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전략
기획은 속도가 생명이다.

"기획은 속도가 생명이다"

제가 주니어 기획자였을 때의 일입니다. 새로운 기능 개발을 맡게 되었는데, 정말 ‘완벽한 기획서’를 써서 모두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죠. 사용자 정책부터 온갖 예외 케이스, 심지어는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렸을 때의 색깔 변화까지… 거의 모든 예외 상황과 디테일을 잡아내겠다고 2주 넘게 기획서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기획서를 들고 개발팀에 찾아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네요. 뿌듯한 마음으로 설명을 마쳤는데, 시니어 개발자분께서 갸우뚱하시며 첫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능을 구현하려면 유저 DB 테이블 구조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기존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정책도 고려되신 건가요?”

‘마이그레이션…?’

그 질문을 시작으로,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기술적 제약, 비즈니스적 허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완벽했던’ 기획서는 3일 만에 누더기가 되었고, 저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죠.

아마 많은 기획자, 혹은 디자이너, 개발자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삽질’을 반복하는 걸까요? 오늘은 기획에서는 완벽함보다는 빠른 속도가 중요하다는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처음부터 완벽한 기획은 ‘허상’입니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들이, 심지어 시니어 기획자까지도 ‘완벽한 기획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빈틈없는 논리로 쓰여져 이 기획서만 읽으면 개발자들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대표님의 감탄사를 자아내는 그러한 기획서요. 아마도 개발자나 디자이너 같은 팀원들이 기획에 말을 얹기 시작한다면, 기획자인 내 전문성은 무엇인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서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불운하게도, 이 세상에는 그러한 ‘처음부터 완벽한 기획’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기획자: “이번 신규 기능 기획서입니다. 모든 예외 처리와 정책까지 상세하게 담았습니다.”

개발자: “음… 기획은 좋은데, 이걸 기획서대로 구현하려면 서버 비용이 지금보다 2배는 더 나올 것 같아요. 이 부분은 로직을 좀 단순화해야겠는데요?”

마케터: “기능은 좋은데, 요즘 사용자들은 이렇게 복잡한 가입 절차를 싫어해요. 중간에 이탈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요?”

대표: “핵심 기능은 좋은데, 우리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과는 조금 안 맞는 부분이 있네요.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 봅시다.”

기획자가 머릿속에서 아무리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막상 밖으로 기획을 꺼내 놓는 순간 수많은 변수와 마주하게 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피드백들이 쏟아지죠.

결국 진짜 ‘완벽한 기획’을 향한 길은,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일단 불완전한 초안이라도 빠르게 공유하고, 팀원들과 함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내 기획서는 완성본이 아니라, 똑똑한 동료들의 지혜를 모으기 위한 ‘재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의 속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기획을 할 수는 없다.

2. 기획은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입니다

기획이 늦어지는 가장 큰 비용은 기획자 한 명의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팀 전체가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기획자가 ‘완벽’을 위해 일주일을 더 고민하는 동안, 개발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디자이너는 어떤 화면을 그려야 할까요? 기획서가 나와야 할 일이 생기는 동료들은 하염없이 기다리며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게 됩니다(물론 다들 그 시간을 활용해서 공부도 하고, 여러 미뤄뒀던 일을 처리하겠지만요!). 이건 정말 엄청난 자원 낭비죠.

빠른 기획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 기획 초안 공유 (1일 차): “여러분, 제가 생각하는 큰 그림은 이거예요. 상세한 정책은 미정이지만, 핵심 사용자 흐름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피드백 미팅 (2일 차): 개발자는 기술적 리스크를, 디자이너는 UX 허점을, 마케터는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며 아이디어를 쏟아냅니다. 혼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 기획 구체화 (3일 차): 함께 나눈 논의를 바탕으로 기획서를 구체화합니다. 이제 이 기획서는 더 이상 기획자 한 명의 것이 아니라, ‘우리 팀 모두의 기획’이 됩니다.

