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파리에 2019년부터 2025년까지 약 6년간 살며 유학부터 패션업계를 거쳐 VC업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사는 암스테르담보다 더 잘 알고, 더 편하고, 애증이 넘치는 도시인 것 같아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파리의 Porte de Versailles 전시장에서는 유럽의 CES라고 부를만한 유럽 최대 컨퍼런스인 VivaTech 2026이 열리고 있습니다 (6월 17~20일). 180개국에서 18만 명이 몰려드는 이 행사가 왜 하필 파리인지, 오늘 그 이유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프랑스, 럭셔리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방산, 항공우주, 에너지, 제약, 자동차, 금융이 더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기업하면 루이비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GDP 기준 세계 7위 경제대국이자, 유럽에서 독일 다음으로 큰 산업 강국입니다.
프랑스를 이끄는 주요 산업과 대표 기업들을 보면 그 규모가 실감됩니다.
- 럭셔리 & 소비재: LVMH (루이비통·디올·셀린느 등 75개 브랜드), L'Oréal (세계 1위 뷰티 기업)
- 항공우주 & 방산: Airbus (본사는 툴루즈, 매출 856억 유로), Safran, Thales
- 에너지: Total Energies (글로벌 5대 에너지 기업), EDF (원전 강국 프랑스의 상징)
- 금융 & 보험: BNP Paribas, AXA, Société Générale
- 제약 & 헬스: Sanofi (유럽 최대 제약사 중 하나)
- 자동차: Renault, Stellantis (푸조·시트로엥 모기업)
이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인프라와 인재 풀이, 파리 스타트업 생태계의 든든한 토대가 됩니다. 대기업 출신의 엔지니어와 경영자들이 스핀오프를 만들고, 이들 기업이 스타트업의 첫 번째 고객이 되는 구조입니다.
Station F: 세계 최대 스타트업 캠퍼스. 샌프란시스코를 파리로 옮겨오자.
2017년 파리 13구, 오래된 기차역 건물 하나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바로 Station F입니다. 축구장 3개를 합친 크기인 34,000㎡ 부지에 1,000개의 스타트업이 동시에 입주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스타트업 캠퍼스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혼자 2백50만 유로를 투자해 만든 사람이 바로 자비에르 니엘 (Xavier Niel)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꽤 독특합니다. 정식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10대 시절 독학으로 해킹을 배웠고, 심지어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전화기를 해킹해 보안 취약점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재능을 사업으로 연결한 그는 인터넷 서비스 기업 Free를 창업해 프랑스 통신 시장을 뒤흔들었습니다. 2012년 월 €19.99에 무제한 데이터·통화를 제공하는 Free Mobile을 출시하며 기존 이통사들의 독점 구조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진에서 왼쪽: 자비에르 니엘, 가운데: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오른쪽: 프레데릭 아르노, 로로피아나 CEO 겸 블랙핑크 리사의 전 남친(?) - 약간의 여담을 붙이자면 자비에르 니엘은 베르나르 아르노의 장녀이자 현 디올의 CEO인 델핀 아르노와 결혼했습니다. 이 사진은 그가 그의 장인어른, 처남과 함께 찍은 셈이죠.
