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부버
갈리시아의 작은 도시 렘베르크, 지금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 살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외조부모의 손에 맡겨졌고, 왜 어머니가 없는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네 살 무렵, 집 안뜰을 둘러싼 나무 발코니 위에서, 아이는 몇 살 위인 이웃집 소녀에게 차마 어른들에게는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엄마는 언제 돌아오느냐”고요. 소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너의 엄마는 다시 안 올 거야.”
이 아이의 이름은 마르틴 부버입니다. 그는 수십 년이 지난 뒤, 이 순간을 다시 꺼내며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배운 ‘진짜 만남’에 관한 모든 것이, 그 발코니 위의 한 시간에서 시작되었을 거라고.
스무 해가 더 지나, 어머니가 먼 곳에서 그를 찾아왔을 때도 그는 그 눈을 온전히 마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실패한 만남을 가리키는 말을 스스로 만들어 냈습니다. “어긋난 만남”이라는 뜻의 Vergegnung입니다. 어머니의 여전히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단어가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귓가에 울렸다고 썼습니다.

관계
그 소녀는 어린 부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실을 말했습니다. 아마 그 나이대에서는 최선을 다해, 견디기 힘든 불확실함에서 부버를 꺼내 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정확해 보이는 말 한마디가, 한 소년에게는 평생 남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흔히 우리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버의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어린 시절 이웃 소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고, 어쩌면 친절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이 그를 이해하며 건네진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를 그냥 설명하고 지나간 말이었는지였습니다. 같은 사실이라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건넬 수 있고, 그냥 결론처럼 던질 수도 있습니다. 말의 내용은 같아도, 그 말이 담고 있는 마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부버가 평생 붙들고 씨름한 질문은 사실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있는가, 아니면 이 사람과 함께 있으려 하는가. 그는 결국 이 차이를 평생 붙들며 살았고, 그 질문을 철학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가르는 정확한 이름이 세상에 아직 없다는 걸 깨닫고, 그는 철학책 한 권을 씁니다. 그 책은 이렇게 기억됩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1923년 부버는 『나와 너(Ich und Du)』를 발표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세상과 맺는 모든 관계는 두 가지 '근원어' 중 하나로 말해진다고 씁니다. '나와 그것(Ich-Es)', 그리고 '나와 너(Ich-Du)'입니다. 그에 따르면 '나' 자체는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너의 나, 혹은 나-그것의 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너를 통해 인간은 나가 된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상대는 분석하고, 판단하고, 예측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부버는 이걸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물을 그렇게 다루지 않고는 인간은 애초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반면 '나와 너'의 관계는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예측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로 만나는 것입니다. 부버는 이렇게 씁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부버의 사상은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하시디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시디즘의 핵심은 일상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너의 관계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계를 세 층위로 나눕니다.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예술이나 신앙 같은 정신적 존재와의 관계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그저 광합성을 하는 식물로 보는 대신 그 나무 전체와 마주할 때, 우리는 이미 나-너의 문턱에 서 있는 셈입니다. 부버는 이 낱낱의 너를 통해 결국 우리가 닿는 것이 '영원한 너', 즉 결코 그것으로 굳어지지 않는 단 하나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신이었습니다.
피할수 없는 슬픔
그런데 부버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조금 슬픈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아무리 진짜 같고 따뜻했던 만남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대로 살아 있는 존재로 기억하지 못하고, 자꾸 머릿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였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부버는 이런 일을 우리 삶의 피할 수 없는 슬픔, 즉 “숭고한 우울”이라고 불렀습니다.
부버 자신도 이 사실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예전처럼 그냥 어머니를 새롭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어머니는 하나의 기억이 되고, 설명이 되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버가 발견한 진실은, 부버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1957년, 부버는 책 '나와 너'를 통해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와 공개 대화를 나눴습니다. 로저스는 상담실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과 사람이 깊이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버는 조금 다르게 말했습니다. 상담자와 내담자는 처음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같은 방식의 만남이 되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상담자는 도와주는 사람이고, 내담자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리더와 팀원, 선생님과 학생처럼 관계 안에 이미 역할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아무리 마음을 다해도, 완전히 똑같은 ‘나-너’의 관계가 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관계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버는 그런 관계일수록 더 조심스럽고 진심 어린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
부버에게 삶은 결국 사람을 ‘그것’으로 굳혀 버리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한 번 이해한 사람을 거기서 끝내지 않고, 다시 새롭게 만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한 관계의 길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리더들에게도,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아직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청년들에게도 그대로 닿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자주 함께하는 존재로 만나기보다 역할과 성과와 기능으로 먼저 만나곤 합니다. 리더는 팀원을 사람보다 업무로 보기 쉽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듯 느끼기 쉽습니다. 청년들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생각 속에서, 언젠가 제대로 ‘너’로 불릴 날을 기다리곤 합니다.
부버가 붙든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으로 굳어질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이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계는 사람을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미 익숙해진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버에게 삶이란, 한 번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나고, 익숙해진 사람 앞에서 다시 마음을 여는 일이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서로를 ‘너’로 대하는 일입니다. 삶은 결국,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글을 마치며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한 번 기억으로 굳어 버린 사람을, 다시 처음처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익숙해진 사람 앞에서도, 또다시 마음을 열고 만날 용기를 내실 수 있겠습니까?
Editor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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