기획서는 토론을 위한 ‘의제’입니다. 의제가 빨리 나와야 회의가 시작되고, 회의가 활발해야 더 좋은 결론이 나옵니다. 빠른 기획은 팀에게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 기회를 제공하고, 이는 곧 제품의 퀄리티와 성공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3. 매몰 비용은 적을수록 좋습니다

혹시 ‘매몰 비용의 오류(Sunk Cost Fallacy)’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미 투입한 시간이나 돈이 아까워서, 전망이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 끌고 나가는 심리적 편향을 말합니다.

이는 기획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황 A (느린 기획): 기획자가 한 달 동안 모든 것을 쏟아부어 100페이지짜리 기획서를 만들었습니다. 중간에 시장 상황이 바뀌어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걸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저분이 한 달을 고생했는데…”, “이미 들어간 시간이 얼만데…” 결국 팀은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상황 B (빠른 기획): 기획자가 3일 만에 핵심 아이디어만 담은 5페이지짜리 기획서를 공유했습니다. 팀원들과 논의하던 중, 이 아이디어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습니다. 팀은 빠르게 방향을 수정하거나, 더 나은 아이디어를 탐색하기로 결정합니다. 잃은 것은 기획자의 3일뿐입니다.

빠르게 내놓은 기획은 실패하더라도 부담이 적습니다. 언제든 쉽게 방향을 틀거나 버릴 수 있죠. 매몰 비용이 적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라, 더 큰 실패를 막기 위한 ‘값싼 학습’입니다. 빠른 기획은 우리 팀에게 이런 ‘값싼 학습’의 기회를 더 자주 제공해 줍니다.

4. 느린 100%보다 빠른 80%

물론 제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기획안을 던지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빠른 기획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핵심 80%에 집중하는 것’이죠.

제품 기획의 100%를 채우는 과정은 보통 이렇습니다.

  • 0% → 80%: 이 제품을 왜 만드는가? (목표),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타겟), 핵심 기능은 무엇인가? (주요 플로우), 비즈니스 모델은? (수익 구조) 등 제품의 뼈대를 잡는 과정
  • 80% → 100%: 회원 탈퇴 시 안내 문구, 비밀번호 찾기 실패 시 에러 메시지, 로딩 아이콘 모양 등 세부적인 예외 처리와 디테일을 다듬는 과정

0에서 100까지 모든 것을 기획자가 완성하려 한다면, 십중팔구 길을 잃기 마련입니다. 일단 80%까지만 빠르게 달리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제품의 뼈대와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끌어내는 거죠. 그 후에 나머지 20%는 개발,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팀원들과 함께 채워나가도 늦지 않습니다.

마무리하며: 기획자는 ‘완성가’가 아닌 ‘촉진자’입니다

과거의 기획자가 건축의 ‘설계사’처럼 완벽한 도면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면, 현대의 기획자는 팀의 집단지성을 이끌어내는 ‘토론의 촉진자(Facilitator)’에 가깝습니다.

내 손에서 완벽한 결과물을 내놓으려는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아 보세요. 대신,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의 똑똑한 동료들을 더 빨리, 더 자주 대화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세요. 그 고민의 끝에 ‘빠른 기획’이 있고, 그것이 곧 당신과 당신의 팀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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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패스트(Manyfast) 매니패스트 · 기획자

아이디어에서 개발 지시까지, 쉽고 빠르게

댓글 8
매니패스트 님의 아티클이 EO 뉴스레터에 실렸습니다. 이번 주 이오레터를 확인하세요!

>>> https://stib.ee/iW7J
안녕하세요, 동료분께서 아티클 공유해주셨는데 글이 너무 좋아 곱씹다가 궁금함이 생겨 댓글 남깁니다.

“기획은 의제를 만드는 일”이라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다면 기획자가 이런 상황 속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기술 이해도일까요, 사용자 감각일까요, 아니면 팀을 움직이는 커뮤니케이션일까요?

