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실에서 종종 이런 장면을 봅니다.
대표가 묻습니다.
> “지난달에 새로 들어온 고객사, 가입 처리는 다 끝났죠?”
A 대리가 답합니다.
> “네, 저희가 가입신청서 초안 작업까지 끝냈습니다.”
B 대리가 이어 받습니다.
> “저는 고객사 담당자랑 신청서 확정해서 넘겼고요”
C 팀장이 덧붙입니다.
> “계약 등록은 저희 쪽에서 했고, 시스템 셋업도 어제 끝났습니다.”
대표가 잠시 생각합니다.
> “그러면... 그 고객사는 지금 어느 단계까지 온 거에요?”
세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자기 파트까지만 답했습니다.
A대리에게 그 일은 ‘신청서 작성’이고, B 대리에게는 ‘고객 커뮤니케이션’이며, C팀장에게는 ‘계약 등록’입니다. 누구에게도 그 일은 ‘신규 고객 가입’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아닙니다.
이런 풍경이 한 회사에서 반복되기 시작하면, 매뉴얼을 아무리 만들어도 업무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지 못합니다. 업무가 흐름으로 인식되지 않고 조각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면, 매뉴얼은 그 조각마다 따로 만들어지고 조각과 조각 사이에 무엇이 빠졌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
매뉴얼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를 흐름으로 보고 있지 않은 겁니다.
생각보다 많은 기업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직원 30명, 50명, 70명 ...
매출도 잘 나오고, 도구도 다 갖춰져 있고, 매뉴얼도 만든다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인터뷰를 돌려보면, 거의 모든 회사에서 같은 패턴이 보입니다.
일은 많이 돌아가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아무도 전체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매뉴얼/SOP를 만들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한 가지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실제 중소기업의 업무를 재구조화한 경험을 토대로요.
노션도 있고, 슬랙도 있고, 매뉴얼도 있는데
성장기에 접어든 회사들을 보면, 도구가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노션, 슬랙, 지라, 아사나, 네이버웍스 ...
이미 두세 개씩 깔려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문서 정리하라고 몇 번이고 말했고, 매뉴얼 만들라고 시간도 줬습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면, 거의 모든 회사에서 똑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 “그거 어디 있죠?”
> “OO에 있을 거에요.”
> “어디요?”
> “어... 잠시만요.”
노션 페이지는 수백 개로 늘어나 있는데, 정작 찾고 싶은 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비슷한 주제의 문서가 부서마다 따로 만들어져 있고, 작년에 만든 매뉴얼은 누가 어디에 올렸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각 팀의 업무 리스트는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데, 그 리스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직원들 사이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답은 “공용폴더에 있을 거에요.”입니다.
이쯤 되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도구가 없어서 매뉴얼이 안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업무를 ‘조각’으로 보고 있는 회사는 매뉴얼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문제를 세 단계로 분리해서 봅니다.

> 표면 문제 : 매뉴얼이 없다
> 한 단계 위 : 매뉴얼을 만들어도 찾을 수 없다
> 진짜 문제 : 회사가 자기 업무를 흐름이 아니라 조각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표님들은 여기서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조각이라뇨? 우리 회사 업무 다 돌아가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돌아가고 있죠.
그런데 돌아가는 것과 흐름으로 인식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조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 컨설팅 현장에서 자주 보이는 풍경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각 팀이 자기가 하는 일만 리스트업해서 관리한다 — 그런데 그 리스트들끼리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어디에도 없다.
- 한 명에게 전체를 물어보면 자기 파트까지만 답한다 — 그 일이 시작해서 끝나는 전 과정을 한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같은 일이 여러 팀을 거쳐 가는데, 팀마다 그 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 신청 접수, 고객 응대, 계약 등록… 이게 같은 한 건의 일이라는 걸 아무도 명시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 어떤 일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가 없다 — 대표가 묻기 전에는 진척이 어디서 막혔는지 보이지 않는다.
- 새 입사자가 들어오면 자기 팀의 조각만 배우게 된다 — 그 조각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일하면서 알아서 눈치껏 익혀야 한다.
이 다섯 가지 풍경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회사가 자기 일을 흐름으로 묶어서 보고 있지 않다는 것.
돌아가는 회사의 대부분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돌아갑니다.
5년차 김 과장이 흐름 전체를 머릿속에 갖고 있고,
팀장이 조각과 조각 사이를 챙기고 있어서 돌아갑니다.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 “어떻게든 돌아가던 것”이 멈춥니다.
이 상태에서 매뉴얼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각 팀이 자기 조각의 매뉴얼만 만듭니다.
A팀이 만든 신청서 작성 매뉴얼, B팀이 만든 고객 응대 매뉴얼, C팀이 만든 계약 등록 매뉴얼. 세 개의 매뉴얼이 따로 존재하는데, 이 셋이 같은 한 건의 흐름이라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입사원이 신청서 작성 매뉴얼을 봐도,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매뉴얼은 흐름 위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흐름이 보이지 않으면, 매뉴얼은 만들어지는 순간 조각으로 흩어집니다.
200여개의 업무를 40개로 압축했더니, 매뉴얼이 보입니다
약 50명 규모의 중소기업의 한 지원부서의 업무 체계화를 위한 컨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회사의 매출은 안정적이었지만 타 부서에서는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서의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부서장과 구성원들은 말했습니다.
“일이 많은 건 알겠는데, 우리가 정확히 무슨 일을 얼마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구성원들 모두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끄집어내 봤습니다. 거기서 발견한 풍경은 이랬습니다.
