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봇 #사업전략 #프로덕트
"잘못된 걸 더 오래 한다고 상 안 줍니다" : 280억을 버리고 주말 사이에 피봇한 창업자

280억 원을 투자받고 잘 나가던 회사를 접는 데 걸린 시간, 주말 산책 한 번. 

월요일 아침, 팀 전체에 피보팅(방향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퇴사하지 않았습니다.

윈드서프(Windsurf)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바룬 모한(Varun Mohan). 그가 이끈 회사는 GPU 클라우드 인프라로 시작해, AI 코드 자동완성 도구를 거쳐, 지금의 AI 코딩 에디터 윈드서프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피보팅과 빠른 제품 진화를 거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룬 모한 CEO가 말하는 피보팅의 기술, 소수정예 운영 철학, 그리고 미래 기술에 베팅하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 윈드서프는 AI가 코드를 직접 작성하고 수정해주는 IDE(통합 개발 환경)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쓰이는 커서(Cursor)와 경쟁하는 제품으로, 2024년 11월 출시 후 4개월 만에 100만 개발자가 사용했습니다.

 


[아티클 내비게이션]

  1. 가능한 한 더 작은 배를 골라 타라
  2. 280억을 포기한 결정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은 이유
  3. "우리는 아마 실패할 겁니다" : 100만 유저 뒤의 긴장감
  4. 사람은 적게, 할 일은 넘치게
  5. 내일의 기술에 베팅하라

 

출처: EO

 

가능한 한 더 작은 배를 골라 타라

 

바룬 모한은 2017년 MIT에서 전기공학·컴퓨터과학을 전공하며 학사와 석사 학위를 함께 마쳤습니다. MIT에 다니면서 링크드인(LinkedIn), 쿼라(Quora), 데이터브릭스(Databricks)에서 차례로 인턴을 했는데, 갈 때마다 더 작은 회사를 택했습니다. 당시 데이터브릭스는 아직 유니콘이라 불리기 전, 그저 작은 엔지니어링 팀이었습니다.

"저를 움직이는 건 항상 같았습니다. 비전이 뚜렷한 곳에서, 같은 목표에 몰입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문제를 푸는 것."

졸업 후 바룬은 실리콘밸리의 중심지인 마운틴뷰에 있는 자율주행 배달 회사 뉴로(Nuro)에 합류합니다. 뉴로는 무인 배달 로봇을 만드는 스타트업으로, 소프트뱅크 등에서 대규모 투자를 받으며 주목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룬은 여기서 자율주행 인프라의 테크 리드 매니저로 일하며, 딥러닝이 다른 산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처음으로 체감합니다.

 

 

2021년, 바룬은 MIT 시절부터 친구였던 더글러스 첸(Douglas Chen)과 회사를 차립니다. 이름은 엑사펑션(ExaFunction). AI를 돌리려면 고성능 GPU가 필요한데, GPU는 비쌉니다. 엑사펑션은 여러 기업이 이 비싼 GPU를 함께 나눠 쓸 수 있도록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해주는 클라우드 인프라 회사였습니다. 엑사펑션은 단 8명의 직원으로 1년 반 만에 연매출 수백만 달러를 올렸고, 280억 원이 넘는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숫자만 보면 분명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룬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매출 구조가 불안했습니다. 고객 한 곳이 빠지면 바로 흔들리는, 안정적으로 매출이 반복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시장 자체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ChatGPT의 기반이 된 GPT-3.5가 등장하면서 생성형 AI가 급부상했고, AI 업계의 판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회사마다 서로 다른 AI 모델을 썼기 때문에, GPU를 효율적으로 나눠 쓰는 엑사펑션 같은 서비스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부분의 회사가 비슷한 대형 AI 모델을 쓰기 시작하면서, 클라우드 업체들이 이런 모델에 최적화된 GPU 환경을 직접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엑사펑션이 풀고 있던 문제 자체가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280억을 포기한 결정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은 이유

 

주말 오후, 바룬은 공동창업자 더글러스와 조용히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은 채 걷다, 무거운 침묵 끝에 서로에게 던진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 앞으로도 쭉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 

대답은 둘 다 같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업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정했고, 월요일에 팀 전체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280억 원을 투자받은 회사를 하루아침에 백지로 되돌리는 결정. 그때 걱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바룬은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이미 회사 가치가 0이 되는 것까지 각오한 상태였습니다. 바닥을 이미 받아들인 거죠. 거기서 뭘 하든 지금보다 나쁠 수는 없으니까요. 빨리 만들어서 내보내세요. 망하면 지금이랑 같은 상황이고, 안 망하면 좋은 거죠. 오직 올라갈 일만 남은 겁니다."

갑작스러운 피보팅에 직원들이 떠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일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데, 새로운 방향이 맞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바룬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팀에서 공유하던 원칙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 원칙 덕분에 '이 방향이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저 관성으로 일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룬이 피보팅을 선언했을 때 직원들은 놀라기보다 오히려 수긍했습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었으니까요.

바룬은 피보팅을 실패의 인정이 아니라 용기의 증거라고 봅니다.

"잘못된 걸 더 오래 한다고 상을 주지는 않으니까요."

10명짜리 스타트업의 진짜 경쟁력은 기술이 아닙니다.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맞다고 확신하는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입니다.

