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이미 등록된 특허가 여러 건 있으니, 이번 정부 R&D 과제나 팁스(TIPS) 선정은 문제없을 겁니다."
현장에서 많은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만나며 가장 자주 듣는 위험한 오해 중 하나입니다. 정부 과제 심사, 기술보증기금 평가, 그리고 딥테크 팁스(TIPS) 등 공공 영역의 기술 평가에서는 특허의 단순 '등록 여부'나 '개수'만 보지 않습니다.
심사위원들은 SMART5와 같은 특허 정량 평가 시스템을 활용해 객관적인 지표로 특허의 질을 해부합니다. 단순히 특허청의 문턱을 넘는 데 급급해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한 '가성비' 출원은 십중팔구 최하위권인 C등급 이하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부 과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특허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출원 단계부터 평가 지표를 완벽히 이해하고 철저히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1. 등록증의 착시: 평가 시스템이 보는 '진짜 지표'
특허 등록증은 기술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훈장이 아니라, 권리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한국발명진흥회의 SMART5 시스템은 특허를 AAA부터 C까지 9단계로 등급화하여 평가합니다. 이 시스템은 알고리즘을 통해 서지정보, 행정정보, 명세서 정보라는 세 가지 주요 축을 바탕으로 해당 특허의 '문서적 밀도'와 '전략적 이력'을 수십 개의 지표로 분석합니다.
대표적인 평가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술 분류(IPC)의 다양성 (서지정보): 기술이 얼마나 넓은 비즈니스 영역을 커버하는가?
청구항의 구조 (명세서 정보): 독점하려는 기술의 울타리(청구항)가 얼마나 촘촘하고 입체적인가?
명세서의 물리적 밀도 (명세서 정보): 발명의 상세한 설명과 실시예(실험 데이터)가 충분히 풍부한가?
전략적 이력 (행정정보): 분할출원, 우선심사, 해외 PCT 출원 등 '권리를 키우기 위한 노력'을 했는가?
아무리 연구 성과가 훌륭해도 문서 구조가 엉성하고 파생 전략이 없다면, 평가 알고리즘은 이를 '사업적 활용 가치가 낮은 특허'로 기계적인 하향 분류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실무 프레임: 고등급 특허를 만드는 '의도된 설계'
바이오·화학·IT 딥테크 기업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조력하다 보면, 우수한 등급을 받는 특허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원의 전략적 배분'입니다. 초기 스타트업은 자금 부족으로 명세서 작성 비용을 아끼려 하지만, 이는 훗날 수억 원 규모의 과제 탈락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고등급 특허를 위해서는 출원 단계에서부터 뼈대를 다르게 잡아야 합니다.
독립항 다각화: 기술의 구조, 제조 방법, 용도 등 관점을 달리한 독립항을 최소 2~3개 이상 설계해야 합니다.
계열 구조의 종속항: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경쟁사의 회피 설계를 단계적으로 차단하는 그물망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압도적인 실시예: 구체적인 공정 조건과 수치 데이터를 아낌없이 투입하여 문서의 물리적 길이를 넘어 '정보의 밀도'를 극대화해야 합니다.
3. 실전 사례: "과제 마감 전까지 일단 빨리 등록해 주세요"의 최후
실제 자문했던 국내의 한 신소재 스타트업 사례입니다. 이들은 정부 과제 신청 요건을 맞추기 위해, 핵심 물질에 대한 최소한의 텍스트만으로 특허 3건을 서둘러 출원했습니다. 청구항은 단일 구조로 단조로웠고, 무엇보다 바이오·화학 특허의 핵심인 실험 데이터와 비교 실시예 분량이 선행 기술 대비 턱없이 얇았습니다.
문제는 R&D 과제 대면 평가에서 발생했습니다. 주력 특허들이 SMART5 정량 평가에서 모두 최하위권인 C등급을 받은 것입니다. 심사위원은 "청구항이 단편적이라 권리 범위가 좁아 사실상 방어력이 없고, 글로벌 확장 전략이 전무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미 등록이 완료되어 권리를 보강할 분할출원 기회조차 없었던 이 기업은 결국 기술성 점수 미달로 수억 원 규모의 과제 선정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반면, 성공적으로 팁스(TIPS)에 선정된 경쟁사는 접근 방식부터 달랐습니다. 단 1건을 출원하더라도 물질, 제조 공정, 응용 제품으로 이어지는 입체적인 청구항 설계와 구체적인 물성 데이터를 명세서에 촘촘히 채워 넣었습니다. 또한 해외 PCT 출원 계획과 우선심사 이력을 통해 안정적인 B+ 등급을 확보했고, 이는 곧 정부 지원금 수주로 이어졌습니다.
4. 정부 과제 신청 전 반드시 체크해야 할 5가지
R&D 과제나 팁스(TIPS)를 준비 중인 대표님과 CTO라면, 명세서 초안을 검토할 때 다음 질문을 반드시 던져보십시오.
[IPC 분류] 기술 분류 코드를 2개 이상 확보할 수 있도록 발명이 다각도로 기재되었는가?
[독립항 설계] 우리 기술을 구조, 방법, 용도 등 3차원적 관점에서 보호하고 있는가?
[종속항 논리] 경쟁사가 살짝만 바꿔도 빠져나갈 수 있는 허술한 구조는 아닌가?
[데이터 밀도] 명세서 내 실험 데이터와 수치 조건이 경쟁사 특허보다 압도적으로 풍부한가?
[이력 관리] 분할출원이나 우선심사 등 향후 등급을 높일 수 있는 전략적 여지를 설계했는가?
특허의 등급은 알고리즘이 우연히 부여하는 훈장이 아닙니다. 출원서에 찍힌 텍스트의 밀도와 변리사가 고민한 전략의 깊이만큼 정직하게 누적되는 '숫자로 된 자산'입니다. 당장의 등록증 개수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3년 뒤 중요한 과제 심사 테이블에서 여러분의 기술력을 증명해 줄 진짜 무기는 바로 오늘 설계하는 명세서에서 시작됩니다.
[저자 소개] 석종헌 변리사 | 특허법인 린 파트너 (15년 차 바이오·화학 전문)
고려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지난 15년간 바이오, 제약, 소재 스타트업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왔습니다. 단순한 등록을 넘어 정부 과제 대응과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전략적 명세서 설계를 전문으로 합니다.
📧 의뢰 및 강연 문의: patentseok@naver.com 📞 010-6663-8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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