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 오픈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
아이디어를 공개하자는 말은 멋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하지만 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아이디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안다.
그래서 이 글은 선언 이후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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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은 오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오픈소스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늘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없어서다.
• 내 코드가 부족해 보일까 봐
• 이 정도 수준을 공개해도 되나 싶어서
• 괜히 평가받고,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서
이 감정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오픈이 가진 가장 현실적인 장벽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공개하는 사람 =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암묵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오픈은
용기 있는 소수의 영역이 되었다.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디어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대단해서가 아니라,
너무 미완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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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학과 지식이 공개될 수 있었던 이유
과학 논문이 공개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논문은 자유로운 메모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 정해진 형식이 있고
• 요구되는 분량이 있으며
• 최소한의 맥락과 근거가 필요하다
이 템플릿은
아이디어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입 장벽이기도 했다.
그래서 과학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충분히 다듬어진 생각만 올라오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오픈 지식 역시 비슷하다.
위키피디아에
“이런 거 있으면 좋겠다”라는 한 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공개는 허용되지만,
형식과 맥락을 요구한다.
아이디어가 오랫동안
공개되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아이디어에는
그걸 담아낼 그릇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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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디어는 가장 연약한 형태의 생각이다
아이디어는
코드보다 불완전하고,
논문보다 덜 정리되어 있으며,
정책보다 훨씬 개인적이다.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런 게 있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은
• 너무 짧고
• 너무 개인적이며
• 너무 쉽게 오해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순간,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 그게 왜 필요한데?
• 이미 있는 거 아니야?
• 그걸 누가 써?
아이디어가 성장하기 전에
평가부터 받게 되는 구조였다.
이건 아이디어의 문제라기보다,
아이디어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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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래서 필요한 것은 ‘완성된 공개’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오픈은
완성된 결과를 내놓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 덜 부끄럽게 공개하는 방법
• 평가가 아니라 보완으로 이어지는 공개
• 한 줄에서 시작해도 되는 구조
아이디어를 위한 오픈은
과학의 방식도,
오픈소스의 방식도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
아이디어에는
아이디어만의 리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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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개하지 못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이유
아이디어는
말한 순간부터
소유와 책임의 문제가 된다.
• 누가 먼저 말했는지
• 누가 더했는지
• 누가 바꿨는지
이걸 기록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안전했다.
그래서 아이디어는
늘 사적인 공간에 머물렀다.
노트 속에,
메신저 대화 속에,
술자리에서 흘러가듯 사라졌다.
우리는 그 선택이
비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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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지금은
아이디어를 “한 줄짜리 생각”으로
그대로 내던질 필요가 없다.
• 생각의 맥락을 남길 수 있고
• 변화 과정을 기록할 수 있으며
• 기여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 하나.
AI는 아이디어를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이렇게 도울 수 있다.
• 생각을 문장으로 늘려주고
• 질문을 대신 던져주고
• 비슷한 고민을 연결해준다
즉,
아이디어를 덜 부끄럽게 만드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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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픈은 능력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말하고 싶다.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일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아이디어의 오픈은
혼자서 다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다.
이건 약점의 고백이지,
실력의 과시가 아니다.
그래서 이 오픈은
“잘하는 사람만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정리된 사람만 참여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 요구한다.
• 이어서 생각해도 괜찮도록
• 남이 들어와도 맥락을 잃지 않도록
• 생각의 흔적을 남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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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실패하지 않기 위한 최소 조건
오픈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은 필요하다.
• 평가보다 질문이 먼저 오는 문화
• 결과보다 과정이 기록되는 구조
• 기여가 이름보다 앞서는 규칙
• 혼자 남지 않도록 돕는 중재자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오픈은 다시
용기 있는 소수의 놀이가 된다.
우리는 그 실패를 이미 봤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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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 다시 선언으로 돌아가며
아이디어를 공개하자는 말은
앞으로 가자는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가기 위해
먼저 멈춰 서서
우리가 왜 그동안 공개하지 못했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했다.
• 부끄러웠고
• 미완성이었고
•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선택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오픈을 말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스스로 자랄 수 있을 만큼
보호받는 오픈을 이야기한다.
이건 선언이지만,
동시에 약속이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약속,
사람을 남기지 않겠다는 약속,
아이디어를 부끄러움에서
꺼내오겠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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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장
아이디어는 원래
혼자서 시작된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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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 글은 새해 첫 날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