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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산골 농가의 막내아들, 세자르 리츠. 세 번 해고당하고, 파산 직전까지 몰렸으며, 말년에는 16년간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오늘날 '호화로움'의 동의어가 되었다.
미리보는 오늘의 비즈니스 인사이트
- 거절은 방향을 가리킬 뿐,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 리츠는 첫 직장에서 "소질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판단을 부정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더 넓은 무대로 이동했다. 파리로, 몬테카를로로, 런던으로. 거절을 최종 판결이 아닌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그의 첫 번째 비즈니스 감각이었다. 오늘날 스타트업 세계에서 말하는 '피벗(pivot)'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 고객을 고객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진짜 경쟁력이다
- 리츠는 모든 투숙객의 취향을 기억했다. 선호하는 와인, 즐기는 음악, 앉기 좋아하는 자리. 웨일스 왕세자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아는군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CRM이나 퍼스널라이제이션 전략의 원형이다. 다만 리츠의 방식과 현대적 데이터 수집의 차이는 명확하다 —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진심 어린 관심이었다.
- 최고의 파트너십은 약점 보완이 아닌 강점의 극대화다
- 리츠는 요리를 몰랐다. 그래서 에스코피에에게 주방 전권을 넘겼다. 에스코피에는 경영을 몰랐다. 그래서 리츠에게 비즈니스를 맡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천재성을 존중했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좋은 파트너십이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 디테일은 전략이다
- 리츠 파리의 계단 높이는 여성의 힐을 고려해 낮게 설계됐다. 조명은 안색을 돋보이게 하는 간접광이었다. 욕실은 모든 객실에 독립적으로 설치됐다. 이것들은 단순한 인테리어 선택이 아니었다. 고객이 어떤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역산한, 경험 설계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UX 디자인이 하는 일을 리츠는 150년 전에 벽돌과 조명으로 실천했다.
- 완벽주의는 양날의 검이다
- 리츠의 완벽주의는 그를 업계 최고로 만든 동시에, 그를 무너뜨린 원인이었다. 그는 쉬지 않았다. 가방을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다음 도시로 떠났다. 결국 52세에 신경쇠약으로 쓰러졌고, 죽기까지 16년을 병상에서 보냈다. 위대한 창업자들의 삶에는 종종 이런 역설이 있다. 그들을 성공으로 이끈 바로 그 성질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는다.
01 · 출발 — 농가의 막내, 파리를 향하다
1850년 2월 23일, 스위스 발레 주의 작은 마을 니더발트. 세자르 리츠는 열세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톤 리츠는 농부이자 마을 이장이었고, 가족은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았다. 여름이면 소를 몰고, 겨울이면 마을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예술적 감수성만 희미하게 보였다고 전해진다.
열다섯 살이 되던 1865년, 아버지는 그를 인근 마을 브리그의 호텔 쿠론 에 포스트로 보냈다. 견습 소믈리에로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인에게 불려간 리츠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 일에는 특별한 감각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넌 그게 없어. 호텔업에서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 리츠의 첫 고용주
해고였다. 첫 번째 직장에서. 리츠는 잠시 예수회 수도원에서 제의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직전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야망은 넘쳤지만 돈은 없었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02 · 파리 — 상류사회의 언어를 배우다
파리는 거칠었다. 리츠는 작은 비스트로에서 웨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서두르다 접시를 너무 많이 깨는 바람에 또 해고됐다. 이번엔 두 번째 직장이었다. 하지만 파리는 동시에 거대한 학교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 부아쟁(Voisin)에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는 유럽 각지의 귀족, 예술가, 자본가들이 드나들었다.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면서 파리는 프로이센 군대에 포위됐다. 음식과 연료가 바닥나고 레스토랑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리츠는 이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파리의 오텔 스플랑디드에서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J.P. 모건 같은 미국 자본가들과 접촉했다. 상류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까이서 관찰한 시간이었다.
그는 한 가지 원칙을 체화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원하는 것을 손님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기억력을 무기로 삼아 단골 손님의 취향, 선호하는 와인, 즐기는 음악, 앉기 좋아하는 자리를 모두 머릿속에 새겼다.
03 · 유럽 순회 — 이동이 곧 수업이었다
1870년대 중반부터 리츠는 계절마다 유럽 상류사회의 이동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여름에는 스위스 루체른의 그랜드 호텔 나치오날을, 겨울에는 니스, 산레모, 몬테카를로의 호텔들을 관리했다. 이 호텔들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라 유럽 귀족 사교계의 무대였다. 그는 이 무대를 완벽하게 연출하는 법을 익혔다.
몬테카를로에서 리츠는 한 젊은 프랑스 요리사를 발견했다.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 훗날 '요리사의 왕'이라 불리게 될 인물이었다. 리츠는 즉시 그를 자신의 호텔 주방장으로 영입했다. 이 만남은 호텔 역사를 바꾸는 파트너십의 시작이었다.
리츠는 한 가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요리를 잘 못한다는 것. 그래서 요리는 세상 최고의 사람에게 맡겼다. 자신은 공간, 서비스, 분위기, 고객 경험에만 집중했다. 역할 분담이 아니라, 각자의 천재성을 극대화하는 협업이었다.

