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서울, 북경, 호치민, 쿠알라룸프, 방콕, 싱가포르. 나는 30년 동안 투자자로 회사 자료를 받았다. 홈페이지를 열고, 소개서를 넘기고, 영상을 틀었다.
틀린 자료는 거의 없었다. 제품 설명을 빼면, 회사를 설명하는 방식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법도, 디자인도, 숫자도.
그리고 전부 같았다..
로고를 가리면 어느 회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로고를 바꿔도 자연스럽게 다른 회사 웹사이트와 마케팅 자료가 되었다.
나는 그 자료들을 읽은 게 아니라 지나갔다. 그리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종종 다른 사람이 건넨 한마디였다.
솔직히 말하면, 틀렸으면 차라리 기억했을 것이다.
아무도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누가 쓴 걸까. 아무도 쓰지 않았다. 깎였다.
대표가 한 줄을 말한다. 날카롭다. 마케팅팀이 받아 쓴다. 전략팀이 "시장 정의가 좁다"며 넓힌다. CTO가 "기술적으로 과장"이라며 단어를 뺀다. 웹에이전시가 "레퍼런스 사이트가 어디냐"고 묻는다. 마케팅 에이전시가 카피를 쓴다. PR 에이전시가 보도자료로 바꾼다. 영상 프로덕션이 "일단 카메라부터" 들고 온다.
손실은 뺄셈이 아니라 복리(Compound)다. 그리고 손실은 늘 같은 방향으로 난다. 날카로운 쪽이 먼저 깎인다. 모난 곳이 곧 주장이기 때문이다.
남은 문장은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이다.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순서가 틀렸다
대행사는 잘못하지 않았다. 카피라이터는 카피를 쓰고,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웹 디자이너는 레퍼런스부터 묻는다. 각자 직업을 다할 뿐이다.
문제는 그들이 묻는 질문이 이미 답을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레퍼런스 사이트가 어디예요?"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 이 홈페이지는 다른 홈페이지를 닮기로 결정됐다. 2,000만 원을 쓰든 1억 원을 쓰든 같다. 더 비싼 곳에서 더 매끄럽게 닮을 뿐이다.
AI는 이 속도를 높였다. 평균을 읽고 평균을 쓰는 기계에게, 가장 빨리 나오는 문장은 가장 안전한 문장이다. 제작은 10초가 됐다. 설득은 그대로다.
삼성 대표가 아니라 창업자다
대기업은 이미 시장이 아는 것이 있다. 스타트업은 아무도 모른다. 브랜드가 서 있는 회사와, 문장 하나로 시작하는 회사에는 위임의 대가가 다르다.
스타트업에 있는 건 문장 하나다. 투자자에게 무엇을 말할지, 기자에게 무엇을 말할지,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에게 우리를 어떻게 설명할지, 우리가 틀리면 어디서 무너지는지. 이 답이 대표 머리에 있어야 한다. 마케팅 매니저가 대신 찾을 수 없다. 그는 대표가 말해 주지 않은 걸 알 수 없다.
대표가 한 발 물러서는 순간, 내러티브는 회의를 거치며 평균으로 간다. 그 평균에 투자자가 도착하는 날, 나는 이미 다음 자료를 열고 있다.
회사를 설명하는 일은, 바쁜 대표가 가장 먼저 위임하는 일이고, 가장 나중에 되찾을 수 있는 일이다.
질문
나는 자료를 받으면 10초 안에 닫는다. 그 10 초에 들어오는 건 첫 문장 하나뿐이다.
그 첫 문장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대표님은 아시나요?
그중 한 명이라도, 회사가 무엇이 틀리면 망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가요.
물은 적이 없다면 — 그 문장은 대표님의 것이 아니다. 투자자는 대표님 회사를 본 적이 없다. 마치 AI 가 만든것 같은 아주 유창한 평균을 본것이다.
데이비드 김
투자은행가 (30년) → 외신 테크 칼럼니스트 → Equity storyteller (투자자 스토리 텔러)
AN Lab → https://alphanarrative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