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 이 글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이유
세상은 늘 우리에게 정답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모범생, 잘 적응한 사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사람. 그러나 누군가는 그 정답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비뚤어진 농담 한 줄로 한국 코미디의 모양을 바꿔놓았습니다.
오늘부터 두 편에 걸쳐 그 사람의 10년을 따라갑니다. 한국 블랙코미디의 얼굴, 유병재.
Part 1에서는 그가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채에서 떨어지고, 핸드폰 영상 한 편을 거쳐 「SNL 코리아」 작가로 데뷔하기까지의 시간을 다룹니다.
Part 2에서는 YG와의 만남 이후 그가 자기 색을 한국에 새겨 넣는 과정을 이어가겠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가장 비뚤어져 보였던 농담이 사실은 가장 정확한 관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 1. 출발선 — 홍성에서 서울까지, 가난과 함께 올라온 청년

출처 : 초인시대
유병재는 1988년 5월 6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누나가 여럿 있는 농촌의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본인 회고에 따르면 그 시절 시골에 남아 있던 남아 선호 분위기 덕분에 누나들보다 자신은 그나마 덜 가난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즉, 가난의 한복판에서도 더 가난한 자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농담에 깔리는 이중 시선의 출발점이 됩니다. 같은 가난 안에서도 누구는 조금 더 손해를 보고, 누구는 조금 덜 손해를 본다는 사실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적은 좋았습니다. 고교 시절 전교 1등 출신으로 그는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합니다. 단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 학적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입니다. 명문대 입학은 그에게 신분 상승의 카드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는 서울 마포 인근의 3평 남짓한 셋방에서 5년 넘게 살았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했다가, 등록금이 모이면 다시 복학하는 식으로 학교를 끌고 갑니다. 잦은 휴학 끝에 결국 제적 위기까지 갔습니다.
여기까지의 그림은 익숙합니다. 가난한 시골 출신 명문대생이 서울에서 버티는 이야기. 보통은 이 시점에 안정된 직장을 향해 방향을 틉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다른 쪽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교 수업보다 더 자주 그를 붙잡은 것은 짧은 농담, 풍자, 비틀어진 콩트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정확히는 웃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이 시기의 그를 한 단어로 묶으면 결핍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돈, 시간, 안정된 자리, 자신감. 그 결핍이 그의 농담의 1차 재료가 됩니다.
📍 2. 낙방 — 공채라는 이름의 첫 거절

출처 : 유병재 페이스북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2011년, 마음을 굳히고 개그맨 공채 시험에 응시합니다.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흔한 코미디언의 입구가, 그에게는 첫 페이지부터 막혔습니다.
이 낙방은 단순한 시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5년 넘게 셋방에서 버티며 학교를 다닌 청년이, 처음으로 자기 진짜 꿈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받은 거절이었습니다. 보통은 이 시점에 마음이 꺾입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거나, 더 안정된 길을 찾거나, 꿈을 보류한 채 직장에 들어갑니다.
그가 한 일은 달랐습니다. 그는 공채라는 문을 다시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핸드폰을 들었습니다. 직접 출연하고 직접 노래를 만든 짧은 뮤직비디오 한 편을 찍어 유튜브에 올립니다. 제작비는 거의 없었고, 장비는 핸드폰 한 대였습니다.

출처 : 유병재 유튜브
그 영상이 바로 「니 여자친구..」입니다. 못생긴 여자친구를 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을 짓궂은 농담으로 풀어낸 짧은 곡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전한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만 하던 말을 노래 가사로 만들어 내놓은 작품이었습니다.
영상은 조회수 180만 회를 넘기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됩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공채라는 시스템이 그를 거절했지만, 시스템 바깥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봤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시스템 바깥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은 정답을 뽑지만, 시스템 바깥은 정답이 아닌 사람도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본인의 경험으로 증명한 셈입니다.
📍 3. 첫 호명 — 유세윤이 부른 이름

출처 : 엠넷
「니 여자친구..」가 화제가 되면서 그는 곧 유세윤의 「아트비디오」에 출연하게 됩니다. 무명 청년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카메라 앞에 선 자리였습니다.
이 시기의 영상을 다시 보면 한 가지가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능청스러운 유병재가 아니라, 잔뜩 긴장한 채로 한 마디 한 마디 조심스럽게 던지는 풋풋한 청년입니다. 그는 무대 위 코미디언이라기보다, 무대 옆 어디쯤에 어색하게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 어색함이 코미디 업계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읽혔습니다. 정해진 박자와 정해진 표정으로 웃기는 사람은 이미 많았기 때문입니다. 박자도 표정도 어딘가 어긋난 사람이 도리어 신선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를 가장 정확히 본 사람이 「SNL 코리아」 제작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출연자가 아니라 작가로 데려옵니다. 즉, 무대 위에 세우기 전에 무대 뒤편의 펜으로 그를 먼저 호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대부분의 코미디 지망생은 무대 위에 먼저 서고, 그다음에 글을 씁니다. 그는 글을 먼저 쓰고, 그다음에 무대에 섰습니다. 이 순서의 차이가 훗날 그를 즉흥보다 구조로 웃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 4. 작가실 — 무대 뒤편에서 자기 색을 다듬은 시간

