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제로인사이트
격주 목요일, 창업가들의 인사이트를 메일로 전해드립니다.
창업가들의 Day 0로 돌아가, 그들의 ‘처음’에 담긴 고민과 배움을 살펴봅니다.
“빨리 결판을 낼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어요.”
오늘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한 날, 이상하게 해낸 일보다 못 한 일이 먼저 떠오르죠. 그런 날에도 분명 해낸 일이 있는데 말이에요. 계획을 촘촘히 세우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고요.
그 ‘해냈다’는 감각의 힘을, 모바의 김병훈 대표는 누구보다 절실히 배웠습니다. 사법시험에 5년 동안 매달렸지만 다섯 번을 내리 떨어졌고, 한참 동안이나 ‘시험에 붙을 사람은 따로 있다’는 패배감에 갇혀 지냈거든요. 그런 그를 다시 일으킨 건 ‘작은 성공’이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해냈다는 성취감이 사람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는 걸 몸소 깨달은 거죠.
아치 캘린더(Arch Calender)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계획을 다 못 지킨 날에도 작은 성공 하나로 다시 하루를 붙잡게 해주는 캘린더죠. 그런데 이 캘린더를 시장에 내놓는 방식이 좀 남달랐습니다. 공짜가 당연한 캘린더 앱을 유료화했고, 시드투자 1건만으로 605일을 클로즈드 베타*로 버텼어요. 잘 쓰이지 않던 연동 기능은 과감히 덜어냈고요. 그렇게 기능을 비우면서, 구글과 애플이라는 거대한 고래가 버티고 있는 캘린더 앱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빼고, 버티고, 좁히는 선택들로 그는 무엇을 본 걸까요. 오늘은 모바 김병훈 대표의 Day 0로 돌아갑니다.
*클로즈드 베타(Closed Beta): 정식 출시 전에 초대받은 일부 사용자에게만 제품을 열어, 피드백을 받으며 다듬는 비공개 시험 기간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사법시험 5수생, 알을 깨다
2. 빨리 가지 않기로 했다
3. 기능을 뺄수록 또렷해진 것
4. 고래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1. 사법시험 5수생, 알을 깨다
Q. 대학 때 법학을 전공하셨죠. 어떻게 그 길을 선택하게 되셨어요?
그때는 제가 공부를 좀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수능 시험이 고3 내내 봤던 모의고사 중에 가장 성적이 잘 나왔거든요. 그래서 나는 앉아서 엉덩이 싸움 하는 데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죠. 법학과를 가면 사법시험을 볼 수 있고, 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면 안정적으로 돈을 버니까, 그 길로 쭉 가면 되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깊게 고민해서 고른 건 아니고, 마침 점수대도 맞아서 간 거죠.
Q. 그럼 사법시험은 언제부터 준비하셨어요?
22살부터 휴학하고 바로 준비했어요. 군대도 미뤘고요. 붙으면 법무관으로 갈 수 있으니까 뭐든지 다 스트레이트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두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때 처음 생각해보게 된 거예요. ‘내가 이게 왜 떨어지지?’ ‘이게 나랑 안 맞나?’ 그렇게 5년 동안 다섯 번 시험을 봤어요. 그러면서 자신감도 점점 떨어져갔죠.
그런데도 미련이 계속 남더라고요. 군대 가기 직전엔 법학을 전공한게 너무 아쉬워서,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법 관련 인턴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 무렵부터 마음 한편으로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너무 내가 한쪽 길만 생각해온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이 길이 안 맞으면 내가 맞는 건 뭘까?’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고민 안 하고 살아온 게 그제야 부채감으로 밀려왔어요. 사춘기가 없었다는 게 그런 거예요. 그냥 사시(사법시험) 붙으면 된다, 그 길만 보고 산 거죠. 그래서 28살에 군대에 가면서, 거기서는 무조건 다양한 걸 도전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Q. 창업이라는 세계를 처음 만난 게 군대였다고요.
제가 늦은 나이에 입대하니까 22살, 23살 친구들이랑 같이 군생활을 했어요. 의경으로 입대했는데, 거기서 스타트업 창업을 하고 온 친구들을 만난 거예요.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 이렇게 창업이라는 걸 할 수 있구나.” 마침 그 무렵에 고시반에서 같이 공부하던 형이 유명한 금융 스타트업 창업자 분을 알고 있어서 그 회사 이야기도 듣게 됐고요. 그러면서 IT 서비스를 만들어서 창업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씩 알게 됐죠.
그래서 전역하고 무작정 구글코리아 프로그램에 지원했어요. 유퀴즈에서도 한번 소개된 정김경숙 전무님이 만든 프로그램인데, 50명을 뽑아 2주간 교육하고 마지막 날 IR 데이를 하는 거였어요. 당시 제가 아는 건 법밖에 없으니 아이템도 법으로 잡았죠. 사람들이 직접 겪은 법률 문제 해결 경험을 잡플래닛처럼 모으는 커뮤니티였어요.
