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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디자이너는 AI 앞에서 수동적으로 변하는가

쏟아지는 생성물의 파도 앞에서 손이 허공에 멈춘 디자이너. 생성 속도가 사고 속도를 앞지를 때 디자이너는 만드는 사람에서 고르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왜 이런 디자인을 결정하셨나요?"

 

"GPT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올해 초 오프라인으로 진행한 4주짜리 바이브 디자인(디자인 도구로서의 바이브 코딩) 코스, 어느 디자인 리뷰에서 나온 문답입니다. 실제 프로덕트까지 넘어오고 싶은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잘하고 싶은 개발자가 7:3 정도 모였죠. 생성이 사고의 속도를 앞지르는 시대가 실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처음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결정의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세 기수, 누적 30명을 가르치면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봤습니다. AI가 뽑아준 결과의 인과를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넘깁니다. 한 사람이면 성향이지만 여러 명이면 조건입니다.

 

디자이너가 개발자가 아니라서 바이브 코딩이 어려운 게 아니었더라고요. 사고까지 위임하고 돌아보지 않아서 생기는 창작의 논리 문제입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쪽이 미리 막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같은 화면을 앞에 두고도 어떤 사람은 결정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결과만 남깁니다. 그 갈림길을 만드는 조건이 두 개 있습니다.

 

조건 1. 시안에 매몰비용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시안 하나에 비용이 앞섰습니다. 시간이든 품이든 먼저 지불하고 나면 그 비용이 판단을 강제했습니다. 아까우니까 들여다봤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돌리면 그만입니다. 내 사고와 결정의 산출물에 매몰비용이 없어진 겁니다.

 

같은 시대의 두 작업대. 시안 하나에 시간과 품이 먼저 들어가던 때는 그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결과를 뜯어봤다. 재생성이 공짜가 되면 뜯어볼 이유가 사라지고, 판단 없이 폐기와 재생성만 반복된다.

 

매몰비용이 사라진 자리에 인지적 게으름이 먼저 옵니다. 미리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다음이 열 번 돌리면 하나는 걸린다는 도박적 기대심리입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입니다.

 

생성이 사고를 앞지르는 순서 역전을 우리가 처음 겪고 있습니다. 도구 숙련으로는 좁혀지지 않는 간격입니다.

 

생성은 기계의 속도로 쏟아지고 사고는 사람의 속도로 걷는다. 둘 사이에 벌어진 간격만큼 판단이 비어 있게 되고, 이 간격은 도구 숙련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직군을 가리지 않습니다. 디자이너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붙습니다.

 

조건 2. 암묵지는 모델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암묵지에 크게 의존해 일합니다. 의존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숙련은 원래 그렇게 쌓입니다. 다만 암묵지에만 기대면 자기복제가 되고 확장성이 떨어집니다.

 

혼자 작업할 때는 이게 드러날 일이 없죠. 손이 알아서 하니까요.

 

모델은 손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언어만 받습니다. 판단의 순서를 말로 옮기지 못하면 남는 지시는 "예쁘게", "감도 있게" 정도입니다.

 

디자이너의 판단 대부분은 손에 쌓인 암묵지다. 모델은 손을 빌려주지 않고 언어만 받기 때문에, 말로 옮기지 못한 판단은 경계를 넘지 못하고 가는 실 몇 가닥만 모델에 전달된다.

 

두 조건이 겹치면 만들 수는 있는데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디자이너인데 내 디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깁니다. 결과가 좋아도 다음이 없습니다. 좋았던 이유를 모르면 재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가 왜 당장의 문제인지는 채용 공고를 보면 압니다.

 

채용 시장이 말하는 AI 네이티브는 도구 숙련이 아니다

 

호주에서 일하는 학습자 한 분이 받은 공고의 첫 문장이 이랬습니다.

 

"우리는 픽셀 노가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AI 프로덕트 아키텍트처럼 움직이는 디자이너가 필요합니다."

 

원문 표현은 pixel-pusher였습니다. 디자인 공고에서 AI 스킬을 요구하는 비율은 2년 사이 3%에서 32%로 올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AI 네이티브는 무엇을 왜 만드는지 먼저 정하고 그 결정을 모델이 알아들을 언어로 넘기는 사람입니다. 아키텍트라는 단어가 그 뜻입니다.

 

국내는 조금 다르게 움직입니다. 새 직함 대신 기존 프로덕트 디자이너 공고의 요구 범위가 넓어집니다. 이름이 바뀌면 무엇을 준비할지 분명한데 이름은 그대로고 기대치만 오르니 준비할 것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교육 시장은 도구 단위로 팔린다

 

채용 시장이 이렇게 움직이는 동안 교육 시장은 다른 것을 팝니다.

 

디자인 교육 시장이 마케팅 에이전시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인플루언서와 시기성 있는 주제를 섞으면 빠르게 퍼집니다. 다만 유효기간이 짧고 학습자 피드백이 깊게 반영되기 어렵죠. 남는 건 지금 안 들으면 놓칠 것 같은 피로한 FOMO입니다.

 

새 도구가 나오면 새 코스가 열립니다. 그런데 도구는 계속 바뀌어도 막히는 지점은 그대로더라고요. 앞의 두 조건은 도구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채용 데스크는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교육 진열대는 도구 사용법을 판다. 도구는 계속 교체되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병목은 양쪽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다.

 

채용은 설명을 요구하는데 교육이 내놓는 건 도구 사용법입니다. 가르치는 쪽이 답할 차례입니다.

 

가르쳐야 할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상태다

 

설명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법입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판단 근거가 저절로 남게 하는 설계라서, 다 만든 뒤에 따로 회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준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결정을 왜 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말로 옮길 수 있는가." 첫 장면의 리뷰에서 제가 물은 것도 이 기준이었고 답이 막힌 자리도 여기였습니다. 옮기지 못하면 결과가 좋아도 일회성입니다. 근거가 남지 않으면 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저절로 남는 작업대. 시안마다 날짜 붙은 결정 태그가 따라붙고 그 근거가 결정 기록 한 권으로 쌓이면 따로 회고하지 않아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언제든 꺼낼 수 있다. 좋았던 이유를 알아야 재현이 가능하다.

 

5개월간 오프라인 코스를 돌리며 확인한 병목과 해법을 온라인 플랫폼에 담았습니다. 이름은 Vibe Design Lab입니다.

 

랩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도구는 계속 바뀌는데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공유할 언어는 아직 없습니다. 여기서 연구할 것이 생깁니다. 디자인을 설명 가능한 어휘 체계로, 그러니까 구현의 메타 언어로 정리하는 일입니다. 감각으로만 남아 있던 판단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서 설명하고 넘길 수 있는 형태로 쌓습니다. 설명할 수 있는 상태는 이 언어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디자인 의도를 키워드 단위로 쪼갠 택소노미를 먼저 잡습니다. 그 위에 모델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준을 잡아주는 디자인 시스템을 얹고 둘을 실무 산출물로 잇는 프로세스까지 다룹니다.

 

https://vibedesignla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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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디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 · Product Owner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 바이브 디자인 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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