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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상의 기억 : 기자의 마침표가 시가총액을 흔들 때

아침 9시, 축제와 공포 사이

 

기사가 나온 아침 회사 주가창은 온통 빨간불로 물들었다. 소위 말하는 ‘쩜상(개장하자마자 상한가)’. 경영진은 환호했고, 단톡방은 불이 났다. 동료들은 무슨 일이냐며 흥분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기사 헤드라인을 확인한 나는 마냥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지난주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카톡과 전화로 연락해 오던 기자 기자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취재인가, 답정너인가

기자의 질문은 집요했다. 나는 ‘협의 중’, ‘검토 단계’, ‘유동적’이라는 방어용 단어들을 성벽처럼 쌓아 올렸다. 하지만 기자는 노련한 공격수였다. 그는 내 방어벽 사이로 슬쩍 ‘상식’과 ‘업계 관행’이라는 미끼를 던졌다.

 

“아니, 이 정도면 사실상 연내 공급계약 확정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상식적으로요. 일감 확보된 거나 다름없는데 너무 겸손하시네. 임팩트 있게 가야죠”

 

나는 끝까지 “아직 결정된 바 없다”며 정석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확인한 기사 제목은 내 대답과 전혀 딴판이었다.

 

OO사, 연내 차세대 2차전지 소재 대규모 계약 체결... 일년치 일감 단숨에 확보
내 입에서 나간 적 없는 ‘확정’과 ‘확보’라는 단어가 기사 제목에 박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축제 뒤에 찾아온 불청객

 

주가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회사는 축제 분위기였지만, 기쁨의 유통기한이 짧았다. 기자가 교묘하게 ‘트위스트’해서 뽑아낸 그 확정적 워딩은 시장에 거대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몇달 뒤, 해당 언론사에 금감원이 들어닥쳤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게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당 언론사의 일부 기자들이 기사 발행 전후의 주가 변동을 이용해 수익을 챙겼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내가 공들여 쌓았던 ‘협의 중’이라는 방어선은 기자의 펜 끝에서 누군가의 ‘수익 모델’로 재탄생해 있었던 셈이다.

 

커뮤니케이션 인사이트 — 담당자는 작가가 아니라 수비수다

이 아찔한 사건을 겪으며 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질문의 프레임을 거부하라: 기자가 던지는 “상식적으로 그렇죠?”는 질문이 아니라 유도다. 상대의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내 의도는 기사 제목에서 ‘트위스트’된다.

마침표의 무게를 견뎌라: 담당자가 쓰는 ‘쉼표(협의 중,...)’를 기자는 ‘마침표(확정.)’로 바꾸고 싶어 한다. 시장에서 마침표는 곧 자본의 움직임을 뜻하기에, 때로는 무미건조한 답변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방어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관계’가 아니라 ‘전략’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 건넨 호의적인 답변이 때로는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다. 홍보 담당자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가 미칠 파장을 계산하는 수비수 이어야 한다.

 

오늘도 누군가 나에게 “그거 연내에 되는 거 맞죠?”라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표정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각도로 검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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