세자르 리츠(좌)와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04 · 사보이 호텔 — 런던을 정복하다
1890년, 리츠와 에스코피에 콤비는 런던 사보이 호텔(Savoy Hotel)의 재개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영국 상류층은 공개적인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품위 없는 일로 여겼다. 특히 여성들은 레스토랑 출입 자체를 꺼렸다. 리츠는 이 고정관념을 깼다.
그는 사보이의 식당을 귀족들의 사교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에스코피에의 프랑스 정찬 요리가 테이블을 채웠고, 리츠가 설계한 섬세한 서비스가 공간을 감쌌다. 귀족 부인들이 "정장 차림으로" 식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요일 영업 금지, 오후 11시 영업 종료 같은 낡은 법 조항에 맞서 리츠는 정치인들을 직접 설득해 규정 변경을 이끌어냈다.
사보이에서의 8년은 리츠를 유럽 최고의 호텔리어로 만들었다. 하지만 1898년 3월, 그는 사보이에서 해고됐다. 와인과 주류 대금 횡령, 공급업체로부터의 리베이트 수수 혐의였다. 그의 부인은 죽을 때까지 "그가 자진 사퇴했다"고 주장했고, 진실은 지금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어쨌든, 리츠는 사보이를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호텔을 열기로 결심했다.
05 · 파리 리츠 — 호텔의 역사를 다시 쓰다
1898년 6월 1일,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 세자르 리츠는 자신의 이름을 건 호텔의 문을 열었다. 개관 행사에는 마르셀 프루스트, 레이디 그레이, 로샹 공작 부부를 비롯한 유럽 엘리트들이 몰려들었다. 칼루스트 굴벤키안 같은 석유 재벌도 함께였다.
리츠 파리는 당시 기준으로 혁명적이었다. 모든 객실에 전용 욕실이 설치됐다(당시 대부분의 고급 호텔에서도 욕실은 공용이었다). 객실마다 전화기가 배치됐다. 에스코피에의 주방에서는 '페슈 멜바(Pêche Melba)' 같은 역사적인 디저트가 탄생했다. 리츠의 부인 마리-루이즈는 인테리어를 직접 설계했다. 여성 전용 바, 층계 높이를 낮춰 힐을 신어도 우아하게 오를 수 있는 계단, 안색을 돋보이게 하는 복숭아빛 간접 조명. 이 모든 세부 사항이 리츠 파리를 만들었다.
"최고가 지나치다는 법은 없다." — 세자르 리츠
1906년에는 런던 리츠(The Ritz London)가 문을 열었다. 리츠의 이름은 영어 사전에 'ritzy(호화로운)'라는 형용사로 등재됐다. 농부의 아들이 언어를 바꿔놓은 것이다.

오늘 날의 리츠 파리의 모습

런던 리츠 호텔 개관 당시의 모습
06 · 추락 — 완벽주의자의 그림자
하지만 리츠에게는 어두운 이면이 있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가방을 완전히 풀지도 않은 채 다음 호텔로 떠났다. 로마, 프랑크푸르트, 카이로, 요하네스버그. 그의 호텔 제국은 유럽 전역으로 확장됐지만, 그 중심에서 리츠는 점점 소진되고 있었다.
1902년 6월, 그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졌다. 에드워드 7세 대관식을 앞두고 최대 규모의 연회를 준비하던 도중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1907년에는 리츠 호텔 개발 회사에서, 1908년에는 칼턴 호텔에서, 1911년에는 파리 리츠 경영에서 손을 뗐다. 1913년부터는 요양원 생활을 시작했고, 1918년 10월 26일, 스위스 퀴스나흐트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68세.
그는 자신이 만든 호텔들의 전성기를 끝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세운 기준은, 그가 없는 세상에서도 계속 작동했다.
07 · 유산 — 그의 이름이 오늘도 살아있는 이유
세자르 리츠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살아있다. 파리 리츠는 1979년 이집트 사업가 모하메드 알파예드에게 매각됐다가 2012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2016년 재개장했다. 오늘날에도 방돔 광장의 리츠 파리는 세계 최고의 호텔 중 하나로 꼽힌다.
리츠-칼턴(Ritz-Carlton)은 1911년 그의 이름 사용권을 프랜차이즈로 넘긴 것이 시초다. 현재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산하에서 전 세계 100개 이상의 호텔을 운영하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됐다. 스위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세자르 리츠 칼리지(César Ritz Colleges)가 운영 중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호텔 경영 교육기관 중 하나로, 그의 철학이 다음 세대의 호텔리어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한 가지 개념은 오늘날 모든 서비스업의 근본이 됐다. "고객은 항상 옳다(The customer is always right)." 이 말을 처음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세자르 리츠였다.

스위스 Le Bouveret에 위치한 César Ritz Colle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