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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질문
일곱 살짜리 딸이 차 뒷좌석에서 아빠(나, Adam Waytz, Morris and Alice Kaplan Chair in Ethics and Decision Management at Northwestern University)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지구에서 처음으로 말해진 단어가 뭐야?"
Northwestern University의 심리학자 Adam Waytz는 잠시 멈췄습니다. 그는 윤리, AI, 인간의 마음 인식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선택한 대답은 검색도, 추론도 아니었습니다.
"모르겠어."
그는 그 짧은 대답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았다고 고백합니다. 인류가 어느 순간 공동으로 언어를 발명했다는 사실, 그 과정을 아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문득 경이로움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Downright magical. (마법 같았다)"
오늘의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금, 마법을 잃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례 없는 정답과 빠른 설명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병원균이 어떻게 질병을 퍼뜨리는지, 발효가 어떻게 빵을 부풀게 하는지, 우울증이 어떤 신경화학적 경로로 발생하는지, 한때 신의 영역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과학적 언어로 명쾌하게 서술됩니다. 수백 년의 실험과 학문적 교류가 인류의 설명 능력을 극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생성형 AI가 등장했습니다.
ChatGPT, Claude, Gemini와 같은 대형 언어 모델(LLM)은 어떤 질문에든 즉각 응답합니다. 의학적 예후, 직업적 고민, 실존적 불안, 어느 것도 예외가 없습니다. 13,000개 이상의 ChatGPT 대화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사용자들은 평균 1.7개의 메시지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은 거의 즉시 닫힙니다.
이것이 진보처럼 느껴집니다. 당연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독일 사회학자 Max Weber는 100년 전, 이 방향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예견했습니다. 그는 계몽주의 이후 과학과 합리성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생겨난 결과를 하나의 단어로 포착했습니다.
Entzauberung.
번역하면 '탈마법화(de-magic-ing)'입니다. 세계가 설명될수록, 세계는 마법을 잃습니다. 그리고 의미도 함께 사라집니다.
Weber는 이렇게 썼습니다. "과학은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해야 하는 일인지, 그것이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무엇'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왜'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는 침묵합니다.
확실성은 오히려 우리를 더 위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Waytz의 연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AI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지적하는 위험은 AI의 오류나 환각(hallucination)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AI가 너무 설득력 있게 정확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것이 진짜 문제라는 겁니다.
130,000명의 사용자를 분석한 연구는 사람들이 LLM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사용함을 보여줍니다. 작업 수행이나 자기 표현보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실제로 옳든 그르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으로 '해결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입니다. LLM은 이전의 인터넷 도구들과 달리 탐색의 반복을 줄입니다. 구글 검색은 여러 페이지를 탐색하며 스스로 판단하게 했지만, LLM은 단번에 결론을 제시합니다. 검색이 '질문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면', LLM은 질문을 닫아버립니다. 또한 LLM을 추천 시스템으로 사용하면, 사람들이 선택하는 범위가 오히려 좁고 획일적으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Waytz는 이 현상이 단순한 지적 게으름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지적 겸손함(intellectual humility)의 쇠퇴입니다.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지적 겸손함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개인의 성장은 물론, 사회적 공감과 정치적 관용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확신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다른 관점을 경청하기 어려워지고, 이념적 극단화가 심화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틀렸다'는 경험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유 없이 확신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Waytz의 연구에 따르면 AI의 부상은 종교성의 쇠퇴와 연결됩니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신앙의 필요성을 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타로, 점성술, 수정 치유, 심지어 현대적 마녀 문화까지, 대안적 영성 실천이 전례 없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설명되지 않는 것, 신비로운 것, 경이로운 것을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욕구는 억압될 수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마법을 되찾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Waytz는 세 가지 방향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 비도구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최적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걷기도 운동 목표를 위해, 독서도 생산성을 위해, 대화도 네트워킹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목적지 없이 걷는 것, 할 일 목록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것, 그냥 흥미로워서 책을 읽는 것들이 비목적적인 활동들이 세상의 불확정성을 일깨웁니다.
Waytz는 여기서 흥미로운 예시를 듭니다. 프랑스 산업 디자이너 Philippe Starck의 Hot Bertaa 주전자입니다. 이 주전자는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걸작으로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수위를 측정할 방법도 없고 사용자를 데게 할 위험도 있습니다. 차 주전자로서는 완전히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조각품으로서는 그 비대칭과 미니멀리즘 속에서 경이로움을 줍니다. 때로 기능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적극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현대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황야의 자연 속을 걷거나, 교향곡이나 클럽 음악을 통해 몸이 음악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우리도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 앞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해야 합니다.
AI에 활용에 대한 우려를 표헌한 Waytz는 흥미롭게도 AI 자체도 일정 부분 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AI가 설계하는 건축물과 예술 작품, AI가 제시하는 과학적 가설, 이것들은 창조자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법을 찾는 곳은 반드시 자연이 아니어도 됩니다. 현대의 기술과 기적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연습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의 지혜 전통에서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소크라테스적 무지(Socratic ignorance), 즉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선불교는 쇼신(初心, Shoshin), 즉 초심자의 마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 세계에 열린 자세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모름이 곧 참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이슬람 사상, 유대 학문, 기독교 신비주의 모두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모든 전통이 하나를 향합니다. '모른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해방입니다.
Voltaire는 말했습니다. "의심은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신은 터무니없습니다."
에필로그: 오늘 한 번만 솔직하게 ‘나는 모른다’고 고백하기
Waytz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 한 가지 실천을 공유합니다. 그는 요즘 더 자주 말한다고 합니다.
"모릅니다."
윤리학 강의에서 학생이 어려운 도덕적 딜레마를 물어올 때도, 딸이 뒷좌석에서 인류 최초의 언어에 대해 물어올 때도 그는 '모른다'는 대답이 가장 정직하고, 가장 용기 있고, 가장 지혜로운 대답임을 배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짧은 문장이 세계를 다시 광대하게 만듭니다.
릴케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속의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에 인내심을 가지십시오. 질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지금 당장 그 질문들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대에, 설명하지 않는 용기,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 가장 혁신적인 실천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 질문과 함께 해보는 저널링 프롬프트
나의 '확실성 인벤토리'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것 세 가지를 적어보십시오. 그 확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직접 경험한 것에서 왔습니까, 누군가의 말입니까, 아니면 검색 결과입니까? 그 확신이 흔들린다면(실제로 확신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 거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아이슬란드의 Glenn Gould"라는 평가를 받는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Víkingur Ólafsson가 연주하는 Mozart: Laudate Dominum omnes gentes (From Afar, Deutsche Grammophon, 2022 곡을 들어보시면서 주말 여유를 갖고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ditor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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