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의 직업은 저녁 한두 시간에서 시작됐습니다
“변호사인 내가 어떻게 5개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을까?”
책과삶 인터뷰에서 최유나 변호사가 던진 질문입니다. 그녀는 이혼 전문 변호사이자 90명 규모 로펌의 대표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면서, 드라마 <굿파트너>의 작가이고, 마일리지 아워라는 베스트셀러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 걸까?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비결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더 특별한 시간 관리법이 아니라, 본업이 끝난 뒤 남는 한두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영상의 댓글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지 않으면 결국 스트레스로 돌아오더라고요.”
분명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피곤한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운 날도 있습니다. 빈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을 때 생기는 감각입니다.
흘려보낸 시간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방향 없이 지나간 시간은 0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스트레스로 돌아옵니다.
9 to 6는 내 마음대로 쓰기 어렵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다르게 쓸 수 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회의를 하고, 누군가는 고객을 만나고, 누군가는 계속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합니다. 그 시간은 각자의 역할과 책임으로 채워져 있어서 마음대로 비우기도, 내가 원하는 대로 쓰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조금 다릅니다.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퇴근이 늦어도 8시부터 12시까지. 아주 바쁜 하루를 보낸 사람에게도 최소 한두 시간은 남습니다.
최유나 변호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는 변호사 업무에 집중하고, 퇴근 후 아이들을 돌보고 재우면 10시, 11시가 됩니다. 그때부터 한두 시간, 핸드폰만 보다 잠드는 시간이 아까워 시작한 것이 매일 한 시간씩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느냐,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쌓아가느냐입니다.
마일리지 아워, 방향이 있는 빈 시간
최유나 변호사는 이 시간을 ‘마일리지 아워’라고 부릅니다.
목표한 일을 위해 매일 자투리 시간을 항공 마일리지 적립하듯 차곡차곡 모은다는 뜻입니다.
2016년 첫 아이를 출산한 뒤부터 시작해 거의 10년 가까이, 최유나 변호사는 매일 한 시간씩 글을 썼습니다. 물론 매일 완벽하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주일에 사흘 쓰고 나흘은 못 쓰는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매일 완벽히 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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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쌓인 시간은 단행본 세 권, 드라마 작가, 유튜브 구독자 1만 명, 인스타그램 팔로워 20만 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전부 본업 밖, 저녁 8시에서 밤 12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시간이 꼭 거창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유나 변호사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만약 발레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쉬는 시간에 발레 영상을 보는 것조차 마일리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발레에 대한 책을 읽거나, 발레를 향한 마음을 글로 적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성만 있으면, 미디어를 소비하는 시간조차 내 방향으로 쌓입니다.
같은 한 시간입니다. 같은 영상 시청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있느냐 없느냐가 전부를 가릅니다.
빈 시간을 빡빡하게 채워서 더 바쁘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시간이 어디를 향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 쉬는 시간조차 자산이 됩니다.
방향 없는 빈 시간은 가장 쉽게 빼앗깁니다
우리는 캘린더에 회의와 약속은 잘 적습니다. 마감도 적고, 병원 예약이나 친구와의 약속도 놓치지 않으려고 캘린더에 남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시간은 다르게 대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일정도 없으니 자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습니다.
빈 시간에는 가장 쉬운 것이 들어옵니다.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처리하고, 잠깐만 보려던 영상을 계속 넘깁니다. 중요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쉰 것도 아닌데 시간은 지나갑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 때 이런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분명 시간이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한 것 같지 않지?”
이 감각은 단순히 생산성이 낮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지 못했다는 느낌은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만 생기지 않습니다. 제대로 쉬지 못했을 때도 생깁니다.
최유나 변호사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까 쉬어야 돼”라고 생각하며 켠 쇼츠가 두 시간이 되는 순간, 그건 쉼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할 걸 그랬다”는 후회로 그 스트레스가 더 커진다고 말합니다.
쉬는 것 같았지만 쉬지 못했고, 비어 있었지만 내 시간이 아니었던 겁니다.
빈 시간에 방향을 주는 법
그렇다면 빈 시간에 어떻게 방향을 줄 수 있을까요?
핵심은 캘린더의 빈칸을 그냥 두지 않는 것입니다.
비어 있다는 건 시간이 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그 시간이 무엇으로 쌓일지 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내 방향을 먼저 꺼내둡니다.
마일리지를 쌓으려면 먼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글쓰기든, 공부든, 오래 미뤄둔 사이드 프로젝트든, 언젠가 배우고 싶었던 취미든 괜찮습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그 방향을 밖으로 꺼내야 합니다.
당장 언제 할지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적어두면 잊히지 않습니다. 잊히지 않아야 쌓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빈 시간에 이름을 붙입니다.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가 비어 있다면, 그 시간을 그냥 “빈 시간”으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글쓰기”, “책 읽기”, “산책”, “생각 정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회복하기”처럼 이름을 붙입니다.
매일이 아니어도 됩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이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나중에 해야지”가 아니라 “이 시간에 하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빈칸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시간은 쉽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쌓인 시간을 돌아봅니다.
하루 한 시간은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몇 시간이 되고, 한 달이면 수십 시간이 됩니다. 1년이면 365시간입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캘린더를 돌아보면 내가 어떤 시간에 무엇을 조금씩 쌓아왔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시간은 회복으로 쌓였고, 어떤 시간은 배움으로 쌓였고, 어떤 시간은 좋아하는 일을 잊지 않기 위한 작은 인풋으로 쌓였을 겁니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캘린더에 남기면, 그 시간은 기록이 됩니다. 기록이 되면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빈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일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빈칸에 방향을 준다는 말은 캘린더의 모든 빈 시간을 할 일로 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모든 시간을 일로 채우려는 순간 하루는 더 쉽게 지칩니다. 어떤 빈칸은 회복을 위한 시간이어야 하고, 어떤 빈칸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건 빈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빈칸이 무엇을 위한 시간인지 아는 것입니다.
같은 빈 시간이어도 전혀 다르게 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간은 회복으로 남고, 어떤 시간은 배움으로 남고, 어떤 시간은 좋아하는 일을 잊지 않게 해주는 작은 인풋으로 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한 쉼이라면, 그 시간은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는 시간입니다.
하루를 잘 보낸다는 건 캘린더를 빽빽하게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빈 시간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캘린더의 빈칸을 보며 한 번만 물어보세요.
이 시간은 어디로 향하게 할까?
오늘은 몸을 쉬게 하는 쪽으로 둘 수도 있고, 오래 미뤄둔 생각을 정리하는 쪽으로 둘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아주 작게 건드려보는 시간으로 삼아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온함을 지키는 시간으로 남겨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이 내 선택이었다는 감각입니다.
빈칸은 시간이 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그 시간이 어디로 향할지 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같은 한 시간도 그냥 흘러가면 공백이 되고, 방향을 가지면 마일리지가 됩니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빈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쌓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아치 캘린더(Arch Calendar) 공식 블로그에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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