- 각 팀이 자기가 하는 일은 깔끔하게 리스트업해 두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그 리스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는 어느 팀에도 없었습니다.
- 한 명에게 “신규 고객 가입은 어떻게 진행되요?”라고 물으면, 자기가 맡은 단계까지만 답했습니다. 그 앞 단계와 뒷 단계는 다른 팀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어떤 일은 사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건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이 같은 한 흐름의 일부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같은 회사 안에서, 사람마다 다른 지도의 다른 조각을 들고 일하고 있던 겁니다. 지원부서의 업무 리스트를 다 합쳤더니 약 200개가 됐습니다.
200개의 조각이 200개의 별개 업무로 인식되고 있던 거에요. 이 상태에서 매뉴얼을 만들면 200개의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고, 만들어도 흐름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이 됩니다. 그리고 매뉴얼이 필요없는 업무도 있을텐데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200개를 기능별 리스트가 아니라 업무 흐름의 관점에서 다시 봤습니다. 같은 흐름의 시작, 중간, 끝에 해당하는 조각들을 묶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청서 초안 작성”, “고객 커뮤니케이션”, “계약 등록”, “시스템 셋업”이 여러 팀에 흩어진 조각들이었는데, 이걸 ‘신규 고객 가입’이라는 하나의 단위업무로 묶었습니다.
> 단위업무 : 하나의 업무 흐름으로 묶이는 업무 단위
> 시작 트리거부터 완료 판정까지의 연속된 흐름을 하나의 일로 인식하는 단위
이렇게 묶고 나서, 단위업무 안에서 다시 단계별로 순서를 정리했습니다.
[신규 고객 가입(단위업무)]
- 1단계 : 신청 접수 (담당 A팀)
- 2단계 : 신청서 초안 작성 (담당 A팀)
- 3단계 : 고객 확정 커뮤니케이션 (담당 C팀)
- 4단계 : 계약 등록 (담당 C팀)
- 5단계 : 시스템 셋업 (담당 C팀)
- 6단계 : 완료 통보 및 인수 (담당 B팀)
각 단계마다 담당자를 명문화했고, 단계와 단계 사이의 인계 시점도 함께 정의했습니다. 이 작업을 200개 조각 전체에 대해 진행했습니다. 최종적으로 40개의 단위업무가 남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부서장이 처음에 말했던 “우리 부서가 무슨 일을 하는 부서인지”가 한 장으로 그려졌습니다. 40개의 단위업무. 그게 이 부서가 하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40개 위에서 비로소 매뉴얼/SOP 작성 우선순위가 정렬됐습니다. 빈도가 높지만 단계 사이 인계가 자주 누락되는 흐름, 비정기적이지만 흐름 전체가 망가지면 큰 손실로 이어지는 흐름, 새 입사자가 들어올 때마다 흐름 전체를 처음부터 설명해야 했던 흐름 등의 기준으로 40개 안에서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잡혔습니다.
매뉴얼 만들기는 그 다음 이었습니다.
도구를 도입하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세 가지
이 경험에서 나온 프레임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장기 회사가 노션/슬랙 같은 도구를 도입하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세 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첫째, 업무 인벤토리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을 전부 끄집어내야 합니다. 회의 메모, 카톡, 이메일, 머릿속에만 있는 일까지. 도구가 아니라 리스트가 먼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회사는 여기까지 와서 팀별 리스트만 가지고 있어요. 조각이 정리됐을 뿐, 흐름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흐름으로 묶기 (단위업무 정의)
조각들을 하나의 업무 흐름으로 다시 묶어야 합니다.
같은 흐름에 속하는 조각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 흐름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각 단계의 담당자는 누구이고 단계 사이의 인계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게 정의돼야 비로소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를 한 장에 그릴 수 있습니다. 이 작업 없이 매뉴얼부터 만들면, 만들어진 매뉴얼은 흐름이 보이지 않는 조각 매뉴얼이 됩니다.
셋째, 거버넌스
흐름과 매뉴얼은 만든 순간부터 낡기 시작합니다.
업데이트 사이클은 어떻게 되는지, 흐름이 바뀌었을 때 누가 매뉴얼을 수정하는지, 분기마다 점검하는 책임자는 누구인지.
이게 정해져 있지 않으면, 만든 사람이 떠나는 순간 흐름도 매뉴얼도 같이 사라집니다.
이 세 가지가 끝나야, 비로소 노션이든 슬랙이든 진짜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도구가 아니라 흐름의 복원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대표님들이 체계를 도입하려고 하실 때, 가장 먼저 떠올리시는 건 도구입니다.
“노션을 쓰자”, “슬랙을 도입하자”, “지라를 써보자”
그런데 컨설팅 현장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건 이겁니다.
체계는 도구를 깔아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흩어진 업무 조각들을 다시 흐름으로 묶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보일 때, 비로소 도구가 진짜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성장기/확장기에 접어들었는데 업무가 잘 안보인다고 느끼시거나, 각 팀이 일은 하고 있는데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한 장으로 그릴 수 없다고 느끼시는 대표님이 계시다면, 매뉴얼을 만들기 전에 흐름부터 그려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 글은 성장기 회사의 체계 만들기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앞으로 6편에 걸쳐, 성장기 스타트업/중소기업이 체계를 잡으면서 마주치는 가장 흔한 문제들을 컨설팅 현장 경험을 토대로 풀어볼 예정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살아있는 SOP의 5가지 조건 – 만들어 놓고 안 쓰는 매뉴얼의 함정”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업무/SOP 체계 진단 컨설팅 문의는 [기획하는별] 채널(spark.612@daum.net)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