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전략 #프로덕트 #마인드셋
제품이 고객에게 닿기까지, '멋진 기술'보다 중요한 것

데이제로인사이트

격주 목요일, 창업가들의 인사이트를 메일로 전해드립니다.
창업가들의 Day 0로 돌아가, 그들의 ‘처음’에 담긴 고민과 배움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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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에서 겪은 가장 나쁘고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유리를 씹는 기분이었어요. 다음 달은커녕 다음 주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 켈러 클리프턴

투자자 대부분이 "저 회사는 그냥 죽었다"고 판단하던 시절, 창업자 켈러 클리프턴(Keller Cliffton)*의 회고입니다.

그 회사는 지금 르완다의 산모에게 수혈용 혈액을, 미국 교외의 가정집 앞마당에 월마트 주문을 하늘에서 내려놓는 드론 물류 기업 짚라인(Zipline)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4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물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창업 스토리에서 이런 시기는 대개 "버텼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오늘 데이제로 인사이트가 켈러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었던 이유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회사가 죽었다고 여겨지던 시기에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을 따라가 보면, 근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구체적인 선택들이 남아 있거든요. 다음 문을 찾기 전에 지금의 문을 닫는 선택, 확신을 얻으러가 아니라 자기 아이디어를 부수러 현장에 가는 선택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드론도, 아프리카도 아니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조종하는 장난감 로봇이었죠. 오늘은 짚라인을 만든 켈러 클리프턴의 Day 0로 돌아가봅니다.

*켈러 클리프턴: 자료에 따라 '켈러 리나우도(Keller Rinaudo)'로도 표기된다. 결혼 후 아내의 성을 이름에 더해 켈러 리나우도 클리프턴이 되었다.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제품은 팔렸는데 왜 사업이 되지 않았을까
2. 아이디어를 부수려 할수록 단단해진 확신
3. 모든 걸 하겠다는 제안이 거절당한 이유
4. 비행체는 문제의 15%에 불과했다

 

1. 제품은 팔렸는데 왜 사업이 되지 않았을까

켈러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창업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를 바꾼 것은 자포스(Zappos) CEO 토니 셰이(Tony Hsieh)가 쓴 '딜리버링 해피니스(Delivering Happiness)'*였습니다. 다만 켈러를 움직인 것은 책의 내용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자인 토니와 그의 동업자 앨프리드 린(Alfred Lin)이 자신과 같은 대학 기숙사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죠.

*딜리버링 해피니스: 온라인 신발 쇼핑몰 자포스를 창업해 2009년 아마존에 약 12억 달러에 매각한 토니 셰이가 2010년 펴낸 책. 회사를 키운 과정과 '행복'을 조직의 목표로 삼은 경영 철학을 담았다.

"완전히 맨땅에서 그렇게 멋진 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보게 된 거예요. 그게 제 인생으로 무엇을 할지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졸업 2년 차인 2011년, 켈러와 친구들은 로봇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아이폰 위에 올릴 앱을 고민할 때, 이들은 아이폰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카메라, 센서, 프로세서. 로봇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부품들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이들은 '로보틱스계의 애플'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그때 로봇 회사를 차린다는 건, 켈러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멍청한 생각"이었습니다. 로보틱스에 투자하는 곳 자체가 없어 돈을 구할 길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켈러는 책의 저자 토니 셰이에게 무작정 연락을 넣었고, 토니는 라스베이거스의 아파트를 내주며 여기서 회사를 만들어보라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로모티브(Romotive)의 첫 제품은 스마트폰을 얼굴처럼 끼워 조종하는 로봇 장난감 '로모(Romo)'였습니다. 2012년 10월에는 토니가 소개해준 세쿼이아캐피털의 앨프리드 린이 500만 달러(약 7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주도합니다.

