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오후, 서울 성수동 한서빌딩. 구글 딥마인드 팀이 대학생들과 마주앉아 커리어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제미나이 팀을 이끄는 최현정 VP부터 김형원 엔지니어, 조재민 모델 UX 디자이너, 팀의 막내 이승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까지. 모두들 제각기 다른 과정을 거쳐 실리콘밸리의 최전선까지 나아간 현직자들이었죠.
행사 운영진은 EO 팀에게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추첨을 해야 했고,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학부생부터 석박사생들까지, 전공도 다양하다"라고 귀띔했습니다. 구글 딥마인드 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참석자들의 모습에서 AI 시대에 다들 얼마나 커리어 고민이 깊은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가 질문을 받다가 예정 종료 시간을 넘겨야 할 정도로 열띠게 진행됐던 이 날의 세션에서, 네 사람이 건넨 현실적인 조언들을 정리했습니다.
이승명 엔지니어: 미국 석사, 비싸도 아직 가치 있다
연사 중 막내인 이승명 엔지니어는 한국에서 학부를, 미국에서 석사를 마쳤습니다. 해외 취업을 염두에 두고 석사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그는 비싸지만 아직 가치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체감하기에 빅테크의 10년 차 이하 개발자 중 절반가량이 석박사 출신입니다.
이유는 비자입니다. H-1B는 추첨제라 한국에서 바로 지원하기 어렵고, L-1은 미국 기업의 해외 지사에서 1년 이상 일한 뒤에야 가능하며, E-2는 한국 기업에 취업할 때만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취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겁니다.
비용은 학교마다 몇 배씩 차이가 나니 리서치를 꼼꼼히 해야 합니다. 국비 유학이나 관정 같은 장학금을 노려볼 수도 있고, 한국에서 몇 년 일하며 돈과 경력을 함께 모은 뒤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경력이 있으면 미국 취업도 그만큼 수월해집니다.
그녀는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바로 써먹을 수 있는 팁도 하나 공유했습니다. 링크드인에서 관심 있는 직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어떤 전공과 경력을 거쳐 그 자리에 갔는지 확인하고, 직접 메시지를 보내 보라는 것입니다. 열 명에게 보내면 그중 한 명쯤은 학생의 질문에 답을 해 줄 거라며, 기다리지 말고 먼저 움직여 보라고 덧붙였습니다.
조재민 디자이너: 커리어는 계단식이다
제미나이의 한국어 답변 품질을 다듬는 조재민 디자이너는 가구와 조명 같은 제품 디자인에서 출발해 UX로, 다시 AI로 흘러왔습니다.
UX가 내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만들고,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경험부터 쌓아 보라는 게 이날 그의 조언이었습니다. 혼자 아이디에이션하기보다, 별로라는 반응이라도 정직한 피드백을 직접 받아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죠. 실제로 그는 학창 시절 아이디어를 시험하려고 공모전에 꾸준히 나갔고, 대학교 4학년 때 SK텔레콤 공모전에 제안한 동영상 편집 앱이 앱스토어에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AI로 UX 리서치를 자동화하고 싶다는 학생에게는 구체적인 가이드를 제시했습니다. 데스크 리서치와 전체 워크플로는 AI로 정리해도 좋지만, 사람을 만나 대화로 끌어내는 정성적인 부분은 따로 떼어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강조한 키워드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였습니다.
커리어 전반에 대한 그의 조언은 '커리어를 계단식으로 보라'였습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회사는 '나를 뽑아주는 회사'일 수밖에 없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한 단계씩 올라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날의 세션에 나온 네 사람 중 누구도 처음부터 구글 딥마인드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김형원 엔지니어: 관리자가 되지 않아도 성장할 수 있다
제미나이의 음성인식을 맡은 김형원 엔지니어는 물리학에 11년을 쏟은 뒤 금융업계로 갔습니다. 금융업계에서 그가 배운 건 기술이 업계의 한계에 묶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고객의 돈을 다루는 만큼 규제가 촘촘해서, 최신 머신러닝 기법을 마음껏 쓸 수 없기 때문이죠. 그는 기술을 깊게 배우고 싶다면 어느 업계로 갈지도 함께 따져봐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습니다.
