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가 우리 API의 주 고객이다."
이 말을 한 건 인터넷 트래픽의 20%를 처리하는 인프라 기업 Cloudflare입니다. 자사 100개 제품을 CLI 하나로 통합하면서 한 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CRM이라는 개념을 만든 Salesforce도, 25년간 만들어온 화면을 API와 CLI로 접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수십 년간 화면을 만들어온 회사들이, 이제 화면이 아닌 CLI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왜 갑자기 CLI가 이렇게 중요해졌을까요.
프로덕트의 생김새가 바뀌고 있다는 것은, 주요 고객이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에이전트가 고객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기존에 작동하던 비즈니스 규칙에 세가지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
GUI와 CLI
하나의 제품을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화면을 보고 클릭하는 것(GUI), 글자로 명령을 내리는 것(CLI). 카페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것과 카운터에서 말로 주문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같은 커피를 받지만 경로가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제품이 키오스크(GUI)만 만들어왔습니다. 인간 사용 편의성을 위해서요. 그런데 에이전트는 말로 주문하는 쪽(CLI)을 씁니다. 이 쪽이 에이전트에겐 명확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변화: 전문성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에이전트가 고객이 되는 순간, 타겟 할 수 있는 고객의 범위가 압도적으로 넓어질 수 있습니다.
Vercel, Supabase, GitHub, Cloudflare. 전부 개발자 전용 도구였습니다. 비개발자가 들어가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는 외계어로 덮인 서비스들입니다. 심지어 개발자들도 잘 쓰기 위해서는 꽤 공부를 해야하는 도구들인데요. 지금 개발을 한번도 안해본 사람들이 AI로 프로덕트를 만들면서, 이 서비스들을 뭔지도 모른 채 사용하고 있습니다. AI한테 "배포해줘"라고 하면 알아서 Vercel에 올라가고, "데이터 저장해줘"라고 하면 Supabase에 테이블이 생깁니다. 에이전트가 전문성을 대리하면서, 비전문가가 이 도구의 고객이 된 것입니다.
이건 개발자 도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언급했던 세일즈포스 역시 해당 됩니다. CRM의 상징이었던 복잡한 대시보드 대신, 에이전트가 데이터를 읽고 실행하는 구조로 바꾸고 있습니다. 세일즈포스는 원래 영업 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쓰기 어려운 서비스였습니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중간에 들어서면, 구성이 많고 복잡하여서 다룰 줄 몰라도 CRM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방향은 명확합니다. 에이전트가 중간에서 전문성을 대리해주는 순간, "이 서비스는 전문가만 쓸 수 있다"는 경계가 사라집니다. 비전문가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GUI를 더 쉽게 만드는 대신, 에이전트가 잘 읽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가 비전문가까지 고객으로 만들 수 있어집니다.
두 번째 변화: 구매 여정이 사라진다
전문성의 경계가 무너지는 건 '누가' 고객이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 변화는 그 고객이 '어떻게' 사는가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사려면 여정이 필요합니다. 검색하고, 비교하고, 리뷰를 읽고,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합니다. 이 여정의 각 단계를 설계하는 것이 마케팅이고 퍼널이었습니다.
에이전트는 이 여정을 통째로 건너뜁니다. 에이전트 기반의 이코노미가 형성된 중국에서 더 직관적인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이트댄스의 두바오는 사용자가 물건을 찾으면, 징둥 · 타오바오 · 핀둬둬 · 더우인몰 4개 쇼핑앱을 동시에 열고, 화면을 스캔하고, 쿠폰까지 포함한 최종 가격을 비교한 뒤, 가장 싼 옵션을 제시합니다. 30초 만에. 사람이면 앱 하나씩 열어서 비교하는 데만 몇 분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https://www.ivinco.com/blog/china-agentic-commerce-future
루이싱커피에서는 "평소 거 시켜줘" 한마디면 에이전트가 음료를 고르고, 결제하고, 주문까지 넣습니다. 화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거래가 끝납니다. 이건 소수의 실험이 아닙니다. 2026년 2월 설 연휴, 알리페이는 1주일 동안 1억 2천만 건의 에이전트 거래를 처리했습니다.
구매 여정이 사라지면, 그 여정 위에 설계된 것들이 같이 흔들립니다. 홈페이지, 비교 페이지, 온보딩 퍼널, 장바구니 같은 장치들은, 사람이 거치는 단계를 전제로 만든 모든 것입니다.
세 번째 변화: 경험이 체인이 된다
구매 여정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뭐가 남을까요. 프로덕트 경험의 형태 자체가 바뀝니다.
지금까지 프로덕트의 경험은 화면의 집합이었습니다. 사용자는 홈페이지에서 시작해 기능 페이지로, 대시보드로, 설정 페이지로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것을 찾고 실행했습니다. 좋은 프로덕트란 이 화면들이 잘 연결되어 있고, 각 화면이 직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에이전트가 고객이 되면, 경험의 단위가 바뀝니다. 화면이 아니라 실행의 체인이 됩니다. 문서를 읽고, CLI를 실행하고, 결과를 받고, 그 결과가 다음 문서를 안내하고, 다음 CLI가 실행되는 연속된 흐름. 한 번 이 체인에 들어간 에이전트는 계속 안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실제로 Vercel이 이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Agent Resources'라는 문서 섹션에서, CLI를 실행하면 JSON 결과가 다음 설치 명령을 안내하고, 설치가 끝나면 가이드 문서가 다음 설정 명령을 안내합니다. 배포가 끝나면 도메인 연결, 그다음 SSL, 그다음 모니터링. 각 문서 끝에 또 다른 CLI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https://vercel.com/docs/agent-resources
프로덕트에 락인을 시키는 방법이 "잘 설계된 화면의 집합"에서 "끊기지 않는 체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게 'Agent Experience'의 시작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건 먼 미래의 예측이 아닙니다.
Cloudflare와 Salesforce가 CLI 전환을 선언한 건, 에이전트가 이미 고객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급이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라, 수요가 먼저 생긴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수억 명이 AI 비서를 일상에서 쓰고 있습니다. 두바오 사용자만 3억 명을 넘겼고, 위안바오는 1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20년 된 베이징의 만두집에서도 에이전트용 스킬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습니다. 에이전트가 메뉴를 읽고 주문을 처리하는 구조를, 동네 식당이 직접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비개발자들이 AI로 프로덕트를 만들면서, Vercel과 Supabase를 뭔지도 모른 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전문성 경계의 해체가, 이미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에이전트를 통해 서비스를 찾고 결제하기 시작하면, 이 글에서 말한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전문성의 경계: 전문가만 접근 → 에이전트가 비전문가를 데려옴
- 구매 여정: 검색→비교→결제 다단계 퍼널 → 에이전트가 통째로 건너뜀
- 경험의 형태: 잘 설계된 화면의 집합 → 끊기지 않는 실행의 체인
이 3가지는 따로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이전트가 고객이 되는 하나의 변화에서 동시에 파생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결합되면, 에이전트가 잘 읽을 수 있는 문서, 바로 실행할 수 있는 CLI, 매끄러운 다음 스텝 — 이 세 가지를 갖춘 서비스에 에이전트가 한 번 붙으면, 빠져나갈 이유가 없는 구조가 됩니다.
인간 고객이 있는 이상 GUI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에이전트를 통해 들어오는 고객의 규모는 훨씬 커질 것입니다. 전문성의 허들, 접근의 허들이 사라지면서 시장 자체가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Cloudflare와 Salesforce 등 이미 많은 곳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고객으로 맞이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는 곳과, 아직 더 예쁜 화면을 다듬고 있는 곳. 격차는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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