스마트폰을 얼굴 삼아 움직이는 로모티브의 로봇 장난감 '로모' (출처: Romotive 킥스타터 캠페인 페이지)
스마트폰을 얼굴 삼아 움직이는 로모티브의 로봇 장난감 '로모' (출처: Romotive 킥스타터 캠페인 페이지)

📒 Editor’s Note:

스물세 살의 켈러가 한 일을 정리하면 이렇다. 인생을 바꾼 책의 저자에게 그냥 연락한다. 그 저자는 마침 자포스의 CEO다. 그런데 그가 라스베이거스의 아파트를 내주고, 세쿼이아 파트너인 옛 동료까지 소개해준다.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은 이야기지만, 그 시작은 결국 '연락해본 것'이었다고. 스물세 살의 무모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품은 팔렸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죠. 투자자 앨프리드 린이 지켜본 로모의 궤적은 이랬습니다. 사람들은 제품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지만, 24시간에서 2주 사이에 로봇을 선반에 올려놓고는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큰 사업이 되는 그림이 보이지 않았죠. 켈러 본인의 진단은 더 냉정했습니다.

"우리는 지독하게 순진했습니다. 스물세 살에 '로봇 만들면 멋지지 않을까, 이걸 사업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보자'고 생각한 거죠. 팀에 딱히 전문성이라고 할 게 없었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돌아보면 출발점 자체에 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폰 안에 로봇의 부품이 있다는 관찰은 정확했습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었지, '누가 이것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팀에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을 뿐, 반드시 풀어야 할 남의 문제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켈러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이건 우리가 되고자 했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앨프리드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게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나요?" 켈러는 한편으로 무너진 채,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그 방을 나왔습니다.

 

💡 Insight Note

로모티브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출발했다. 아이폰 안을 들여다본 관찰은 정확했지만, 그것은 능력에 대한 답이었지 필요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판매량은 우리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재사용률은 고객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지금 보고 계신 지표는 둘 중 무엇을 증명하고 있나요?

 

2. 아이디어를 부수려 할수록 단단해진 확신

켈러와 두 공동창업자, 소프트웨어를 맡은 라이언 옥슨혼(Ryan Oxenhorn)과 훗날 CTO가 되는 키넌 와이로벡(Keenan Wyrobek)은 대부분의 회사가 하지 않는 순서를 택합니다. 라이언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에 어떤 문을 열지 알기도 전에" 장난감 회사라는 문부터 완전히 닫아버린 겁니다.

빈손이 되자 질문은 오히려 단순해졌습니다. 다음 문제를 고르며 세운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이 문제들 중 어떤 것이, 풀리지 않은 채 남으면 인류에게 정말 나쁜 일인가.

힌트는 뜻밖의 곳에서 왔습니다. 전염병학자인 키넌의 아내는, 공중보건 프로젝트가 번번이 물류에서 막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백신도 있고 의사도 있는데, 정작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곳으로 옮기지 못해 프로젝트 전체가 죽는다는 것이었죠.

"세계 물류는 상위 10억 명만 제대로 서비스하는 시장입니다. 나머지 70억 명에게 접근성은 형편없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그 결과 매년 수백만 명이, 주로 아이들이 기본적인 의약품에 닿지 못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년 동안 그게 왜 어려운지 변명만 해왔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다만 키넌이 이 아이디어를 검증한 방식은 특이했습니다. 스스로를 "엄청난 기술 회의론자"라고 부르는 그는, 확신을 얻으러 현장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가서 우리가 이 문제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백만 가지 이유를 이해하고 오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실제로 이걸 풀 수 있고 풀어야 한다는 확신이 오히려 커졌습니다."

- 키넌 와이로벡

확신이 커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침 기술이 실험실 밖으로 막 걸어 나온 시점이었거든요. 아마존이 드론 배송을 예고했고, 2013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의 공원에서는 드론을 날리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안 되는 이유를 찾으러 간 자리에서 이들이 발견한 것은, 이제 막 가능해진 조건들이었습니다.

짚라인 공동창업자 켈러 클리프턴(왼쪽)과 키넌 와이로벡(오른쪽) (출처: Zipline)
짚라인 공동창업자 켈러 클리프턴(왼쪽)과 키넌 와이로벡(오른쪽) (출처: Zipline)

투자자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켈러의 표현으로는 "모든 투자자가 물류에 집중하는 건 극도로 멍청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앨프리드 린도 이 아이디어가 "괴상하게(kooky)" 들렸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그의 반박에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배송은 규모가 작을 때 단가가 높으니, 초기에 성립하는 건 값비싼 물건을 나르는 경우뿐이라는 것이었죠. 켈러는 그 지적을 받아들여 더 괴상한 아이디어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헬스케어 물류,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시작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당신은 드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헬스케어 물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도로 인프라가 열악한 아프리카 국가를 찾아서 거기서 날리겠다니."

