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성공한 바이오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우수한 효능을 보인 바로 그 '특정 화합물' 하나를 특허로 출원하고, 우리의 파이프라인이 완벽히 보호받고 있다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후속 투자 유치를 위한 IP(지식재산권) 실사 테이블이나 글로벌 제약사와의 기술이전 논의에서 투자자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경쟁사가 이 화합물의 R기(치환기) 하나를 살짝 바꿔서 우회 구조를 만들어내면, 지금의 특허로 막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명확한 방어 논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해당 특허의 가치는 크게 깎일 수밖에 없습니다. 화합물 특허의 핵심은 발명 사실을 인증받는 것이 아니라, 경쟁사가 시장에 진입할 수 없도록 실효성 있는 독점의 울타리를 치는 것입니다.
경쟁사에게 우회로를 열어주는 '단일 구조 특허'의 함정
신약 개발 영역에서는 질환을 유발하는 타깃 단백질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깃 단백질과 결합하여 약효를 내는 화합물들은 일정한 핵심 골격(모핵, Core Structure)을 공유합니다.
문제는 특허 침해를 판단하는 원칙에 있습니다. 특허법에는 명세서의 청구범위(회사가 독점하려는 기술의 울타리)에 적힌 모든 구성요소가 일치해야만 침해로 인정하는 '구성요소 완비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만약 창업자가 자신이 합성한 딱 하나의 화합물 구조만 청구항에 올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경쟁사는 여러분의 특허 문헌을 참고해 타깃과 결합하는 핵심 골격은 그대로 가져가되, 약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곁가지(치환기)만 다른 물질로 교체할 것입니다. 구조의 일부가 다르기 때문에 특허 침해를 벗어나면서도 유사한 약효를 내는 새로운 화합물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너무 좁게 설정된 특허는 경쟁사에게 '합법적 모방'의 가이드라인을 쥐여준 셈이 됩니다.
회피 설계를 차단하는 프레임: 마쿠쉬 청구항과 SAR 데이터
단일 화합물의 맹점을 극복하고 넓은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해 제약 특허 실무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마쿠쉬(Markush) 청구항'입니다. 이는 치환기가 들어갈 자리에 수소, 할로겐, 알킬기 등 변형 가능한 여러 그룹을 나열하여, 핵심 골격을 공유하는 수백~수천 개의 유사 화합물을 하나의 특허 그물망으로 묶어내는 작성법입니다.
하지만 특허청은 단순히 많은 구조를 나열했다고 해서 쉽게 권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명세서에 제출된 데이터만으로는 그 수많은 화합물이 모두 동일한 약효를 낼 것이라 믿기 어렵다며 기재불비(설명과 데이터 부족으로 넓은 청구범위를 인정할 수 없음)를 이유로 거절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창업자가 연구개발 단계부터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이 SAR(구조-활성 상관관계, Structure-Activity Relationship) 데이터입니다. 화합물의 어느 부위가 약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고정해야 할 부위), 어느 부위는 자유롭게 변경해도 약효가 유지되는지(열어두어야 할 부위)를 증명하는 실험 결과입니다. 탄탄한 SAR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마쿠쉬 청구항은 심사관의 거절을 돌파하고 경쟁사의 구조 변형을 빈틈없이 방어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가치를 지키는 다층적 포트폴리오 구축 전략
투자자들은 1차원적인 특허가 아닌, 입체적인 방어 포트폴리오를 선호합니다. 마쿠쉬 청구항으로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면, 이제 특허 무효 심판이나 다양한 사업화 변수에 대응할 수 있도록 권리를 다층화해야 합니다.
첫째, 청구항을 피라미드 구조로 설계합니다. 가장 포괄적인 마쿠쉬 구조를 가장 넓은 울타리(독립항)로 치고, 그 안에 실제 사업화 가능성이 높고 활성이 뛰어난 핵심 물질군을 좁은 울타리(종속항)로 단계별로 겹겹이 배치합니다. 외부 공격으로 넓은 울타리가 무너지더라도 내부의 핵심 권리는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전략입니다.
둘째, 파이프라인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후속 특허를 미리 기획해야 합니다. 신약의 제형 개발을 고려해 약물 본체 외에도 흡수율과 안정성을 높인 염 형태나 결정형을 추가로 권리화해야 합니다. 나아가 해당 화합물을 합성하는 효율적인 제조 방법까지 특허로 묶어둔다면, 설령 경쟁사가 구조를 빗겨나가는 데 성공하더라도 생산 단가 경쟁력을 상실하여 시장 진입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출원 전 의사결정 체크리스트
우리의 특허 청구범위가 우리가 합성해 낸 '단일 화합물 구조식' 하나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경쟁사의 구조 변형을 방어할 넓은 마쿠쉬 청구항을 뒷받침할 SAR(구조-활성 상관관계)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했는가?
청구항 설계 시, 넓은 범위(독립항)부터 가장 강력한 핵심 물질(종속항)까지 무효화 공격에 대비한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었는가?
단순 물질 특허를 넘어, 후속 개발 단계에서 필요한 염 형태, 결정형, 제조 공정에 대한 다층적 포트폴리오 계획이 수립되어 있는가?
특허는 훌륭한 연구를 했다는 증명서가 아닙니다. 미래에 우리 회사가 독점할 비즈니스 시장의 경계선을 긋는 일입니다. 출원을 서두르기 전, 연구 데이터와 방어 전략이 일치하는지 먼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저자 소개] 석종헌 변리사 | 특허법인 린 파트너 (15년 차 바이오·화학 전문)
고려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지난 15년간 바이오, 제약, 소재 스타트업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왔습니다. 단순한 등록을 넘어 정부 과제 대응과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전략적 명세서 작성, 특허전략 설계를 전문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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