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X AI 스타트업 Sierra가 9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 E라운드를 마쳤다.
밸류는 158억 달러. 연 매출 1억 5천만 달러의 100배가 넘는 숫자로 평가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장이 가장 뜨겁게 주목한 Sierra의 특징이다.
그들의 변경된 '과금방식'이다.
Sierra는 좌석당 과금하지 않는다. 사용량당 과금하지 않는다. 고객 문의가 실제로 해결되었을 때만 돈을 받는 구조다. 실제 결과물에 관여하지 못하면, 청구서에 찍히는 금액은 0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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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를 사고파는 방식은 지난 40년 동안 순차적으로 바뀌어 왔다.
첫 번째는 패키지 판매방식이다. CD-ROM, 혹은 플로피디스크를 사서 내장된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에 설치하면 끝이었다. 실제 사용과는 관계 없이 최초 구매 당시에만 비용이 발생하는 구조였고, 가치의 단위는 '완전한 소유' 였다.
두 번째는 SaaS 판매방식이다. Salesforce로 유명해진 SaaS 모델은 '좌석당 구독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가치의 단위가 '소유'에서 '사용'으로 바뀐 것이다.
이 시기에 'Shelfware'라는 단어도 함께 등장했다. 결제했지만 한 번도 쓰지 않는, 구독료만 의미없이 나가는 상황을 부르는 말이었다. 업계 추정으로 그 비율은 30~50%에 달했다. 이후 AWS가 인프라 영역에 가져온 모델이 '사용량 기반 과금'이었다.
쓴 만큼 낸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델이었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사용량과 결과가 같은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API를 백만 번 호출했다는 사실이 비즈니스에 100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Sierra가 보여준 '결과당 과금'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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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화는 단순한 가격 정책의 조정뿐만이 아니다.
과금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그 산업군이 무엇을 팔고 있는가에 대한 정의가 바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은 암묵적인 분업에 합의해 왔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은 회사 안에서, 그 과정을 효율화하는 도구는 회사 밖에서 사 오는 구조였다. 결과는 회사의 정체성이고, 그것을 외부에 맡긴다는 것은 의사결정권을 외부로 넘긴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회사가 우리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Sierra가 보여준 결과는, '무엇을 팔고 있는가'에 대한 합의가 다시 검토될 시점이 왔다는 것이다. 결과를 외부에 맡긴다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결과를 단위로 쪼개고 그 단위에 가격을 매겨 거래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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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어떤 문제가 해결된 것이고, 어떤 케이스가 에스컬레이션이 필요하며, 어떤 흐름이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주는지를 단위로도 쪼갤 수 있어야 한다. 이 분해 작업은 그 산업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결국,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에서는 -적어도 SaaS를 대체할 산업군은- 아무나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성공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그 버티컬을 누구보다 뾰족하게 이해한 사람이 성공할 것이다. AI가 코딩의 진입장벽을 낮춘 결과, '결과물 도출' 이라는 더 무거운 진입장벽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Sierra의 공동 창업자 백그라운드도 이 내용에 힘을 실어준다. Bret Taylor는 OpenAI 의장이자 Salesforce 공동대표를 지낸 인물이고, Clay Bavor는 Google에서 VR과 Google Labs를 이끌던 임원이었다.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팔리고, 어떻게 도입되고,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수십년 동안 가장 가까이서 보고, 그 결과물을 이끌어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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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aS 회사에서 과거의 질문은 "고객의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 였다.
이제는 "우리는 고객의 결과에 관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가져야 한다.
고객의 좌석은 점점 비어가고, 서비스에 대한 기대는 결과물로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