- 앨프리드 린

 

기체를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답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반복해서 들은 말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 지역 최대 도시에서 1킬로미터라도 더 멀리 나갈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가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업에서 실제로 팔리는 것은 배송이 아니라 '거리'였던 겁니다. 그러자 기준이 하나로 정리됩니다. 같은 배터리로 가장 멀리 가는 기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은 업계의 상식과 정반대였습니다. 당시 '드론'이라고 하면 프로펠러 네 개로 제자리에서 뜨고 내리는 쿼드콥터(quadcopter)*를 뜻했는데, 쿼드콥터는 나는 내내 자기 무게를 프로펠러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반면 비행기는 날개가 뜨는 힘을 만들어주니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동력을 쓰면 되죠. 팀이 추정한 작은 비행기의 항속거리는 쿼드콥터의 10배에서 30배였습니다.

*쿼드콥터: 프로펠러 네 개의 회전력만으로 수직 이착륙하는 드론. 제자리 비행과 정밀한 조작이 가능해 촬영이나 측량에 널리 쓰인다.

라이언조차 처음에는 "비행기로 대체 어떻게 배달을 한다는 거지?" 싶었지만, 며칠간 화이트보드 앞에서 따져본 뒤 생각을 바꿉니다. "돌아보면 너무 당연한 결론이었죠."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일부 투자자를 포함해 모두가 "비행기는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자금 조달은 극도로 어려웠고, 이 시기를 통과한 방법은 정교한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운이 좋아야 했고, 우리가 그냥 완전히 고집스럽고 막무가내여서 '우린 이걸 한다,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고 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이제 필요한 것은 이 무모한 비전에 돈을 걸어줄 첫 고객이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는 없었죠.

 

💡 Insight Note

되는 이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키넌은 반대로 이 아이디어가 안 되는 백만 가지 이유를 찾으러 현장에 갔고, 끝내 그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 남은 것이 확신이었다.

→ 우리 아이디어가 왜 안 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을 만나보신 적 있나요?

 

3. 모든 걸 하겠다는 제안이 거절당한 이유

첫 시장의 조건은 명확했습니다. 공공 의료 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작은 나라여야 했습니다. 작은 회사가 거대하고 관료화된 정부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중미와 아프리카의 정부들을 찾아다녔지만, 켈러의 고백처럼 이들은 "정부와 인프라 계약을 어떻게 체결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여기에 지어라, 우리가 쓰고, 우리가 돈을 내겠다"고 처음으로 답해준 나라가 르완다였습니다.

짚라인이 르완다를 최적이라고 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정부가 짚라인만큼 기업가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지형입니다. 하늘에서 보면 60여 킬로미터 거리인데, 날씨에 따라 차로 3시간에서 6시간이 걸리니까요. 기존 물류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기에, 성과가 나면 부정할 수 없이 드러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보건부 장관과의 미팅에서, 켈러는 준비한 비전을 쏟아냈습니다. 자율 비행 항공기로 전국의 모든 병원과 보건소에 모든 종류의 의약품을 배송하겠다고요. 장관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켈러, 입 다무세요. 혈액만 하세요. (Keller, shut up. Just do blood.)"

- 르완다 보건부 장관

장관에게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르완다에서 수혈의 50%는 산후출혈을 겪는 산모에게, 30%는 5세 이하 아동에게 갑니다. 게다가 혈액은 물류 난이도가 극도로 높은 품목입니다. 농축적혈구, 혈소판, 혈장이 각각 보관 조건과 유효기간이 다르고, 여기에 혈액형과 RH 인자까지 갈리니까요. 나라 전체의 의약품을 하겠다는 스타트업에게, 가장 어렵고 가장 생명과 직결된 품목 하나만 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낙하산에 매단 패키지를 상공에서 떨어뜨리는 '집(Zip)'. 기체는 착륙하지 않고, 패키지만 목적지로 내려보낸다. (출처: Zipline)
낙하산에 매단 패키지를 상공에서 떨어뜨리는 '집(Zip)'. 기체는 착륙하지 않고, 패키지만 목적지로 내려보낸다. (출처: Zipline)

켈러가 그 미팅의 진짜 배경을 알게 된 것은 7년이 지나 같은 장관을 다시 만났을 때였습니다.

