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핵심요약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기준은 밖에서 가져오면 되거든요. 책, 사람, 공간 — 직접 겪은 이야기를 씁니다.
수 년전.
스타트업 입사 첫 주,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생겼습니다.
웹사이트 제작. 이메일 마케팅.
둘 다 해본 적 없었습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요.
이렇게 되리란 것은 짐작해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이 회사에서 가장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에, 주니어지만 가장 잘 알고 있어야(혹은 잘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그게, 혼자 방치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C-level과 더 가까이 일할 수 있고, 회사와 서비스의 중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업무 차원에서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정답은커녕 정답에 근접한 것조차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는건 사실이니까요.
사수가 없는 게 아니라, 기준이 없다는 게, 그게 진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준을 밖에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정리해봤어요.
1. 책 — 프레임 빌려오기
책이 내가 맞닥뜨린 상황에 정답을 제시하리라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번 시도해보니 책은 정답지는 아니더군요. 대신, 책이 제게 건내줄 수 있었던 건 ‘프레임’이었어요.
대학 시절엔 재밌는 게 책 속이 아니라 책 바깥에 너무 많아 전공 서적 외에는 거의 손에 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찾아 움켜쥔다고, 급박하니 책에서 지혜를 찾게 되더라고요.
입사 직전에 읽은 라이언 홀리데이의 『그로스 해킹』이 첫 번째 기준이 됐습니다. 에어비앤비가 크레이그스리스트를 해킹해서 초기 유입을 폭발시킨 이야기, 드롭박스가 광고 대신 제품에 바이럴을 심은 이야기. 마케팅이 광고로 돈을 태우는 일이 아니라,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실험이라는 것.
물론 그 기준이 모든 것의 정답은 아니었어요. 직접 실무를 가르쳐줄 수도 없었고요. 그러나 이 하나의 프레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랐습니다. 뭘 시도해야 할지 모를 때, 적어도 "이게 그로스 해킹적인 접근인가?"를 물어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후에 시작한 탐독은 꾸준히 지속됐습니다. 노션에 기록한 책이 그동안 백 권 정도. 모든 문장이 제게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빅데이터로 학습한 AI처럼 은은하게 쌓여있어요.
2. 사람 — 부러움을 질문으로 바꾸기
랜선 사수라는 말, 많이 들어봤을 거에요. 제겐 이들 존재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입사하던 때 MoTV(모배러웍스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현재는 성수동에 작은 영화관 '무비랜드'를 열어 운영 중이지만, 당시엔 완전 초창기였죠. 그들은 이미 본업에서 내공을 쌓아둔 사람들이었기에 제 사수가 되어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습니다.
협업이 생기고, 팬층이 생기고, 브랜드가 커지는 걸 유튜브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어요. 2020년에는 배달의민족에서 브랜드 마케팅을 맡았던 이승희, 김규림 마케터의 두낫띵클럽이 MoTV와 협력을 시작하기도 했죠.
솔직히 많이 부러웠습니다. 멋있다고 생각했고요.
근데 그 부러움을 그냥 두지 않았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저 기획은 왜 저렇게 됐지?" 보면서 자연히 묻게 되더라고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보면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러움은 그냥 두면 소비로 끝나요. 질문으로 바꾸면 학습이 됩니다. 랜선 사수는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묻게 해주는 사람이었어요.
3. 공간 — 잘 만들어진 것을 읽어내는 훈련
세 번째 기준은 공간이었습니다.
회사가 마침 뚝섬역 인근에 있었어요. 성수동이 막 날개를 치며 떠오르던 시기였고, 팝업과 브랜드 공간들이 하나둘 생겨나던 때였죠.
입사 다음날, 블루보틀 성수 1호점이 오픈했습니다. LA와 교토에서 이미 가본 적 있었던 브랜드였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궁금했습니다. 왜 한국이었는지, 왜 성수였는지, 왜 저 벽돌 건물이었는지. 공간 하나를 보면서 브랜드의 의사결정을 찾아보곤 했어요.
피치스도 그랬습니다. 자동차, 음악, F&B, 패션을 한 공간에 묶어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 브랜드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만든다는 걸 몸으로 느낀 첫 경험이었어요.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잘 만들어진 것들을 보면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지?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질문들이 쌓여 기준이 되어갔죠.
공간만이 아니에요. 잘 만들어진 캠페인, 콘텐츠, 브랜드 경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됐지?"를 묻는 습관이 기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치며
사수가 없다는 건 불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라고나 할까요?
단순히 누군가 가르쳐줘서 좋은 기준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옆에 붙어 하나하나 매니징 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를 소화하는 것은 나의 몫이더라고요.
책에서,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이오플래닛에서 가져온 기준들이나, AI와 함께 만든 기준이 쌓이면 결국 나만의 기준이 됩니다. 첫 직장이 스타트업이라 사수가 없었던 게, 돌아보면 저를 성장시키고 넓은 시야로 관찰하게 했습니다. 덕분에 세상 전체를 사수로 삼을 수 있었어요.
지금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어떤 방법이 도움이 됐는지 이야기 들려주세요. 함께 고민하고 성장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