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23일 프랑스 최고법원인 파기원(Cour de cassation)이 가방 브랜드 포레 르 파주(Fauré Le Page)의 상표 'Fauré Le Page Paris 1717' 두 건을 무효로 본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사건번호 22-11.499). 무효를 청구한 쪽은 여행용 트렁크와 가죽 제품으로 알려진 파리의 고야드(Goyard)다. 소송이 2012년 10월에 시작됐으니 결론까지 14년 가까이 걸렸고, 그 사이 유럽사법재판소(CJEU, 유럽연합 법의 해석을 맡는 최고법원)의 판단까지 거쳤다. 긴 다툼의 대상은 상표 끝에 붙은 숫자 '1717'이었다.

옛 회사는 1992년에 해산했고 지금의 회사는 2009년에 등기됐다
유럽사법재판소 판결문에 따르면 포레 르 파주라는 이름은 파리에서 무기와 탄약, 가죽 액세서리를 취급하던 옛 회사(Maison Fauré Le Page)에서 왔다. 이 회사는 1992년 11월 27일 해산했고 자산은 유일한 주주였던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지금의 포레 르 파주 파리(Fauré Le Page Paris)는 2009년 10월 14일 상업등기부에 등록된 회사다. 이 회사는 등기 보름 뒤인 10월 29일, 옛 회사의 주주가 1989년에 출원해 둔 프랑스 상표 'Fauré Le Page'를 양수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17일 가죽과 인조가죽, 트렁크, 여행가방, 핸드백 등을 지정해 'Fauré Le Page Paris 1717' 상표 두 건을 출원했다.

고야드는 2012년 10월 26일 이 상표가 수요자를 속인다며 무효를 구하는 소를 냈다. 1심 법원과 2016년의 파리 항소법원(Cour d'appel de Paris)은 고야드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8년 파기원이 그 판결을 파기했고, 사건을 다시 맡은 파리 항소법원은 2021년 11월 23일 두 상표를 무효로 판단했다. 'Paris 1717'이라는 표시가 1717년부터 영업이 이어져 왔고 그때의 노하우가 전해졌다는, 사실과 다른 정보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이번에는 포레 르 파주가 상고했고, 파기원은 유럽사법재판소에 유럽연합 상표 지침의 해석을 물었다. 유럽연합 회원국의 법원은 유럽연합 법의 해석이 문제 되면 재판을 멈추고 유럽사법재판소에 해석을 구할 수 있고, 사건을 맡은 법원은 그 답에 따라 판결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창업연도가 품질에 관한 표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건에 적용된 유럽연합 상표 지침은 상품의 성질이나 품질, 산지 등에 관해 공중(일반 수요자)을 속일 수 있는 상표를 등록받을 수 없는 상표로 정하고 있었다(지침 2008/95 제3조 제1항 (g)호. 현행 지침 2015/2436 제4조 제1항 (g)호도 같은 내용이다). 연도는 상품에 관한 정보라기보다 회사에 관한 정보처럼 보이므로, 연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 조항을 적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유럽사법재판소는 2026년 3월 26일 판결(C-412/24)에서 출발점을 먼저 확인했다. 이 조항이 말하는 기만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특성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상표권자가 언제 어디서 설립됐는지는 상품의 특성에 해당하지 않는다. 재판소는 이어서 럭셔리 제품의 품질은 그 상품이 주는 고급 이미지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오래된 설립연도는 오랜 노하우를 떠올리게 할 수 있고, 그 노하우는 품질의 보증으로 받아들여져 상품에 고급 이미지를 더하는데, 품질은 상품의 특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재판소는 상표에 들어간 숫자가 수요자에게 사업의 설립연도로 인식될 만하고, 그 연도가 오래되었다는 점 때문에 상품에 품질 보증과 고급 이미지를 주는 오랜 노하우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노하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상표는 수요자를 속일 수 있는 상표로 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숫자가 설립연도로 읽히는지, 그것이 오랜 노하우와 품질 보증을 떠올리게 하는지는 각국 법원이 상표 전체와 사건의 모든 사정을 놓고 판단하도록 했다.

