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하고 처음 몇 년은 단순했습니다.
이번 달 얼마 벌었고, 비용은 얼마고, 남은 게 얼마인지.
그 숫자가 플러스면 잘하고 있는 거고, 커지면 성장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투자 없이 누적 매출 200억을 만들어왔으니, 틀린 판단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5년차가 되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출은 여전히 나옵니다. 수익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안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잘하고 있는데 뭔가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불안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불안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업을 다음 단계로 키우려면 인프라가 필요했습니다.
머릿속에는 그림이 있는데, 벌어왔던 수익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남는 수익만큼 조금씩 투자하는 방식으로는, 만들고 싶은 구조를 만들기까지 몇 년이 더 걸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외부 자금 조달을 진지하게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지원사업, 융자, 투자. 어느 경로든 자금을 얻기 위해선 한 가지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기업 가치입니다.
기업 가치에는 멀티플이라는 개념이 붙습니다.
같은 영업이익 1억이라도 어떤 회사는 10억으로, 어떤 회사는 50억으로 평가받습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단순합니다.
이 수익이 반복 가능한 구조에서 나오는가
매출이 아무리 커도, 그 매출이 반복 확장 가능하지 않으면 멀티플은 낮습니다.
시장은 그 사업의 미래를 높게 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매출이 작더라도, 그것이 재현 가능한 구조에서 나온다면 멀티플은 높아집니다.
그 사업의 미래에 베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해한 순간, 우리 사업을 이 기준으로 다시 봤습니다.
5년간 매출을 키워왔지만, 멀티플을 키우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익은 나오는데 사업의 구조적 가치는 제자리.
외부 자금을 조달하려고 기업 가치를 들여다보니, 제가 5년간 뭘 하고 있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불안의 원인은 이것이었습니다.
매출이 늘어도 해소되지 않던 그 느낌.
손익은 나아지고 있는데, 사업의 구조는 나아지고 있지 않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말로 정리하지 못했을 뿐, 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프레임이 바뀌자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달 얼마 남았지?"가 아니라,
"이 성과는 반복 가능한가?"
“반복 가능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같은 의사결정 앞에서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적자를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습니다.
손익 프레임에서 적자는 곧 실패이니까.
그런데 기업 가치 프레임에서는 다릅니다.
반복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비용은 적자가 아니라 투자입니다.
올해 저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의도적인 적자를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선택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창업자가 사업을 바라보는 프레임은 한 번쯤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손익으로 충분합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매달 플러스를 만드는 것, 그게 초기 창업의 전부이고 그걸 해낸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손익만으로는 방향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잘 벌고 있는데 불안한 순간, 그때가 프레임을 바꿀 때입니다.
저는 이 전환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체감으로 압니다.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 저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남은 건 실행과 증명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