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지나 맞은 예측
2024년 3월, 저는 테크잇슈를 통해 한 가지 예측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올해 안에 구글과 애플 두 기업 중 최소 한 명의 CEO가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라고요. 빠르게 변화하는 AI 시대에 두 리더의 리더십 스타일이 결국 발목을 잡을 것이라 진단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저는 구글은 제미나이의 성과에, 애플은 연례 개발자 행사인 WWDC24의 발표에 각 CEO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덧붙였는데요. 결과는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제미나이가 빠르게 궤도에 올라타며 반등에 성공한 반면, 애플은 WWDC24에서 별다른 임팩트를 주지 못했습니다. WWDC는 과거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했던 '혁신의 무대'로 상징되는 행사인데요. 특히 ChatGPT 출시 이후 모두가 '생성형 AI 퍼스트'를 외치던 상황에서, 유독 조용했던 애플이었기에 이번만큼은 강력한 한 방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야심 차게 공개한 '애플 인텔리전스'는 시장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 실망감은 주가 하락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존 터너스와 팀 쿡 (출처: 애플)
이후에도 AI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애플은, 결국 지난 4월 20일 팀 쿡 애플 CEO의 공식 사임 발표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예측보다 2년이 늦었지만, 결국 애플의 수장이 먼저 교체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후임자는 존 터너스(John Ternus)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수석 부사장. 그는 오는 9월 1일부터 애플의 8대 CEO로 공식 취임합니다.
애플은 이번 인사를 두고 이사회 만장일치로 승인됐으며, 오랜 시간에 걸친 신중한 승계 계획의 결과라고 설명했는데요. 이 정도면 제 예측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숫자로 알아보는 팀 쿡의 15년
비록 AI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며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팀 쿡의 15년은 결코 폄하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경영 성과로만 본다면 스티브 잡스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어떤 성과들이 있었는지 숫자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4배
팀 쿡 취임 당시 애플의 연 매출은 약 1,080억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현재는 약 4,160억 달러로 무려 4배가 상승했습니다. 아이폰 의존도가 높았던 애플을 애플워치, 에어팟, 비전 프로 등으로 다변화시킨 공이 컸습니다.
2. 11배
같은 기간 애플의 시가총액은 약 3,500억 달러에서 4조 달러로 무려 11배가 성장했습니다. 1조 달러, 2조 달러, 3조 달러 최초 돌파의 타이틀은 항상 애플의 몫이었습니다.
3. 1,000억 달러
매출과 시가총액의 상승은 단순히 하드웨어 판매만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닙니다. 아이클라우드, 애플페이, 애플TV, 애플뮤직 등 마진이 높은 서비스 사업을 꾸준히 확장한 덕분인데요. 그 결과 애플의 서비스 부문 매출은 연간 1,000억 달러를 웃도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4. 28년
팀 쿡은 1998년 애플에 합류해 28년간 회사와 함께했습니다. 이중 15년을 CEO로 재직한 것인데요. CEO에서 내려온 뒤에도 이사회 집행의장으로 남아 영향력을 유지할 예정입니다.
사실 이러한 숫자를 달성하는 동안, 애플 특유의 혁신이라 부를 만한 장면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대목에서 팀 쿡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팀 쿡은 애플 입사 직후 공급망관리(SCM)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성장했는데요. 당시 100개의 달하던 부품 공급사를 20여 개로 줄이고, 재고 일수를 70일에서 10일 수준까지 낮추며 애플을 SCM 분야 세계 1위로 만들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의 뿌리를 내렸다면 팀 쿡은 그 뿌리가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좋은 거름과 환경을 제공한 셈입니다.
존 터너스, 혁신을 되찾을 카드
앞서 언급했듯, 팀 쿡의 강점은 '경영의 효율화'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산업의 흐름을 보면 더 이상 효율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ChatGPT 이후 벌어진 AI 경쟁은 '누가 더 빨리, 더 과감하게 혁신하느냐'의 싸움으로 변했고, 애플은 이 흐름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다시금 기술적 혁신이 필요한 때인 것이죠.
그런 맥락에서 새 CEO 존 터너스의 등판은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입니다. 1975년생으로 올해 만 50세의 엔지니어인 존 터너스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학부 시절에는 대학 수영팀 선수로도 활약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그의 졸업 프로젝트입니다. 사지마비 환자가 머리 움직임만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계식 식사 보조 팔을 개발했는데요. 기술과 인간 중심 설계의 결합이라는 그의 철학이 이미 그때부터 드러나 있던 셈입니다.
졸업 후 그는 'Virtual Research Systems'라는 스타트업에서 VR 헤드셋을 설계하는 기계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선 첨단이었던 VR과 디스플레이 기술을 다룬 이 경험은 훗날 비전 프로 개발에도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WWDC23에서 발표하고 있는 존 터너스 (출처: Apple Youtube)
2001년 애플에 입사한 이후 그의 궤적은 화려합니다. 애플 시네마 디스플레이를 시작으로 아이패드, 에어팟, 아이폰 등 주요 제품 대부분의 개발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맥의 인텔 칩에서 애플 실리콘으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회사 안팎의 신뢰를 얻었는데요. 2013년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부사장, 2021년 수석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진에 합류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그의 기술적 배경입니다. VR 헤드셋 엔지니어로 시작해 애플 실리콘 전환을 성공시킨 인물이라는 건, 그가 단순한 하드웨어 전문가가 아니라 AI 시대에 필요한 연산 인프라까지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애플이 AI 연산을 위해 자체 칩 설계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터너스의 등판은 단순한 세대교체 이상의 전략적 선택으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공든 탑보다 빌딩이 필요한 때
팀 쿡이 ChatGPT 출시 이후 3년 간 CEO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지난 15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탑 덕분입니다. 애플 생태계를 견고하게 구축해 둔 덕에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4조 달러에 육박하는 시가총액을 기반으로 흔들림 없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하드웨어로 탑을 쌓을 수는 있겠지만, AI는 초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기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존 터너스가 새 CEO로 낙점된 것은 바로 이 초고층 빌딩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함이죠.
생성: GPT-5.2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WWDC24가 팀 쿡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 말했는데요. 실제로 당시 발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했습니다. 반대로 이번 WWDC26는 새로운 CEO 교체의 성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존 터너스의 공식 취임은 9월로 WWDC26 이후지만, 현시점에 교체 소식이 발표된 만큼 이번 행사에는 그의 비전과 방향성이 상당 부분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시리의 대규모 개편이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AI 시대 들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온 서비스가 바로 시리였기 때문입니다. WWDC26의 성패는 시리가 얼마나 달라졌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애플이 탑을 넘어, 빌딩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2026년은 그 변화를 가늠할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테크잇슈는 IT 커뮤니케이터가 만드는 쉽고 재밌는 IT 트렌드 레터입니다.
IT 이슈 모음과 심층 분석 아티클을 전달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