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과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특허를 여러 건 받아 보았자 결국 사업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더라고요."
특허 등록을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의 비즈니스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변리사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말입니다.
특허가 기업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의 독점'이 곧 '시장의 독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허는 기술을 독점하기 위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특허가 보호하고 있는 기술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기업이 원하는 시장에서의 독점력은 발휘될 수 없습니다. 경쟁사로서는 특허기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허를 통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품에 반드시 필요한 특허, 이른바 ‘필수특허’를 확보해야 합니다. 기업 특허전략의 성패는 단순히 특허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아닌, 필수특허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수특허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요건
필수특허란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특허를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필수특허가 되기 위해서는 보호 대상인 기술 자체의 필수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어떤 기술이 필수기술로 인정되기 위한 요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기술 자체의 우수성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수한 효과를 가진 기술일수록 필수기술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월등한 기술적 우위를 가질수록 다른 기술이 이를 대체할 가능성도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연구개발 활동에 매년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유도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시장의 선호입니다. 기술의 우수성은 필수기술이 되기 위한 요건 중 하나이지만, 기술이 우수하다고 해서 반드시 필수기술이 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기술적 우위가 아니더라도 디자인이나 마케팅, 다른 제품과의 호환성, 가격 정책 등으로 시장의 강력한 선호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필수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USB가 당시 경쟁 기술이었던 애플의 파이어와이어(FireWire)를 제치고 데이터 전송 분야의 표준이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USB는 속도와 안정성 면에서는 뒤처졌지만, 저렴한 생산비와 무료 라이선싱 정책을 무기로 마우스나 키보드 등 주변기기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셋째, 표준 또는 인증 규격에의 포함될 경우입니다. 특허기술이 표준화 기구(ISO, ITU, IEEE 등)나 산업별 인증 규격에 포함되는 경우에도 필수기술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표준으로 채택된 기술에 대한 특허를 특별히 표준필수특허(SEP, Standard Essential Patent)라고 부릅니다. 표준화 기구나 인증 기관에 의해 특허기술의 사용이 강제되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필수기술로 인정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필수특허의 힘: 시장의 구조를 설계한다
필수특허를 보유한 기업은 특허를 무기로 경쟁사의 진입을 차단하거나, 라이선싱을 통해 로열티 수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필수특허를 한 기업만이 소유하고 있을 경우, 시장 또한 해당 기업의 독점 체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약 분야입니다. 신약에 대한 물질 특허 하나만으로도 기술 전체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록버스터급 의약품의 특허 만료는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큼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필수특허를 여러 기업이 나누어 보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도체나 스마트폰 등의 경우 수천 내지 수만 개의 특허기술이 필요하며, 이들 모두를 한 기업이 보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경우는 필수특허를 보유한 기업들 간의 크로스 라이센싱(Cross Licensing)을 통한 과점 체제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수특허를 보유한 기업들끼리는 서로의 특허를 자유롭게 (또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 특허를 가지지 못한 새로운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공동의 방어막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필수특허는 시장의 구조 자체를 직접 설계하는 힘을 가집니다. 퀄컴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퀄컴은 '노 라이선스, 노 칩(No License, No Chip)' 정책을 통해 경쟁사의 칩을 사용하는 제조사에게는 높은 로열티를 요구하거나 라이선스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경쟁사의 시장 진입을 봉쇄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는 반독점 행위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필수특허가 실제로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수특허를 개방함으로써 시장의 외연을 확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테슬라는 2014년 자사의 전기차 관련 모든 특허를 무료로 공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초기 단계였던 전기차 시장의 파이를 키워 충전 표준을 선점하고 관련 인프라 구축을 가속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왜 영업이익의 80%를 로열티로 냈을까
필수특허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 진입조차 어렵거나, 진입하더라도 수익의 상당 부분을 로열티로 지불해야 합니다. 1980년대 삼성전자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 메모리 관련 필수특허를 보유했던 미국 TI(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대해 일본 반도체 7개사가 지급한 로열티 총액은 1억 3천만 달러였습니다. 반면,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지불한 금액은 무려 8,5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는 당시 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의 80%를 상회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메모리 특허에 대한 크로스 라이센싱을 통해 로열티를 낮출 수 있었던 반면, 특허가 거의 없던 삼성전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장 진입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수익의 대부분을 특허 보유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필수특허를 가지지 못한 후발주자의 생존 전략
필수특허는 시장에서의 독점력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이지만, 필수특허가 없다고 해서 완전히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필수특허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수특허의 독점력은 이를 대체할 기술이 시장에 등장하는 순간 깨어지게 됩니다. 반도체 분야의 핀펫(FinFET) 기술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핀펫은 수년간 초미세 공정의 필수 기술로 군림했으나, 3나노 이하 공정에서 발생하는 누설 전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물리적 한계에 봉착하면서 이를 해결한 GAA(Gate-All-Around) 기술에 필수기술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비만 치료제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위고비(Wegovy) 또한 월등한 체중 감량 효과를 앞세운 마운자로(Mounjaro)가 등장하며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시장에서 요구되는 기술의 속성이 변화하기도 합니다. 자동차 분야의 경우 예전에는 엔진, 변속기 등 차량 자체의 성능이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자율주행 기술의 완성도가 차량 선택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고전하는 사이, 자율주행 기술을 앞세운 테슬라나 BYD 등의 기업들이 자동차 시장에서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은 후발 주자들에게 일종의 기회의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기존 강자들이 오랜 기간 쌓아온 필수특허의 장벽이 더 이상 절대적인 방어막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발 주자라도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고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에 맞추어 새로운 필수특허를 확보한다면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삼성전자 또한 TI와의 라이선싱 협상을 계기로 특허의 중요성을 깨닫고 삼성종합기술원을설립하는 등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지금은 반도체 시장의 글로벌 강자이자 매년 미국에서 가장 특허를 많이 내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