지금 그의 자산은 약 158억달러(한화 약 22조 원). 하지만 그가 더 유명한 것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Station F 외에도 코딩 부트캠프 École 42를 설립해 학비 무료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있으며,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Kima Ventures를 통해 매주 2개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Station F의 성과도 인상적입니다. 2025년 기준 Station F를 거쳐간 스타트업들은 누적 8,000개를 넘었고, 2025년 한 해에만 입주사들이 15억 유로를 조달했습니다. 현재 입주사의 70%가 AI 스타트업이고, 프랑스 AI 스타트업의 40%가 Station F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 중 Station F에서 인큐베이팅된 기업 중 가장 유명한 스타트업은 단연 Hugging Face 로 현재 45억 달러 밸류에이션의 글로벌 AI 인프라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Station F의 성공은 정부자금이 아닌, 민간주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국가에서 매주 Station F를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가 바뀐다고 스타트업 정책도 바뀐다면, 스타트업 심사가 엑싯해야하는 VC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라 구색맞추기에 집중한다면? 아마 Station F 또한 프랑스 정부 주도였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 프랑스는 AI 강국인가
"AI의 대부"라 불리는 얀 르쿤 (Yann LeCun)은 프랑스인입니다. 딥러닝의 핵심 이론인 합성곱 신경망(CNN)을 개발한 공로로 튜링상을 수상했고, 르쿤은 최근 Meta를 떠나 파리에서 AMI Labs (Advanced Machine Intelligence Labs)를 공동 창업했습니다. 35억 달러 밸류에이션으로 운영 중인 이 회사는 텍스트 예측에 그치는 기존 LLM이 아닌, 물리 세계를 이해하고 추론·계획할 수 있는 "월드 모델(world model)" AI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AI의 아버지가 은퇴 대신 파리에 새 판을 벌인 셈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해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2023년 4월, DeepMind와 Meta AI 출신 연구자 세 명이 파리에서 Mistral AI를 창업했습니다. 불과 18개월 만에 유니콘 지위를 달성했고, 2025년 9월에는 20억달러 시리즈 C를 140억달러 밸류에이션으로 마감했습니다. 창업자 아서 맨쉬(Arthur Mensch), 티모테 라크루아(Timothée Lacroix), 기욤 랑플(Guillaume Lample)은 프랑스 최초의 AI 억만장자들이 되었습니다.
Mistral의 전략은 독특합니다. GPT에 맞서 오픈소스 모델로 승부하며 유럽의 AI 주권을 강조합니다. BNP Paribas, AXA, Stellantis 같은 유럽 대기업들이 미국 빅테크 대신 Mistral을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리에는 Meta AI 리서치 랩(FAIR)도 있고, Google DeepMind의 유럽 거점도 있습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INRIA 같은 세계 수준의 수학·컴퓨터과학 연구기관들이 이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VivaTech: 유럽의 CES
유럽에도 CES 같은 테크 대축제가 있습니다. 바로 VivaTech (Viva Technology)입니다. 매년 6월 파리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2016년에 시작해 이제 유럽 최대 테크 컨퍼런스로 자리잡았습니다.
2025년 수치를 보면 그 규모가 느껴집니다:
- 방문객 180,000명, 171개국 참여
- 스타트업 14,000개 참가
- 연사 450명+ (젠슨 황, 얀 르쿤, 에마뉘엘 마크롱 포함)
- 300개 이상의 주요 발표 (AI, 양자컴퓨팅, 로보틱스)
단순한 전시회가 아닙니다. 대형 투자 계약과 파트너십이 이 행사에서 발표되고, 각국 정상들이 자국 스타트업을 홍보하러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VivaTech 2026이 파리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젠슨 황, 얀 르쿤, 제프 베이조스라는 화려한 라인업의 연사들이 VivaTech에서 어떤 얘기를 할 지 기대되고 있습니다.
파리는 럭셔리와 관광의 도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대 스타트업 캠퍼스, AI 연구의 중심지, 유럽 최대 테크 컨퍼런스 — 이 모든 것이 파리에 있습니다. 최첨단 산업군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기업들, 자비에르 니엘 같은 기업가의 선구자적 투자, 그리고 Mistral AI 같은 세계적인 스타트업의 등장이 파리를 유럽 스타트업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음번 파리 출장 때는 에펠탑보다 Station F를 먼저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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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파리에서 6년간 패션업계와 VC에서 경험을 쌓고 지금은 암스테르담에서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며 KOMPAS VC 라는 산업 기반 기술 펀드의 제조업 부문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유럽테크에 대해서, 저희 펀드와 포트폴리오에 대해서 더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제 링크드인으로 편하게 커피챗 요청주세요. https://www.linkedin.com/in/yoobin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