출처 : 헤럴드 경제
「SNL 코리아」의 방송 작가로 합류한 그의 나이는 스물셋 무렵이었습니다. 한국 예능에서 스물셋의 작가가 단독 코너의 색깔을 책임지는 일은 드뭅니다. 그는 대부분의 코너 대본에 참여했고, 그중에서도 자기 색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코너가 바로 「극한직업」이었습니다.
「극한직업」은 회사라는 시스템이 신입에게 가하는 부조리, 사회 초년생의 굴욕, 위에서 누르는 압력을 한 장면으로 압축해 풍자하는 코너였습니다. 회사원이 갓 들어온 인턴에게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지, 그 부조리가 사실은 얼마나 일상적인지, 보는 사람이 자기 회사 풍경을 떠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코너에서 보이는 그의 작가적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한 회의 농담을 한 줄로 압축할 줄 압니다. 그는 코너 전체의 메시지를 단 한 줄의 자막이나 대사로 정리하는 데 능했습니다.
둘째, 자기 자신을 농담의 가해자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그의 농담은 늘 약자가 강자에게 한 방 먹이는 구조이거나, 또는 가해자 본인이 어처구니없는 자기 모습을 들켜버리는 구조입니다. 누군가를 위에서 깔보는 농담은 거의 없습니다.
작가로서 두각을 드러내자, 그는 점점 카메라 앞에까지 끌려 나옵니다. 처음에는 화면 한 귀퉁이에 잠깐 등장하는 작가 역할이었지만, 점점 본격적인 캐릭터를 맡습니다. 한국 예능 역사에서 흔치 않은 흐름입니다. 보통은 출연자가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작가가 출연자가 되는 흐름. 그는 그 흐름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한 명이 됩니다.
📍 5. 첫 책 — 비주류라고 본인이 먼저 못 박은 사람

출처 : 교보문고
작가와 출연자 사이를 오가던 시기, 그는 책상 위에 한 가지를 더 올려놓습니다. 단행본 작업입니다. 그가 묶기 시작한 것은 어느 매체에 실렸던 글이 아니라, 자기 노트에 저축처럼 모아 둔 짧은 글들이었습니다. 에세이, 우화, 아이디어 노트, 미공개 글. 그 양이 3년 치쯤 쌓이자 그는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냅니다.
그 책이 바로 『블랙코미디』입니다. 정확한 출간은 Part 2에서 이어지는 시기의 일이지만, 그 책의 뿌리는 무명 시절의 노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를 본인이 먼저 골랐습니다. 자기는 메인스트림이 아니라 비주류라고, B급이라고, 농담쟁이라고, 본인이 먼저 말했습니다. 한국 코미디 시장에서 자기 색을 가장 빨리 굳히는 방법은 본인이 먼저 자기 색을 한 단어로 부르는 것이었고, 그는 그 단어를 블랙코미디라고 정했습니다.
블랙코미디라는 단어가 한국 코미디 시장에서 한 캐릭터의 이름표가 된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 이전까지 코미디언은 보통 캐릭터(개그 캐릭터)나 코너(콩트 코너) 이름으로 자기를 알렸습니다. 유병재는 장르 이름으로 자기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코미디언의 정체성 정의에서 한 차원 높은 선택이었습니다.
Part 1을 닫는 한 줄을 적자면 이렇게 됩니다. 공채에서 떨어진 청년이 핸드폰 한 대로 작가가 되었고, 그 작가는 자기 장르를 자기 입으로 먼저 명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pilogue — 정답이 아닌 사람이 자기 길을 찾는 방법
유병재 1편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시스템이 거절했을 때, 시스템 바깥에서 본인을 증명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증명은 거창한 콘텐츠가 아니라, 핸드폰 한 대와 자기 노트로도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
그는 본인을 정답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정답이 아닌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했고,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농담의 재료로 옮겼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자기 자리, 가장 어색했던 자기 표정, 가장 비뚤어진 자기 농담. 그것이 그의 1차 자산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시스템 바깥의 자리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회사가 인정해 주지 않는 능력, 학교가 점수를 매기지 않는 감각, 동료가 농담으로 흘려보내는 한 줄. 유병재 Part 1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 자리에서 일단 핸드폰 한 대를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 Micro-Mission — 시스템 바깥의 내 한 줄 찾기
오늘 단 하나만 골라 보세요. 회사가 평가하지 않는 내 능력, 학교 점수표에는 없던 내 감각, 평소 농담으로 흘려보내던 내 관찰 하나.
시스템은 내 ( ) 능력에는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 ) 야말로 내가 가장 잘 팔 수 있는 한 줄이다.
노트에 적고, 오늘 한 사람에게라도 그 한 줄을 던져 보세요. 유병재가 처음 들고나온 농담도, 처음에는 친구 사이의 짧은 영상 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Part 2에서는, YG라는 가장 화려한 회사에 들어간 그가 어떻게 거기서 가장 어두운 농담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회사를 나와 후배 문상훈을 키운 멘토가 되었는지 이어가겠습니다.
※ 본 뉴스레터의 사실관계는 1988년 5월 6일 홍성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입학(전교 1등 출신, 통념과 달리 단국대 연극영화과 아님), 5년 넘게 마포 셋방 거주, 잦은 휴학으로 제적 위기, 2011년 KBS 공채 응시 및 낙방, 핸드폰으로 찍은 유튜브 영상 「니 여자친구..」 약 180만 조회, 「유세윤의 아트비디오」 출연, 「SNL 코리아」 작가 발탁 및 「극한직업」 코너 등 공개 보도와 인터뷰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