(자료: 유럽사법재판소 C-412/24 판결 주문)
재판소는 속일 염려가 있는지를 출원된 표장 그 자체로 판단하고, 등록 뒤에 상표권자가 그 표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도 밝혔다. 파기원은 이 해석을 받아 2026년 9월 23일 포레 르 파주의 상고를 기각했다.
상표권을 넘겨받아도 영업과 노하우의 승계는 따로 확인해야 한다
판결문에서 옛 회사와 지금의 회사를 잇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2009년의 상표 양수다. 옛 회사가 해산하고 17년이 지난 뒤의 일이고, 프랑스 법원은 그 사이에 영업이 이어지고 노하우가 전해졌다고 보지 않았다.
오래된 브랜드를 인수해 다시 내놓는 일은 럭셔리와 패션에서 흔하다. 한국 기업이 해외 브랜드의 상표권을 사들여 사업을 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사건에서 무효가 된 것은 인수한 브랜드명에 'Paris 1717'을 결합해 새로 출원한 두 상표다.
우리 상표법에도 같은 방향의 조항이 있다. 상품의 품질을 오인하게 하거나 수요자를 기만할 염려가 있는 상표는 등록받을 수 없다(상표법 제34조 제1항 제12호). 창업연도 표기가 이 조항으로 다투어진 국내 사례를 필자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주얼리와 패션, 전통 식품과 주류처럼 연륜이 품질의 신호로 읽히는 분야에서는 'since'와 연도가 간판과 포장, 상표에 자주 들어간다. 상표로 등록하지 않고 광고에만 쓰더라도 거짓이거나 과장된 표시는 표시광고법의 규율을 받는다(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3조 제1항). 유럽연합 상표(EUTM)나 회원국 상표를 출원하는 한국 브랜드에는 유럽사법재판소가 해석한 조항과 같은 내용의 조항이 적용된다(유럽연합 상표 규정 2017/1001 제7조).
연도를 상표에 넣기 전에 확인할 것
연도를 상표에 넣으려는 기업은 세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첫째, 그 연도가 가리키는 사실을 자료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설립 시점과 함께 그때부터 영업이 이어졌는지, 기술과 인력이 전해졌는지가 문제 된다. 중간에 법인이 바뀌었거나 영업이 끊긴 기간이 있다면 연도 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정해야 한다.
둘째, 브랜드를 인수할 때는 상표권과 함께 무엇이 넘어오는지를 따져야 한다. 영업, 제조 기술, 인력, 기록물 가운데 실제로 승계되는 범위가 연도를 쓸 수 있는 범위를 정한다. 실사 단계에서 상표의 등록 상태와 함께 그 상표에 담긴 연도와 문구의 근거까지 확인해야 한다.
셋째, 연도를 넣은 표장과 넣지 않은 표장을 따로 등록해 둔다. 이 사건에서 무효가 된 것은 연도가 결합된 상표다. 핵심 브랜드명을 연도 없이 등록해 두면 연도 표기가 다투어지더라도 브랜드의 중심이 되는 상표권은 남는다.

(자료: 유럽사법재판소 C-412/24 판결 및 필자 정리)
프랑스 법원은 상표에 들어간 연도를 상품의 품질에 관한 표시로 읽었다. 헤리티지를 내세우려는 브랜드는 연도를 상표에 넣기 전에 그 숫자를 뒷받침할 기록부터 갖춰야 한다. 브랜드를 인수하는 기업은 상표권과 함께 영업과 기술, 기록물이 실제로 넘어오는지를 실사에서 확인하고 계약서에 적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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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태균 파트너변리사는 BLT 전략본부장으로 스타트업들의 IP전략, BM전략, 시장진출(GTM) 전략 수립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2011년 48기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현재 여러 분야의 스타트업의 IP(특허, 상표, 디자인)업무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에 참여하여 성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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