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 특허를 피해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고민, 제품 출시를 앞둔 딥테크 팀이라면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특허 회피설계를 의뢰하는 창업자분들의 상당수가 정작 회피 대상 특허의 청구항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회피는 "어떻게 피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을 잘못 잡으면, 멀쩡한 제품 설계를 불필요하게 바꾸거나 반대로 진짜 위험을 놓치게 됩니다.
그 특허는 정말 '살아있는 특허'인가 — 경쟁사 특허 침해 검토의 전제
회피설계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상대방 특허가 지금 이 순간 유효한 권리인지 여부입니다. 등록된 특허라도 연차료 미납으로 소멸했거나, 무효심판으로 권리가 사라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KIPRIS 같은 공개 검색 서비스에서 등록번호만 조회해도 등록 여부, 연차료 납부 이력, 존속기간, 무효·취소 이력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연차료는 납부기한이 지나도 6개월의 추가납부기간이 있어, 조회 시점에 따라 유효성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미 소멸했거나 무효가 된 특허를 피하려고 제품 설계를 바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장애물을 우회하느라 개발 리소스를 낭비하는 일입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이 한 단계가 곧 수개월의 개발 일정과 직결됩니다.
권리범위는 제품 설명서가 아니라 청구항이 결정합니다
유효성이 확인되면 다음은 청구항 해석입니다. 특허의 보호 범위는 도면이나 제품 설명이 아니라 청구항(Claim)의 문언으로 정해지며, 여기서 의사결정 기준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독립항 중심으로 본다: 침해와 회피의 실질 대상은 독립항입니다. 종속항은 구성요소가 추가돼 권리범위가 더 좁으므로, 종속항 기준으로 회피 방향을 잡으면 판단을 그르칩니다.
명세서와 대조한다: 같은 단어라도 명세서에서 특별히 정의한 의미가 있다면 그 정의가 우선합니다.
출원 경과 기록을 본다: 심사 과정에서 출원인이 스스로 청구항을 좁힌 이력이 있으면, 그 부분은 균등론 적용이 제한됩니다(금반언). 이 이력이 오히려 회피 가능 공간을 넓혀주는 경우가 실무에서 자주 있습니다.
회피하러 왔다가 더 강한 권리를 먼저 잡은 경우
약물전달 기술을 가진 한 바이오 기업이 "유사 논문과 특허가 이미 공개돼 있는데, 우리 기술로 특허가 가능하고 경쟁사와 겹치는 부분도 괜찮은지" 물어왔습니다. 시작은 단순 회피 문의였지만, 보유 기술과 선행기술을 함께 조사하자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왔습니다.
이 기업이 논문으로 공개한 기술 안에, 공개하지 않은 특정 물성이 숨어 있었고 선행기술 어디에도 그 물성이 기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 물성에 영향을 주는 인자들을 청구항에 한정하면 권리범위가 지나치게 좁아지기에, 기술적 특징을 물성 그 자체로 설정해 출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물질특허로 넓은 권리를 확보해 등록됐고, 현재 여러 국가에서 심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핵심은 회피설계가 방어를 넘어 공격적인 IP 자산으로 전환됐다는 점입니다. 청구항을 법률 텍스트로만 읽지 않고 실험 데이터와 물성의 의미를 기술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 이런 그림이 보입니다.
출원 전 체크리스트
- 회피 대상 특허의 연차료·무효 이력을 확인해 지금도 유효한 권리인지 점검하셨나요?
- 회피 기준을 독립항으로 잡으셨나요, 아니면 더 좁은 종속항을 보고 계신가요?
- 자사 제품에서 독립항 구성요소 중 빠진 요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셨나요?
- 구성요소를 바꿔도 기능·방법·결과가 같아 균등 침해가 성립할 여지는 없는지 검토하셨나요?
- 회피 과정에서 나온 새 구성·방법을 자사 특허로 출원할 수 있는지 확인하셨나요?
- 상대방이 보유한 관련 특허 포트폴리오 전체를 묶어서 검토하셨나요?
경쟁사로부터 경고장을 받은 뒤 설계를 바꾸는 비용은, 제품 출시 전 청구항을 미리 해석해두는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이러한 침해 위험 진단은 양산 라인을 확정하기 전인 지금 단계에서 점검하는 것이 가장 비용 효율적입니다.
제품 출시나 양산 일정이 가까워졌다면, 회피 대상 특허의 유효성 확인과 독립항 구성요소 분해 중 무엇을 먼저 정리해야 할지 점검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저자 소개]
석종헌 변리사 | 특허법인 린 파트너 (15년 차 바이오·화학 전문)
고려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지난 15년간 바이오, 제약, 소재 스타트업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왔습니다. 단순한 등록을 넘어 정부 과제 대응과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전략적 명세서 설계를 전문으로 합니다.
📧 기술 검토 및 강연 관련 문의: patentse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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