Q. 그런데 그 첫 도전에서 1등을 하셨어요.
진짜 깜짝 놀랐죠. 처음엔 50명에 든 것만 해도 감사했거든요. 1등을 하면 미국 구글 본사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저는 친구들한테 그러고 다녔어요. ‘어차피 될 놈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재미로만 하자.’ 그 정도로 패배주의가 심했어요. 발표 전날까지도 안 한다고 할까 고민했고요. 그런데 결국 1등을 해서, 얼떨결에 구글 본사까지 가게 됐죠.
Q. 그 정도면 그 아이템으로 바로 창업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때 제 나이가 31살이라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회사를 안 가면 영영 못 갈 것 같았거든요. 1등해서 상도 받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창업을 하느냐는 완전 딴 얘기였어요. 남 일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이건 취업에 좋은 스펙으로 쓰자 하고 넘겼어요. 구글 본사까지 다녀오니 외국계 회사가 좋아 보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창업은 내 얘기가 아니라며 가슴 한 구석에 밀어놨어요.
첫 직장은 로지텍(Logitech)으로, 게이밍 기기 마케터로 입사했어요. 좋은 회사였는데, 제가 뭘 안 해도 글로벌 포트폴리오가 워낙 좋아 회사가 잘됐어요. 저는 그게 좀 재미가 없더라고요. 구글 프로그램에서 직접 기획하고 발표했을 때의 그 아드레날린이 계속 남아 있었나 봐요.
Q. 이후에도 창업 전에 2번 정도 이직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로지텍을 다니면서 언젠가 창업하기로 마음은 먹었었어요. 그런데 바로 실행하지 못한거죠. 계속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창업한다고 말을 하고 다녔어요. 내뱉은 말 때문에라도 하게 되려고요. 이직 면접에서도 솔직하게 창업하려고 왔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이직한 회사에서 태헌님(공동 대표)을 처음 만나 가까워졌어요. 저는 제가 가진 강점이 뭔지 아는데, 그게 엔지니어링이나 좋은 프로덕트를 알아보는 감각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런 걸 가진 사람이랑 꼭 함께 창업하고 싶었는데, 태헌님이 딱 그런 사람이었죠. 트렌드도 엄청 잘 파악하고, 대중의 니즈가 어떤건지 너무 잘 알더라고요. 무엇보다 엄청 정직하고 양심 있는 사람이라 신뢰가 갔어요. 그래서 태헌님께 함께 창업하자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PM(Product Manager) 직군은 꼭 직접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번 더 이직해서 회사 생활을 했어요. 개발자는 어떻게 뽑고 제품은 어떻게 만드는지, 제품의 한 사이클을 돌려보는 걸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창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Q. 그렇게 시작을 두려워하던 창업을, 결국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PM으로 직무 전환을 준비하던 시기에 토스 PO(Product Owner) 면접을 봤는데, 거기서 이승건 대표님이 면접에 들어오셨었어요. 면접 도중에 그분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창업할 거면 지금 하라”고. 공부를 오래 한 사람은 빠르게 도전하지 못하고, 시험공부 하듯이 준비하고 결과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데, 창업에는 시험이 없고 사용자가 답을 주는 거라고 하셨어요. 저의 성향을 완벽하게 간파하신 거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데미안」인데, 돌아보면 저는 진짜 알을 못 깨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오랜 기간 창업을 망설이다가 2023년 11월에 드디어 회사를 나와서 ‘모바’를 창업했는데, 그때는 오히려 불안한 느낌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 드디어 했네’, ‘드디어 알을 깼구나’ 이런 홀가분함이 가득했고, 그제서야 진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간 느낌이었어요.
💡 Insight Note:
정답이 있는 세계에 오래 머문 사람은,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서 자기 길이 새롭게 시작되기도 한다. 여섯 번의 시험 낙방 끝에 “나는 왜 안 되지”를 처음 물어본 순간, 김병훈 대표의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 혹시 당신도 지금 인생의 정답을 찾고 있진 않나요? 내가 지나온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이 있나요?
2. 빨리 가지 않기로 했다
Q. 모바를 시작하며 처음 들고나온 아이템은 무엇이었나요?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건 협업툴이었어요. 제품이 없을 때부터 데모 영상을 만들어서 콜드 메시지로 세일즈를 했는데, 그걸로 600만 원까지 매출을 내기도 했죠. 그런데 저희 제품을 구매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PM 직군이었어요. 저도 PM 직군이었으니까 당시 제품에 제 페르소나가 많이 반영된 것 같기도 해요. PM은 이해관계자가 많잖아요. 써야 할 툴은 많고, 기록은 해야 하고, 그런데도 자꾸 뭔가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PM을 위한 협업툴로 서비스의 방향이 좁혀졌어요.
그렇게 처음 만든 제품 형태는 캘린더를 대시보드처럼 쓰는 형태였어요. 인박스에 할 일을 모아두고, 캘린더 위에서 정리하고 계획하고 실행까지 한 번에 하자는 거였죠. 그때 저희 무기는 연동이었어요. 노션(Notion), 지라(Jira), 슬랙(Slack), 지메일(Gmail)처럼 PM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툴에서 생긴 일들을, 캘린더 인박스 하나로 모아주는 거예요. 여러 툴을 왔다 갔다 하느라 버리는 시간이 한 달에 스무 시간이 넘는다고 봤거든요. 그걸 캘린더 한곳에서 풀어주는 게 핵심이었어요. 협업툴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한 번에 전부 못 만드니까, 버티컬로 하나씩 서비스를 붙여 나가려고 생각한 거죠.
