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갑·을’의 얄미움
이전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분들과 프리랜서 단기 계약을 맺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변호사님의 검토를 받은 표준계약서를 열심히 발송하고 구글 드라이브에 차곡차곡 정리하던 중,
어떤 한 프리랜서 분께서 조심스럽게 메일을 주셨습니다.
“‘갑’과 ‘을’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오랜 기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듣고 나니, 서류상의 편의라는 핑계 뒤에 숨은 단어 하나가 상대에게 얼마나 무거운 수직적 위압감을 줄 수 있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습니다.
관점의 전환: ‘갑·을’ 대신 ‘동(同)’과 ‘행(行)’
그래서 계약서의 단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기업 간의 대형 B2B 계약은 조항을 바꾸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우선 프리랜서분들이나 유연한 파트너사들과의 계약서부터 ‘동(同)’과 ‘행(行)’이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발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두 단어를 바꿨을 뿐인데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계약서 첫 조항부터 “본 계약은 ‘동’과 ‘행’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라고 시작하는 순간, 비즈니스는 단순한 용역 매매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로 탈바꿈했습니다. 쓰는 저조차도 “아, 이거 진짜 좋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계기였습니다.
비즈니스는 갑을병정 놀이가 아니라 ‘동행’을 찾는 과정
매출이나 프로젝트가 급하다고 해서 모든 ‘갑’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어려운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저에게 힘이 되어준 대표님들이 계셨습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곳이 있으면 늘 이렇게 말씀해 주시곤 했죠. “OO님, 그런 무례한 파트너사와는 같이 일 안 하셔도 돼요. 억지로 진행해 봤자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니까요.”
수주나 당장의 계약보다 사람을 먼저 지켜주셨던 좋은 리더들 덕분에, 퇴사 후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안부를 묻고 지내는 소중한 인연들을 곁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라 물회가 제철인 요즘입니다.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가끔 이 물회만큼이나 ‘무례(물회)한 분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다시금 고민하게 됩니다. 이들을 기존 방식대로 철저히 ‘갑·을’로 묶어 비즈니스로만 대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걷어내고 ‘동행’할 수 있는 진짜 파트너를 찾는 데 에너지를 쓸 것인가.
여러분들의 비즈니스 계약서에는 지금 어떤 단어가 적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