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전략 #마인드셋 #커리어
삼성은 나무 닭 경영으로 세워졌다! - 호암 이병철 (Samsung)

 

목계(木鷄), 100년을 내다보는 승부수

 

"운둔근(運鈍根). 운을 기다리되, 우직하게 버티며, 끝까지 뿌리를 내려라."

인생의 황혼기, 그 편안한 노후 대신 가장 위험한 도박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반도체'였습니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병철의 눈은 당장의 이익이 아닌, 10, 20년 뒤, 아니 100년 뒤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온갖 비난과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돌 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며 던졌던 그의 마지막 승부수. 기업가 이병철이 다음 세대인 우리들에게 남기는 '미래를 위한 유산'을 소개합니다.

성공한 비지니스인들의 삶의 여정에서 얻은 인사이트만 모아서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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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1. 용인 자연농원(에버랜드): 황무지에 심은 숲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1970년대, 그는 경기도 용인의 거친 야산을 사들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투기를 한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밤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었습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산을 활용하지 않고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양돈장을 만들고, 숲을 조성하여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테마파크라기 보다는 삭막한 산업화 시대에 국민들에게 '쉼'과 '자연'을 제공하고자 했던 그의 철학이 담긴 공간이되었습니다.

지금의 에버랜드 숲은 그가 수십 년 전 심어놓은 묘목들이 자란 것입니다. 그는 나무를 심으며 기업도 나무처럼 키워야 함을, 당장의 열매보다 굳건한 뿌리가 중요함을 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 장소 2. 수원 삼성전자 단지: 전자 산업의 태동

주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1969년, 그는 수원 매탄동의 허허벌판에 삼성전자를 세웠습니다. 당시 국내 전자 산업은 금성사(LG)가 선점하고 있었고, 기술 격차도 컸습니다. 내부 임원들조차 "굳이 잘 되는 사업을 두고 왜 위험한 전자 사업을 하느냐"며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것은 전자 산업뿐이다"라며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일본 산요전기와 제휴하여 기술을 배우고, 흑백 TV 생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술자들에게 "불량품은 암이다"라며 철저한 품질 관리를 주문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 글로벌 삼성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하지만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을 먼저 보고 깃발을 꽂은 그의 선구안이 빛나는 장소입니다.

 

📍 장소 3. 기흥 반도체 공장: 도쿄 선언과 목숨 건 도박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1983년 2월 8일, 73세의 이병철은 일본 도쿄에서 "삼성은 초고밀도 집적회로(VLSI)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이른바 '도쿄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세상은 이를 무모한 도박이라 불렀지만, 이는 철저한 계산과 절박한 시대정신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고민했습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는 1982년 미국 실리콘밸리를 직접 찾아가 IBM, HP, GE의 공장을 둘러보았고, 일본의 경제 석학들로부터 "앞으로는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경박단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는 '반도체'야말로 한국 경제가 영원한 하청 기지에서 벗어나 기술 자립국으로 도약할 유일한 '산업의 기회'임을 확신했습니다.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가 "삼성이 반도체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며 비웃었고, 내부 임원들조차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내 나이 일흔셋,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 호암 이병철

그는 매주 기흥 공장 건설 현장을 찾아가 독려했습니다. 64K D램 개발에 성공했고 이병철 회장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부터 '기술 식민지'의 설움을 끊어내고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로 나아가는 기회를 얻게되었습니다.

 

📍 장소 4. 호암미술관: 문화보국(文化報國)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그는 평생 모은 국보급 문화재들을 모아 호암미술관을 건립했습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의 그림... 해외로 유출될 뻔한 문화재들을 그는 사재를 털어 지켜냈습니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그는 경제적 풍요만큼이나 정신적 풍요가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미술관의 정원 희원(熙園)을 거닐며 그는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남기고자 했습니다.

기업가는 돈만 버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이곳에 서려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을 잠시 떠나, 영원히 남을 가치가 무엇인지 사색했습니다.

 

📍 장소 5. 승지원(承志園): 목계(木鷄)의 침묵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이병철 회장이 말년을 보낸 집무실이자 영빈관인 승지원. 그는 이곳에서 벽에 걸린 '목계(木鷄)' 그림을 자주 바라보았습니다. 목계는 '나무로 만든 닭'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투계를 뜻합니다.

반도체 사업의 천문학적인 적자 앞에서도, 세간의 비난과 찬사 속에서도 그는 목계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후계자에게 경영 수업을 했습니다.

그는 항상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써주며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이 경영의 핵심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기업이, 그리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진리를 되새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Epilogue: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다

 

이병철의 마지막 여정은 '채움'이 아닌 '비움'과 '나눔'이었습니다. 그는 반도체라는 미래의 기회를 남겼고, 숲과 미술관이라는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목계'와 같은 평정심과 '경청'의 지혜를 후세에 전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돈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자원 빈국이 살길은 기술뿐이다"라는 처절한 현실 인식과, "내 대에서 기술 자립을 이루겠다"는 불멸의 기업가 정신입니다.

자네는 지금 무엇을 남기려 합니까? 100년 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무엇이 남아있기를 바랍니까? 이병철의 여정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심고 있는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온 3일간의 순례가, 방황하는 당신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호암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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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Joung 화이트크로우 ·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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