이후 구글에 와서 느낀 차이점으로 그는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비중이었습니다. 내 코드가 왜 필요한지 동료와 PM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코드가 아무리 좋아도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커리어 트랙입니다. 연차가 쌓여도 반드시 관리자가 될 필요가 없고, 실무자로 남아도 직급과 연봉이 계속 오릅니다. 그가 아는 한 SVP는 1만 명 넘는 조직을 이끌다가 스스로 실무자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연구 코드에 AI를 어디까지 믿고 써도 되느냐는 학생의 질문에는 일단 최대한 AI에 맡겨 보라고 답했습니다. 대신 원하는 결과를 먼저 명확히 정의하고,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야 막혔을 때 내 방법의 문제인지 기술의 근본적인 한계인지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조금씩 공개된 소스 코드를 읽으며 업계 흐름을 따라갑니다.
AI에 뛰어들기엔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앤드류 응(Andrew Ng)이 뉴스레터 The Batch에 쓴 레터 Don't Believe The Hype!를 권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18세 학생이 같은 고민을 담아 보낸 편지에, 앤드류 응이 AI가 아직 사람에 비해 한계가 뚜렷하고 앞으로 수십 년간 할 일은 충분하다며, 지금이야말로 AI 분야에 뛰어들기 가장 좋은 때라고 답하는 내용입니다.
최현정 VP: 빨리 변하는 분야일수록 기초가 무기다
제미나이 앱의 품질과 다국어 서비스를 총괄하는 최현정 VP는 언어학을 전공한 문과 출신입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지 않아 처음엔 장벽이 높았지만, 언어학과 음성학이 재밌어서 계속 파고들다 보니 구글과 함께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찾아왔고, 그 인연으로 구글에 합류했습니다.
AI가 너무 빨리 변해서 지금 공부해 봐야 소용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바로 선을 그었습니다. 사실 AI는 195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학문이고, 지금의 발전은 오래전 정립된 이론이 하드웨어를 만나 비로소 꽃핀 결과입니다. 근간이 되는 이론은 바뀌지 않으니, 이를 깊이 이해할수록 AI를 쓰는 능력도, 산업이 돌아가는 원리를 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최현정 VP가 짚은 기회는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는 한국어입니다. 한국 사용자들은 주어를 생략하고 맥락에 기대어 말하는 데 익숙해서, 프롬프트도 그렇게 씁니다. 문제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으니 모델은 헷갈리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국어와 LLM을 결합한 연구는 아직 영어권에 비해 극히 드뭅니다.
다른 하나는 인문학입니다. AI의 약점을 일부러 파고드는 레드팀, 모델이 사회에 끼칠 영향을 다루는 Trust and Safety, AI를 둘러싼 여론을 읽어내는 소셜 미디어 분석처럼 이전에 없던 직무가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인문학적 깊이에 LLM에 대한 이해를 더하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슈퍼파워'를 갖출 수 있는 시대라는 거죠.
길은 좁아진 게 아니라 넓어졌다
최현정 VP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신입 채용이 확실히 줄었다는 현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는 이를 AI가 길을 막은 것이 아니라 판이 빠르게 바뀌며 길이 넓어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시기를 제대로 탐험하기 위해서는, 남들 보기 좋은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정해진 엘리트 코스 하나만 바라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고도 조언했죠.
사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들의 이력이 그 말을 증명합니다. 처음부터 AI가 이렇게 큰 흐름이 될 줄 알고 곧장 달려온 사람은 누구도 없었으니까요. 10년 뒤에 어떤 직업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최현정 VP의 마지막 당부는 단순했습니다. 선배들을 많이 만나 간접 경험을 쌓고, 그 안에서 심장이 뛰는 일을 찾으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