 


 

"우리는 아마 실패할 겁니다" : 100만 유저 뒤의 긴장감

 

피보팅 후 팀이 주목한 것은 AI 코딩 도구 시장이었습니다. 깃허브 코파일럿(GitHub Copilot)을 일찍부터 써본 경험이 있었고, 코드 한두 줄을 자동으로 채워주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는 AI가 개발자 대신 기능 전체를 설계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완성된 결과물을 내놓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기술 개발에 걸리는 시간을 99% 줄이자."

이건 1~2년 안에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룬은 오히려 그 점이 좋았습니다. 목표가 크다는 건 할 일이 산더미라는 뜻이고, 할 일이 많다는 건 곧 기회라는 얘기니까요.

엑사펑션 시절 GPU 인프라를 다루며 쌓은 역량이 여기서 빛을 발했습니다. 팀은 기존 IDE에 AI 기능을 덧붙이는 확장 프로그램 코디움(Codeium)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디어에서 첫 제품이 나오기까지 2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기업들의 도입 문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왔고, 전문 영업팀을 급히 꾸려야 할 지경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제품을 만들었구나'라는 확신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100개 이상의 기업 고객을 확보했고, JP모건 체이스(JPMorgan Chase) 같은 대기업도 포함됐습니다. 제품의 완성도 덕분이었습니다.


 

자체 IDE 윈드서프로 (출처: EO)

 

하지만 바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2024년 중반, AI 모델이 점점 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다른 회사 제품의 확장 프로그램만으로는 AI의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확장 프로그램인 코디움으로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한 뒤, 자체 IDE인 윈드서프로 진화한 것입니다. 2024년 11월 출시 후 4개월 만에 100만 명이 넘는 개발자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룬은 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마 실패할 겁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이미 뒤처진 겁니다. 제품이 잘 팔린다고 안심하는 순간, 혁신을 멈추고 경쟁자에게 금세 따라잡힙니다."

 


 

사람은 적게, 할 일은 넘치게

 

바룬은 회사를 항상 가능한 한 작게 운영하려 합니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려는 일에 비해, 감당할 수 있는 한 가장 적은 인원으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항상 할 일에 파묻혀 있어야 합니다. 여유롭게 노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원칙은 채용 기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일에 파묻혀 있을 때 채용하고, 여유가 생기면 채용을 멈춥니다. 사람이 늘면 하고 싶은 일도 덩달아 늘어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지면 집중이 흐려집니다. 바룬은 스타트업이 단 한 가지를 잘하는 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

200명 가까이 된 지금도 바룬은 모든 신규 입사자의 면접에 참여합니다. 실력뿐 아니라, 팀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사가 커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솔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사실 회사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은 채로 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실 그 불편한 마음이, 스타트업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바룬은 봅니다. 솔직할 수 있는 분위기란 결국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맞는 건지' 끊임없이 되묻는 것이고, 그 질문이 멈추는 순간 조직은 관성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늘 위기감을 갖고 운영하라는 겁니다. 몸이 굳어버리는 두려움 말고, '다음에 뭘 해야 하지?' 하고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긴장감이요. 이게 없으면 조직은 편안해지고, 편안해지면 둔해집니다."

 


 

내일의 기술에 베팅하라

 

바룬이 자율주행 업계에서 배운 핵심 교훈이 있습니다.

소비자용 GPU의 연산 속도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십 배 빨라졌습니다. AI 모델 성능이 해마다 급격히 좋아지는 세상에서, 오늘의 한계에 맞춰 제품을 만들면 1년 후에는 이미 쓸모없어집니다. 이 경험은 지금도 윈드서프의 제품 철학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바룬의 팀은 다른 곳에 집중합니다. 개발자들이 윈드서프를 쓸수록 코딩 패턴, 선호하는 스타일, 프로젝트 맥락 같은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가 AI의 제안을 더 정확하게 만들고, 더 정확한 제안이 다시 더 많은 사용자를 불러오는 선순환 구조. AI 모델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이렇게 쌓인 데이터와 사용자 경험은 쉽게 대체되지 않습니다.

 

 

바룬은 스타트업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자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끝없는 낙관주의와 타협 없는 현실주의.

"낙관주의가 없으면 스타트업은 대기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본도, 자원도, 유통망도 대기업이 압도적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틀린 아이디어라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안 되는 걸 빨리 인정하고 접을 줄 알아야 합니다."

 


 

끝없는 낙관주의와 타협 없는 현실주의. 바룬 모한의 여정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양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280억 원을 투자받은 사업을 주말 산책 한 번에 접고, 2개월 만에 새 제품을 만들어 100만 유저를 확보한 이야기. 피보팅을 두려워하는 창업자에게, 그리고 '이게 맞는 건가'를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바룬 모한의 이야기는 이 질문을 던집니다.

잘못된 걸 더 오래 하는 것과,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두려운가요?

 

👆 GPU 클라우드 인프라 회사에서 AI 코딩 도구의 선두주자가 되기까지. 윈드서프(Windsurf)의 바룬 모한(Varun Mohan) CEO가 말하는 피보팅의 기술과 소수정예 운영 철학을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 편집: 김지윤 | 글: 서용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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