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벨 좋은 회사가 커리어에는 안 좋을 수 있다
1️⃣ 결정할 게 없다는 뜻일 수 있다.
나는 회사의 워라벨이 그 조직이 지금 처리 중인 불확실성의 총량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워라벨은 고로 불확실성의 총량을 쳐내면서 누릴수 있어야 하며, 가장 큰 혼란기를 지나는 스타트업이 처음부터 누리긴 어렵다.
그렇지만, 야근이 많은 스타트업이라고 다 배우는 건 아니다. 야근의 원료는 두 종류인데, 밖에서 봤을땐 둘다 업무량이 많다 보이는다는게 함정.
A. 불확실성: 이 가격이 맞는지, 이 세그먼트가 맞는지 몰라서 계속 실험하느라 늦게까지 남는 경우
B. 마찰: 문서가 없어서 같은 걸 세 번 물어보고, 의사결정 권한이 불명확해서 회의를 네 번 하느라 늦게까지 남는 경우
스타트업 커리어에서 후자는 대기업놀이에 연장선이라, 너무나 비효율적인 소모이고, 따라서 최소해야 한다. 마찰을 위안 삼을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하면서 사람을 알아간다는 정도인데, 이는 전자로도 충분하다. 스타트업은 전자인, 불확실성에서의 고민만을 추종해야 하고, 이것이 자산으로 남게 된다.
워라벨이 좋은 회사도 세 종류인데, A. 시스템이 완성돼서 판단할 일이 줄어든 조직, B. 성장이 멈춰서 결정할 일 자체가 사라진 조직, 그리고 C. 인당 매출이 높아서 적은 인원이 여유 있게 굴러가는 조직이다. 단연코 세 번째는 커리어 관점에서 최상의 선택지인데, 이유는 그런 BM에 도달하게 된 원인이 결코 얕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 몸담고 기간을 보내면, 일당백 하는, 효율적인 팀의 기준이 저절로 default값으로 전이되는(따라서 Unlearn할게 없는) 엄청난 장점이 생긴다.
*Tip: 스타트업내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는 조직은 신사업팀, 그리고 Series A 바로 전후 단계가 좋다.
2️⃣ 커리어는 근무년수가 아니라, Iteration 횟수로 쌓인다.
앞서 Series A를 언급했는데, 그 구간이 좋은 이유는 자금이 있어서가 아니라 확신한 사이클이 가장 촘촘하게 돌기 때문이다. 가설을 세우고, 붙여보고, 숫자를 확인하고, 틀렸으면 죽이는 것. 이 한 바퀴가 커리어의 최소 단위다. Pre-seed는 사이클을 돌릴 돈이 없고, Series C 이후는 지킬 게 많아져서 사이클을 돌릴 명분이 없다. 그 사이에 잠깐 열리는 구간이 Series A 전후.
중요한 건 이 사이클이 참여했다고 세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남이 정한 가설을 실행만 한 건 0회로 쳐야 한다. 내가 가설을 세웠고, 내가 결과를 봤고, 내가 틀렸다는 걸 확인한 것만 카운트된다. 큰 조직에서 큰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린 것보다, 작은 조직에서 작은 실험을 끝까지 완주한 쪽이 남는 게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참고로, 사이클의 경우, B2C 앱은 2주에 한 바퀴가 돌고, 엔터프라이즈 B2B는 6개월, 하드웨어는 1년이 걸리기도 한다. 같은 3년을 보내도 누적 Iteration이 열 배 차이 나는 셈.
따라서, 이직이나 합류를 판단할 때 물어야 할 건 연차나 직급이 아니라 여기서 앞으로 몇 번의 사이클을, 내 이름을 걸고 돌릴 수 있는가여야 겠다.
3️⃣ 연봉 5% 인상을 목표삼으면 안된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 기준, 연 5% 연봉인상은 평균치인데, 사실 이는 성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이탈 방지 비용이다. 이럴때 회사가 지불하는 인상분은 내가 새로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라, 내가 이 조직에서만 통하는 맥락을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 즉 사내 정치 지형, 결재 라인의 관행, 십 년 된 레거시 시스템의 이력 등 회사 안에서는 비싼 자산인데, 회사 밖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를 회사는 당신에게 얘기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3년, 5년 지나가면, 연차가 쌓일수록 나를 데려갈 곳이 줄어들며, 늘 인상받던 5% 마약의 댓가를 톡톡히 치뤄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반대로, 커리어에서 제대로된 획을 긋고 있다면, 당신의 대표는 매년 아니면 6개월 마다 연봉 두자릿수 인상을 제안해야 한다.
4️⃣ 그래서.. 갈아넣으라고?
독자여, 야근 그 자체에는 학습이 없다. 주 80시간 일하면서도 아무것도 안 배우는 조직이 훨씬 많다. 보통 야근에 대해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대비축은 “워라벨 VS 번아웃” 인데, 이를 “밀도가 있느냐 VS 없느냐”로 바꿔야 겠다. 애초에 판단하고 검증하는 일은 오래 붙어 있는다고 잘 되는 종류의 노동이 아니며, 결정에 도달하는 절차와 시간을 압축하고 실행에 더 많은 시간과 리소스를 녹여내야 한다. 고로 가설검증을 스스로 충분히 한다는 전제하 야근은 필수가 아니다.
번아웃은 커리어에서 가장 비싼 사고다. 회복에 6개월이 걸리면 사이클 두 바퀴가 통째로 날아가고, 그 기간에 시장가는 오르지 않는다. 갈아넣는 전략의 가장 큰 문제는 비윤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산술적으로도 손해라는 점이다.
오래 일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래 일하는지 여부로 조직을 판단하지 말라는 얘기다.
결론.
현재 내가 다니는 직장이 내 커리어에 피와 살이 되는지 점검하는 4가지 질문.
1/ 지금 하는 일이 내년에도 똑같은가.
2/ 내 위에 배울 사람이 남아 있는가.
3/ 실패의 비용을 회사가 감당해주는가 (= 실험이 허용되는가)
4/ 남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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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지난 Outsome FS6기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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