"켈러, 당신은 몰랐겠지만 우리가 예스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바로 그날 아침 보건부에 이메일이 한 통 돌았습니다. 수혈을 전달하는 데 아홉 시간이 걸려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산모에 대한 이메일이었어요. 이건 정말 잘못됐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오후에, 당신이 걸어 들어온 겁니다."

- 르완다 보건부 장관

투자자 대다수가 등을 돌린 시기에, 이 회사에 큰 베팅을 한 것은 르완다 정부였습니다. 대통령까지 지지에 나섰고, 21개 병원에 혈액을 배송하라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다만 이들이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르완다는 지구에서 날씨가 가장 변덕스러운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 Insight Note

장관은 켈러의 계획을 절반이 아니라 수십 분의 일로 줄였다. 그 좁힘의 근거는 시장 데이터가 아니라 그날 아침의 죽음이었다. 고객이 우리의 범위를 줄일 때, 그 뒤에는 대개 말해지지 않은 절박함이 있다.

→ 고객이 계획을 좁히려 할 때, 그것을 축소 요구로 듣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장 급한 곳을 알려주는 신호로 듣고 계신가요?

 

4. 비행체는 문제의 15%에 불과했다

르완다에서 팀을 기다린 것은 낙뢰와 폭우, 황사였습니다. 저고도 비행의 세계 최고 전문가인 NASA와 시뮬레이션까지 마치고 갔지만, 실제 산악 뇌우 속의 난류는 예상보다 10배 심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냐는 물음에 NASA는 폭풍 속에서 산 위를 저공비행한 데이터 자체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조종사에게는 자살행위고, 의료용 헬기도 50년 전에 그만둔 비행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켈러가 짚라인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는 것은 비행에 성공한 날이 아닙니다.

"비행체는 이 문제 복잡도의 15%밖에 안 된다는 걸 이해한 것. 그게 아마 우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겁니다. 국가 규모의 물류에서는 여러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이 협주해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신뢰할 수 있는 배송 서비스가 되니까요."

- 켈러 클리프턴

나머지 85%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팀은 병원이 예쁜 아이패드 화면으로 주문을 넣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가보니 병원 대부분의 구역에는 휴대전화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방금 떨어진 혈액을 어떻게 포장하고 날리고 수령하는지에 대한 표준 절차 역시 세상에 없었기에, 보건부와 함께 낙하 테스트를 반복하며 혈액이 손상되지 않는지부터 검증해야 했죠.

라이언은 이 시기 매일 밤 뇌가 녹는 느낌으로 퇴근했다고 회고합니다. 하루 열대여섯 시간을 일해도 할 일 목록은 늘어나기만 했으니까요. 기체는 이미 날고 있는데, 정작 배송은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진짜 시험대가 왔습니다. 대통령이 국제 언론을 이끌고 물류센터 준공식에 오기로 한 것입니다. 지구상 최초의 자율 물류 시스템이었으니, 전국에 생중계되는 행사였습니다.

새벽 3시, 발사대가 완전히 고장 났습니다. 켈러의 표현으로는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죠. 비가 들이쳐 바닥이 뜯겨나갔고 진흙과 물웅덩이가 널려 있었습니다. 행사는 오전 8시.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대통령 선발대로 도착한 특수부대원 네 명이 기관단총을 든 채, 진흙탕에서 발사대와 씨름하는 엔지니어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켈러는 그들의 눈빛에서 "너희들 완전히 망했구나" 하는 게 읽혔다고 회고합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팀은 발사대를 겉보기에나마 작동하는 상태로 되돌렸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머문 세 시간 동안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했습니다. 혈액 패키지는 부드럽게 떠내려와 행사장 배너의 정중앙에 내려앉았고, 팀원 한 명이 그 자리에서 패키지를 열어 혈액이 온전하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여줬습니다.