Q.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은 투자를 받아 회사를 빠르게 키우는데 집중하는데, 대표님은 런웨이만 먼저 쌓아두고 출발하셨어요.
이게 사실 제 성향이랑도 연결돼 있어요. 저는 사법시험을 5년이나 준비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빨리 뭔가 결판내는 데는 영 소질이 없어요. 장기 레이스에서 빛나는 타입이라고 제 자신에 대해 늘 생각해왔고, 태헌님도 그런 결이 있었거든요. SaaS(Software as a Service) 제품이 원래 그렇게 오래 걸리는 싸움이기도 하고요. 초기에 저희가 벤치마크한 노션이나 아사나(Asana), 투두이스트(Todoist)도 다 10년 가까이 해서 빛을 본 서비스들이잖아요. 그러니 빨리 결판이 날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회사가 오래 버틸 수 있는 구조부터 만들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자본금부터 깔았죠. 투자금은 초기에 스파크랩에서 받은 소규모 시드 투자가 전부예요. 대신 예비창업 대출, 팁스(TIPS), 신용보증기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받은 지원금을 더해서 자본금을 모아뒀어요. 전체적으로 3년 정도의 런웨이는 확보하고 시작한거죠.
Q. 그 선택이 605일이라는 긴 클로즈드 베타로 이어졌고요.
정식 출시를 1년 반이나 준비할 줄은 몰랐어요. 하다 보니 계속 느려진 거죠.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제품 품질이 안 올라오니까요. 그래도 조급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오래 갈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 대신 클로즈드 베타에서도 계속 유료로 서비스를 운영했어요. 돈을 내는 분들의 성향을 보고 싶었거든요. 슈퍼휴먼(Superhuman)*의 그로스 방식을 많이 참고했어요. 창업자가 1:1로 고객을 만나고, 거창한 런칭 없이 가는 거요. 캔바(Canva) 창업자가 말한 것처럼 정식 런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고, 그냥 지나가는 하루처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슈퍼휴먼(Superhuman): 라훌 보라가 만든 유료 이메일 앱. 창업자가 신규 사용자를 직접 1:1로 온보딩하고, 대기자 명단으로 가입을 천천히 열며, 빠른 성장보다 제품-시장 적합성(PMF)부터 끌어올린 그로스 방식으로 유명하다.
Q. 보통 캘린더는 공짜로 쓰는데, 베타 때부터 돈을 받으셨어요.
캘린더는 돈 내고 쓴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서비스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처음부터 돈을 내고 쓰는 캘린더를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무료로 많이 모아놓고 나중에 유료화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결제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가격은 진짜 많이 바꿨어요. 자신이 없을 때는 커피값 정도인 월 4천 원부터 시작했다가, 이 정도면 더 받아도 되겠다 싶어서 월 1만 5천 원까지 올렸는데 그 가격대에선 결제가 잘 안 이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6개월에 5만 원으로도 해봤다가, 나중에 6개월 7만 원으로 픽스했어요. 그렇게 계속 실험을 반복하다 보니 결제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딱 갈리는 지점이 보이더라고요. 그 지점이 여기구나 싶어서, 정식 출시 이후에는 글로벌 고객 대상으로 월 8달러로 운영하고 있어요.
💡 Insight Note:
오래 걸릴 싸움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은 자원을 쓰는 법부터 다르다. 김병훈 대표는 최소한의 투자금과 외부 지원금으로 3년 정도의 런웨이를 확보했고, 605일에 걸친 유료 베타로 고객이 돈 낼 가치가 있는 제품인가를 천천히 확인했다.
→ 당신이 뛰는 건 단거리인가요, 장거리인가요? 그 답에 맞게 시간과 돈을 쌓고 있는지 돌아본 적 있나요?
3. 기능을 뺄수록 또렷해진 것
Q. 협업툴에서 지금의 개인용 캘린더로 방향을 튼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클로즈드 베타 때도 계속 유료로 받았으니까, 돈을 내는 분들이 누구인지를 유심히 봤어요. 그런데 회사가 공식 툴로 도입해서 단체로 쓰는 게 아니더라고요. 회사가 사주지 않으니, 개인들이 각자 자기 업무를 쳐내려고 직접 결제해서 쓰는 거였어요. 회사에는 어차피 구글 캘린더도 있고 무료 툴을 쓰는게 많으니까, 조직 차원의 수요보다 개인이 혼자 떠안은 문제가 훨씬 컸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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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주 목요일, 가만히 있어도 창업가들의 인사이트가 내 메일함으로 들어옵니다.
격주 목요일, 창업가들의 인사이트를 메일로 전해드립니다.
창업가들의 Day 0로 돌아가, 그들의 ‘처음’에 담긴 고민과 배움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