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판 중인 기존 약물에서 완전히 새로운 효능을 발견했습니다. 작용 기전(MoA)도 기존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규명했고요. 이 데이터로 당장 후속 투자 피칭에 나서도 될까요?"
신약 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은 바이오 스타트업에게 매우 매력적인 전략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변리사로서 조금은 냉정한 답변을 먼저 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전이 아무리 달라도 타겟하는 질환(적응증)이 기존과 동일하다면 특허로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적응증이 다르더라도, 과거의 논문에서 그 약효를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었다면 권리 확보는 몹시 까다로워집니다.
투자자는 "이 기술로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IR 무대에 오르기 전, 창업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용도특허'의 두 가지 핵심 관문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관문: '적응증'이 같으면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창업자들이 가장 흔히 하는 오해는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약리기전을 밝혔으니 당연히 특허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약물의 새로운 쓰임새를 보호하는 '용도특허'에서 용도는 곧 '적응증(치료하고자 하는 질환)'을 의미합니다.
만약 A라는 화합물이 이미 '위암 치료제'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팀이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단백질 타깃을 통해 위암 세포를 사멸시킨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네이처지에 실릴 만한 훌륭한 성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특허법상으로는 '적응증이 동일하므로 신규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특허 청구범위(회사가 독점하려는 기술의 울타리)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기전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특허청 심사 단계에서 방어 논리가 되지 못합니다.
두 번째 관문: 스쳐 지나간 논문 한 줄의 나비효과
치료하고자 하는 질환이 기존과 다르다면 첫 번째 관문(신규성)은 넘은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비는 두 번째 관문인 '진보성'에서 찾아옵니다. 진보성이란, 기존에 공개된 문헌(선행기술)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이 새로운 적응증의 약효를 쉽게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무적으로 가장 뼈아픈 거절이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타겟 질환이 명확히 다르더라도, 10년 전 발표된 해외 논문 구석에 "이 화합물은 향후 B 질환의 염증 억제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식의 단순한 문장 하나만 있어도 심사관은 "예측 가능했다"며 특허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방어 가능성을 높이려면, 발병 기전, 타깃 단백질, 실제 약리효과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선행 문헌만으로는 이 적응증에 대한 실제 약효를 절대 예측할 수 없었다"는 치밀한 대응 논리가 출원 전부터 설계되어 있어야 합니다. 국내 특허 문헌 조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PubMed나 구글 스칼라 등 글로벌 학술 데이터베이스까지 철저히 교차 검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험실의 자원 배분: 넓은 권리를 위한 데이터 패키지 설계
제한된 런웨이 안에서 움직이는 스타트업은 실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합니다. 투자자들은 "이 특허를 경쟁사가 회피할 수 없는가?"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응증에 대한 약효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명세서 내 실시예(실제 실험 또는 구현 사례)가 필수적입니다. 단순한 아이디어만으로는 의약 특허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세포 실험(in vitro)이든 동물 실험(in vivo)이든, 발명의 특성에 맞는 유효성 데이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창업자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단순히 '특정 암종 A' 하나만을 입증하는 데 그칠 것인지, 아니면 유사 적응증이나 병용 투여 가능성까지 포괄적으로 묶어 청구할 수 있도록(상위 개념화) 실험 데이터를 기획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초기부터 권리범위를 넓게 설계할 수 있는 데이터 패키지를 준비해 두어야만, 훗날 좁은 특허를 뚫고 들어오는 경쟁사의 진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출원 전 체크리스트
Q1. 우리가 타겟하는 적응증(질환)이 과거 특허나 국내외 논문에서 단 한 번이라도 동일하게 언급된 적이 없는가?
Q2. 만약 선행 문헌에 유사한 질환이나 약효가 스치듯 기재되어 있다면, 우리의 발명이 '단순한 예측을 뛰어넘는다'고 반박할 구체적인 기전적·실험적 근거가 있는가?
Q3. 새로운 적응증에서의 유효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in vitro, in vivo 또는 MoA(작용기전) 데이터가 준비되어 있는가?
Q4. 단일 질환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후속 파이프라인 확장과 경쟁사 회피 방지를 고려해 넓은 권리범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험 방향을 설정했는가?
신약 개발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약물 재창출은 분명 훌륭한 무기입니다. 하지만 특허라는 강력한 진입 장벽 없이 시작된 연구는 결국 후발주자에게 손쉽게 과실을 내어주는 결과를 낳습니다. 실험실의 값진 데이터가 기업의 진정한 밸류에이션으로 직결되려면, 첫 실험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방어와 확장'을 염두에 둔 치밀한 지식재산권(IP) 설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저자 소개] 석종헌 변리사 | 특허법인 린 파트너 (15년 차 바이오·화학 전문)
고려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지난 15년간 바이오, 제약, 소재 스타트업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왔습니다. 단순한 등록을 넘어 정부 과제 대응과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전략적 명세서 설계를 전문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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