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의 황동만 감독은, 능력주의가 빚어낸 자기 파괴적 인물이다.
2.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현대의 비극을 '속물주의'로 진단했다. 결과물과 성취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세상이다.
3. 황동만은 20년째 입봉 못한 인물이지만, 영화판은 작가·기획·배우·스태프의 협업으로 굴러가고, 흥행은 "그거 재밌대"라는 입소문(운)이 좌우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실패는 오롯이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된다.
4. ‘8인회'의 '아지트'는 동료애로 포장된 비교의 전시장이자, 동만의 일상을 시나리오 소재로 빨아먹으면서도 정작 그를 무능한 자로 멸시하는 착취의 공간이다. 결과물 없는 그는 다 때려부수고 삐딱선을 타며 식사 자리에서조차 핀잔을 듣는 밉상이 되어 자기 존재를 입증하려, 늘 불안에 떨고 있다.
5.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능력주의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과 원한을 안기며 사회적 연대와 공동선을 약화시킨다.
6. 변은아 PD는 근원적 외로움이 만든 '기계화'된 인물이다.
7. 능력은 탁월하지만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가 모두 떠나간 트라우마로 유기 불안을 안고 산다. 공동 작업 결과물을 빼앗겨도 항변하지 못하는 건 착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내뱉는 순간 또 버려질 거라는 생존 본능 때문이다.
8.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로봇화'다. <유미의 세포들>이 감정을 '세포'로 시각화하며 혼수상태에 빠진 사랑 세포·이성 세포를 그렸듯, 변은아의 감정 세포는 멸균된 상태다.
9. 황동만이 쳐들어와 빛날 거라 외쳤을 때 비로소 그 세포가 살아난다. 그녀가 원한 건 '지랄 맞은 오빠'다. 성격은 더럽지만 절대 버리지 않고, 부당한 일엔 대신 밥상을 엎어줄 수 있는 원초적 가족.
10. 감정마저 외주화된 사회다.
11. 변은아는 '감정 워치'로 자기 감정을 파악하고, 황동만도 내면의 허기를 폭식으로 채운다.
12. 티파니 와트 스미스가 짚었듯, 감정은 본능이 아니라 시대의 산물이다. 16세기엔 슬픔이 더 나은 노동자를 만든다며 권장됐지만, 오늘날엔 행복만이 좋은 노동자와 파트너의 조건이다.
13. 슬픔·찌질함·무가치함은 '비효율적 결함'으로 낙인찍히고, 시스템에서 도태될까 봐 현대인은 입을 닫는다. 변은아의 로봇화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시대의 집단적 적응이다.
14. '진정성'마저 역설로 작동한다. 모두가 진정성을 외치지만, 그 진정성이란 똑같은 곳에서 배우고 똑같은 결과물을 연기해내는 균질화된 상품에 불과하다.
15. 잘 포장된 엘리트의 위선보다, 황동만처럼 자신의 찌질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불협화음이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 AI가 매끄러운 진정성마저 복제하는 시대, 인간 고유의 날것과 결함, 찌질함만이 희석되지 않는 가치로 남는다.
16. 콘텐츠 흐름도 전환점에 와 있다. <모자무싸> 드라마 장면이 캡쳐돼 SNS로 공유되며 위로받는 현상이 그 증거다.
17. 코로나 이후 콘텐츠는 '재미·정보'에서 '위로'가 추가됐다. 유튜브 콘텐츠 중 일부가, 불안한 개인들의 위로 장치가 됐고, 손절·디지털 디톡스·쉬는 청년·찐친·연애 프로그램까지 외로움이 콘텐츠의 기저로 자리 잡았다.
18. 즉, AI 시대의 '프리미엄'은 결국 결핍과 결함을 공유하는 인간 사이의 위로에서 나올 것이다.
19. 결국 이 모든 흐름은 '다정함'으로 수렴된다. 과거의 다정함은 호구의 특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치열한 생존 무기이자 시대 룰에 대한 반항이다.
20. 결과물 없이 존재 자체를 긍정해주는 유일한 안티테제이자, 찌질한 감정을 뱉어내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심리적 안전 기지다.
21.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보다 오래 살아남은 힘을 완력이 아니라 친화력과 협력 능력에서 찾는다.
22. AI는 매끄러운 공손함(politeness)을 복제할 수 있지만, 결핍과 상처를 통과한 인간이 건네는 투박한 다정함(kindness)까지 온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2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웨이먼드에게 다정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계와 싸우는 가장 전략적인 방식이었다.
24. 모두가 불안하고, 모두가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 버틸 수 없다. 불안을 연대로 바꾸는 힘, 그 길목에 ‘다정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