"완전한 기적 같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떠나고, 언론이 다 떠나고, 그다음 8개월 동안 다시 모든 게 고장 났습니다. 네, 그게 초기의 실제 느낌입니다."

- 켈러 클리프턴

짚라인이 실제로 만든 것은 그 세 시간이 아니라 그 뒤의 8개월이었습니다.

2016년 10월 14일, 르완다 무항가의 배송 거점 개소식. 세계 최초의 국가 단위 드론 배송 서비스가 시작된 날이다. (출처: Zipline / Gavi 보도자료)
2016년 10월 14일, 르완다 무항가의 배송 거점 개소식. 세계 최초의 국가 단위 드론 배송 서비스가 시작된 날이다. (출처: Zipline / Gavi 보도자료)

📒 Editor’s Note:

짚라인 팀에게는 사내 좌우명이 하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어려워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쉬울 거라고 생각해서 한다." 8개월 내내 부서지는 시스템을 고치던 사람들의 유머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웃기고 조금 서글프다. 순진함도 오래 버티면 실력이 되는 모양이다.

 

그 8개월을 버티게 한 것은 기술적 자신감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보건부는 짚라인에 사진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출산 중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난 산모들의 사진이었죠. 재촉이 아니라, 왜 이 일을 하는지 잊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게 눈앞에 있으면 기술 결정에 대한 온갖 학술적 논쟁이 창밖으로 날아갑니다. 고객이 정확히 무엇을, 왜, 언제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니까요. 그건 동기부여만이 아니라 집중을 만듭니다."

- 키넌 와이로벡

첫 병원 한 곳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데 9개월, 나머지 20개 병원 전체로 확장하는 데는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차이를 만든 요인으로 켈러가 꼽은 것은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 하겠다, 현실에서 배우겠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겠다는 엄청난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좋은 가정이었던 걸로 판명됐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 Insight Note

켈러가 꼽는 결정적 순간은 첫 비행에 성공한 날이 아니라, 비행체가 문제의 15%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한 날이다. 나머지 85%는 그 기술이 현실에 착지하는 방식이고, 그것은 하루짜리 데모가 아니라 그 뒤 8개월의 고장 속에서 만들어진다.

→ 우리 제품이 고객의 현실에 닿기까지, 아직 아무도 만들지 않은 85%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에필로그: 21개 병원에서 시작된 것

르완다에서 증명된 시스템은 가나, 케냐, 코트디부아르, 일본, 그리고 미국으로 확장됐습니다. 2022년 국제 의학저널 랜싯(The Lancet)에 실린 연구는 짚라인이 배송을 맡은 르완다 의료시설에서 유효기간이 지나 버려지는 혈액이 67% 줄었다고 보고했습니다. 2023년 9월에는 미국 연방항공청(FAA)에서 조종자의 육안 범위를 벗어난 비행을 승인받은 첫 기업 중 하나가 됐고, 2025년 1월에는 아칸소의 한 가정집 앞마당에 월마트 주문을 하늘에서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순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초능력은 우리가 멍청하다고 가정하고, 빨리 현실 세계로 들어가 부딪히며 배우는 것이었어요."

- 켈러 클리프턴

이런 순간에 대부분의 본능은 그만두는 쪽입니다. 켈러는 짚라인을 그 반대편의 질문 하나로 요약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냥 계속 간다면요? 모든 투자자가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한 뒤에도, 모두가 당신을 접어버린 뒤에도 계속 간다면요? 계속 가다 보면 결국 작동하는 무언가, 중요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켈러 클리프턴

선반 위에서 잊힌 장난감 로봇과, 지금도 어딘가의 병원 마당으로 내려앉고 있을 혈액 패키지. 그 사이에 있던 것은 대단한 계획이 아니라 문을 닫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글은 세쿼이아캐피털의 팟캐스트 Crucible Moments의 Zipline: Reinventing Delivery with Instant Drone Transport 에피소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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