위생용품조차 없어 가벼운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 민중이 태반이었습니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들여온 결핵약, 소독제, 위생용품을 정직한 정가에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 의사 출신 아내 호미리 여사와의 연구 끝에 온 국민의 상비약이 될 자체 개발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Antiphlamine)'을 출시했습니다. 만병통치약처럼 얇은 주머니 사정의 민중들에게 퍼져나간 안티푸라민은 유한양행을 민족의 신뢰 기업으로 올보듬었습니다.
이 장소에서 그가 배운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화려한 마케팅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의 가장 깊은 고통(Pain Point)을 치료하는 본질적 제품이다. 그 진정성이 기업의 영속성을 결정한다."
장소 5. 한국 의약품 국산화의 전초기지 (1936년 부천 소사 제약공장)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로 체제를 전환하고 경기도 부천 소사에 대규모 현대식 제약공장을 건립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약품을 수입에 의존하던 조선에서, 소사공장은 한국 최초로 현대적 제약 설비를 갖추고 의약품 국산화를 주도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공장 주변에 푸른 나무와 장미 정원을 조성하고, 최신 위생 시설과 직원용 사택, 도서관, 운동장을 갖추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근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노동자를 부품이 아닌 기업의 동업자로 보았으며, 1936년 한국 기업 최초로 직원들에게 주식을 분배하는 주식상여제(스톡옵션의 원형)를 도입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그가 배운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기업의 진짜 성장은 공장의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존엄과 주인 의식에서 시작된다."
Epilogue: 안락함을 버릴 때 진짜 독점이 시작된다
미국의 억만장자라는 안락한 삶과 보장된 미래를 마다하고, 벼랑 끝 일제 치하의 조선으로 돌아왔던 20대 청년 유일한.
그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트랙에서 기득권을 누리기보다, 가장 고통받는 민중의 삶속으로 들어가 본질적인 제품(안티푸라민)과 정직한 시스템을 만드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안락함을 스스로 깨뜨리고 본질을 향해 뛰어들 때, 비로소 거대 자본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독보적인 가치와 영혼이 시작됩니다. 오늘 당신이 지키려 애쓰던 안락한 기득권을 내려놓고, 진짜 풀어야 할 본질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딛어보시기 바랍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킨 유명인들의 인사이트를 다룹니다.
※ 본 뉴스레터 Part 1의 사실관계는 유일한 박사의 1895년 평양 출생, 1904년 미국 유학, 1909년 네브래스카 한인소년병학교 입학,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및 GE 입사, 1922년 라초이(La Choy) 통조림 회사 창업 및 성공, 1925년 서재필 박사와의 만남, 1926년 유한양행 설립, 1933년 안티푸라민 개발, 1936년 부천 소사 제약공장 건립 및 종업원 주유제 실시 등 역사 사료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