하드 스킬이 없는 기획자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혹은 촉망받는 기획자가 되기 위해선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할 지가 궁금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말씀해주신 부분은 아마도 많은 기획자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고민거리를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개발자/디자이너에 비해 그 전문성이 또렷히 보이지 않는 기획이라는 업무에 종사하는 기획자들은 언제나 어떻게 자신의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AI 코딩툴과 같은 도구들로 무장한 사람들이 원래 기획자들의 일에 관여하는 이 시기에, 기획자의 전문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이 클 듯합니다.

말씀하신 기술 이해도, 사용자 감각, 커뮤니케이션 능력 모두 중요하겠지만, 저는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근본적으로 "큰 그림에서의 문제 해결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도 썼듯, 기획자가 내놓은 기획안은 팀 내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많이 수정됩니다. 그런데 왜 회사에서 기획자를 써야 할까요?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획자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결국 기업이, 넓게 보면 사용자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품이든 서비스든 기획이 필요하겠죠. 사용자 입장에서의 감각, 팀을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어떤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이해하고 있는 것 모두 "큰 그림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위해 사용되는 하위 역량인 듯합니다. 이러한 하위 역량들을 모두 갖춰야겠지만, 그 하위 역량들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우리 기획자들은 어떻게 이러한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답을 가까이서 찾고 싶습니다. 개발자/디자이너들이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전문성을 증명하듯, 우리 기획자들도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왔는지" 보여줌으로써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문제가 클라이언트의 문제였든, 팀 내의 문제였든, 서비스 개발 과정의 문제였든 무관하게요.

다시 한 번 좋은 고민거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매니패스트(Manyfast)
정성스런 답변 감사합니다 :)

혹시, "큰 그림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의 예시가 있을까요? 제가 경력이 짧아서인지 '문제 해결 능력' 이라고 한다면, UIUX적으론 디자이너가, 개발 로직 관련해서는 개발자가 더 뛰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해결하신 사례 혹은 생각나는 예시가 있다면 답변 부탁 드리겠습니다.
@서비스기획자
맞습니다. 제품의 UIUX는 디자이너가 해결할 것이고, 제품의 개발 로직은 개발자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좋은 제품만 만들기인가요? 그렇지는 않죠.

딱 적합한 예시는 아닐 수 있지만, 지금 떠오르는 예시로 저희가 만들고 있는 매니패스트 제품이 한창 개발될 당시에, 사내 테스트를 돌리던 때입니다. 테스터들이 특정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가이드에 있던 특정 단어가 뭘 지칭하는지 몰라서 였어요. 개발자들이 생각한 타겟 유저에게는 너무 친숙한 단어일거라 생각했던 거죠. 더 인상적인 것은, 이미 몇 달 전 회의에서 어떤 기획자가 (^^;;) 그 단어 수정을 포함하여 가이드 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는데, 우선순위에 밀려 해결되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디자인, 개발, 마케팅 등 다양한 문제에는 각 전문가가 있습니다. 기획자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결국 궁극적인 문제(유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팀을 돌리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매니패스트(Manyfast)
제 질문을 다시 읽어보니 다소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좋은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획자의 역할은 참 복잡하고, 그래서인지 회사마다 그 역할의 범위와 무게가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문득 ‘기획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정성스럽게 답해주신 덕분에 ‘매니페스트’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사 연혁과 서비스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제가 같이 일했던 기획자들은 어느정도의 베이스만 잡아둔체로 관련자들을 모두 소집해서 리뷰를했고, (기획자는 1안 2안등 여러 대처방법도 준비해뒀어요. )
그자리에서 수정하면서 다시 잡아뒀죠. 그래서 그날 끝내고,
기획자는 디자이너와 얘기하면서 디자이너는 작업하고 디자인 리뷰도 따로진행했어요.

그래서 목표도 잘나오고 다같이 정리하기 때문에 얼라인이 맞춰져서 그 뒤로 순탄하게 업무가 착착 진행됬답니다.
좋은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실력있는 기획자들은 빠르게 베이스를 잡고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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